연구studium라는 단어는 충돌 혹은 쇼크를 가리키는 st- 혹은 sp의 어근으로 소급된다. 연구하는 것studiare과 놀라는 것stupire은 이러한 의미에서 친근관계를 갖는다. 연구하는 자는 충격을 받아서 그를 놀라게 한 것 앞에서 마비되어, 그것을 끝까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사람과 같다. 학생student은 그리하여 언제나 마비된stupid 자다.

⇒ 연구의 길을 가본 적은 없지만 오타쿠는 되어본 사람으로써 이 감각만큼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언가에 놀라고, 경도되고,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근본부터 흔들리게 하는지 기이함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상태. 오타쿠는 언제나 마비된 자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는 우리가 누구와 함께 알아야 하는지, 우리는 누구와 함께일 때 알 수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무엇을 아느냐는 어떻게 아느냐 그리고 누구와 아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내 지인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지켜내려고 문제적 상황을 자초하거나 거기에 처해 있곤 했다.

⇒ 정말로 그렇다. 똑같은 풍경이어도 그걸 누구와 함께했느냐에 따라 지평이 달라지고, 특정 주제에 천착해 있는 사람과 함께하다 보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국민국가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면 할수록 국민국가는 나의 관념 속에서 모든 것을 뒤덮는 괴물이 되어버리고, 그럴수록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의 열정은 커지는 역설에 빠져버렸다. 정작 비판을 하고 그 비판을 통해 거리를 취하고자 국민국가에 관한 논문을 시작했는데, 논문을 작성하며 그 개념 없이는 다른 사회적 현상들을 사고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건 간에 국민국가의 문제로 환원하려 했다. 비판의 의지가 도착되어 비판 대상을 내 안에서 절대화시킨 것이다. 이는 개념을 매개로 자신의 문제의식과 세계를 연결하는, 특히 인문사회학 연구자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증세라고 생각한다.

⇒ 나는 약간 페미니즘과 퀴어 이슈에서 이 늪에 빠졌던 적이 있는듯. 무얼 마주해도 특정 렌즈로밖에 보지 못하고, 렌즈 자체에 사로잡혀서..

그런데, 지식과 지적 주체와의 관계가 남아 있다. 나는 이를 ‘지식의 윤리성’의 영역이라 불러보기로 했다. 가령 내가 자본주의, 국민국가, 사회불평등, 젠더 갈등, 기후 난민, 부동산 투기, 스피노자의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를 한다고 해보자. 지식의 윤리성을 맴도는 물음들은 이것이다. 지적 주체가 생산하는 지식은 주체 자신을 향하고 있는가? 지적 주체가 스스로 생산한 지식을 매개 삼아 변화할 수 있는가? 지적 주체가 대상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을 때 혹은 대상에 지적 주체가 비치고 있을 때, 지적 주체는 거기서 불거지는 문제들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그 경우 무엇을 고려해야 지식은 지식으로서 성립하며, 지적 주체는 자신을 쇄신할 수 있는가?

⇒ 생각나는 풍경이 너무 많았다. 지식의 생산은 무얼 위한 것이던가? 비판은 왜 하는 거였지? 사회를 바꾸든 나를 바꾸든 아무튼 변화를 꾀하는 방향이어야 했을 텐데 뭔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효능감, 맞는 말을 하는 편에 서 있다는 우월감에 그칠 뿐 정작 정말로 내가 뭘 해야 하는 순간, 변화해야 하는 순간에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다. 거기엔 나 개인의 용기없음도 있었고 내가 지닌 지적 체계의 근본적 한계도 있다. 정말이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그리고 쓰고 싶다. 제대로 작가가 되자. 세상에 알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다 읽을 수는 없다. 읽는 시간을 줄이고 쓰는 시간을 되도록 늘리자. 당분간은 쓰기 위한 것들만을 필요한 시기에 읽자. 그리고 떠나자. 여행하자.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증명한다, 축적한다는 지식 행위에 대한 반발로서 월간지 『인물과 사상』에 2년간 여행기를 연재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있다.

⇒ 다 읽을 수는 없다는 문장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진짜맞는말이네요………. 읽는 게 업인 사람조차 다 읽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욕심 갈무리가 안될까요? 주말엔 나들이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근사한 카페도 가고 싶은데 그와중에 늦잠도 자고 싶고 책도 다섯 권쯤 읽고 싶다면 나는 주말을 몇 시간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근데 그와중에 축적한다는 행위에 대한 반발로 여행기를 연재한다니 대박 멋지다 저는 주기적으로 SNS 게시글과 사진을 삭제하는데… ㅋㅋㅋㅋㅋ

나도 콕 찌르면 꿀물이 흘러나오듯,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듯 말하는 사람을 둘 안다.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와 수유너머의 선배 고병권이다. 그들은 대화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를 향해 대화한다.

⇒ 사람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표현이 너무 멋지고 이런 표현으로 수식될 수 있는 사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면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좋아하는 옷차림으로 어디에 가고 싶나요?”, “결과가 좋든 나쁘든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하길 잘 했던 시도는 무엇인가요?”, “5분동안 전 세계 사람들이 당신의 발언을 듣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한 워크샵에서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까? 일단 내 경우 5분동안 전 세계 사람들이 내 발언을 듣는다면, 부디 우리 5분만 침묵과 묵념의 시간을 가지자고 하고 싶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은아 님은 해녀에게 농사와 물질이 어떻게 다른 의미인지를 알려줬다. 해녀들은 물질만 하는 게 아니라 농사도 짓지만, 농지는 대체로 남편 명의로 되어 있다. 결혼을 해서 남편을 따라 월정리로 온 해녀들도 많다. 농민보조금을 받기 위해 농사를 짓는 가구가 농업경영체로 등록할 때 남성은 경영자인 반면 여성은 무급종사자로 기재되곤 한다. 하지만 공동어장에서는 다르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바다의 자원을 관리하고 작업 방식을 정한다. 이로써 가정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스스로 확보한다. 해녀들은 함께 물질을 하며 서로가 바닷속에서 안전을 지켜준다. 이러한 주체성과 공동성은 여성인 해녀들에게 자긍심과 유대감을 안긴다. 이 이야기는 해녀들의 억척스러운 싸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였다.

⇒ 그냥 문단 전체에 형광펜 죽죽 그었다.

1월 8일, 제주시절 마지막 활동으로 임지인 님을 인터뷰하러 집으로 갔다. 제주기후평화행진 때 만났고, 〈말의 바다〉에 섭외했던 소녀. 해가 바뀌어 이제 열네 살이 되었다. 처음 만난 날 집에서 채식전시회를 한다기에 보러 갔을 때, 임지인 님이 족히 두 시간은 공들여 보여준 전시물과 설명해준 자세한 정보들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어떤 사람이 이토록 정성을 기울여야 할 활동이구나”라고 공감했으며, 채식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내게 인격화된 날이었다. 나도 임지인 님이 열정적으로 말하는 그 느낌을 얼마간 안다. 오랫동안 타인들에게 사쿠라이 다이조의 존재를 알릴 때 나는 흥분해 있었다. 자신이 애정을 담아 신뢰하는 인물이나 신념하는 가치를 타인에게 전할 때의 기쁨이 있다. 하지만 임지인 님은 나보다 차분하다. 중심이 잘 잡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 결국 자기의 관심 분야를 남에게 설명하는 의의는 이거 하나 아닐까. 요즘 읽는 책이나 덕질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면 대체로 ‘잘 이해는 못했지만 네가 행복하다면 좋은 일이지’ 하는 표정을 짓는데, 사실 그 순간의 반응이 어떻든 자기 주변에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만 입력되면 된다. 단어 하나가 입력된 것만으로도 시야가 달라진다. 시위에 자주 나가는 친구가 주변에 있으면 어느 날은 나도 시위에 나가볼까 싶고, 채식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나도 한번은 채식을 해볼까 싶고, 그런 거지. 나는 과연 지인들에게 무슨 주제로 인격화되어 있을지.

나중에 혹시 쓰는 동안 무엇을 못 한 게 가장 후회스러울까. 역시 지구인으로 태어나 지구의 여러 풍경을 보지 못한 것, 한 사회인으로 자라나 다른 사회를 겪어보지 못한 게 가장 아쉽지 않을까요. 하지만 쓰지 않는다면, 여행할 기회를 만들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앞으로도 여행은 갈 거고 여행기도 좀 더 써나가려고 합니다.

⇒ 가을엔 어디라도 놀러가고 싶어서 여행 계획을 설렁설렁 짜다 보면 그냥 그 시간을 통째로 도서관에서 보내는 게 더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든다. 아마 나는, 적어도 어떠한 면에서는, 도서관 3박4일을 일본 3박4일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다. 근데도 여행의 기회는 계속 만들고 싶단 말이지. 여행을 택하는 사람이고 싶단 말야.. 그래서 ‘쓰지 않는다면, 여행할 기회를 만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 기묘한 문장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여행을 택하는 사람이기 위해 여행기를 써야 한다는 말 아주 일리 있었다.



일단 동네 도서관에서 저자 이름을 검색해 나오는 모든 도서를 관심 도서로 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