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p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재를 창조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망각한다.

1장. 망각 불능증

세레솁스키의 사례. 기억이 완벽하게 동작할수록 기억을 할 줄 아는 통합된 자아는 축소한다.

41p 애착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함께 감싸안는 이 시간적 일관성이 바로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칸트의 지도교수인 크누첸: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관찰을 통해 객관적 법칙을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의 설계. 예정조화.

요한 게오르크 하만: 이성만을 가지고 지식을 확장하려 드는 건 철학적 교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철학적 엄밀함이 아니라 신앙이다. (사실 번역만 했음. 글의 원저자는 데이비드 흄.)

보르헤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망각 불능증 환자 푸네스. 모든 사물의 인상이 엄청나게 구체적이어서 여러 사물을 ‘한 단어’로 칭하는 걸 이해하지 못함. 추상의 결여. 일반법칙을 만들지 못함

  • 흄의 주장: 자아를 탐험할 땐 ‘지각’을 반드시 맞닥뜨림. 지각 없이는 자아를 포착할 수 없다.
  • 칸트의 주장: 그런 ‘순수하고 고유한 인상들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것이든 경험의 최소조건은 그 안에 너무 매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흄이 이 ‘주장’, ‘느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지각 외에도 어떤 것, 지각을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과거로부터 하나의 장면을 온전히 되찾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자아의 영속성을 보장한다. 관찰의 순간을 곱게 갈아 순수한 현재로 되살린다는 생각이 관찰 자체를 파괴한다.

⇒ 이거 독서기록할 때 많이 느끼는데. 책을 읽던 바로 그 순간의 경탄, 일순 느꼈던 현실과의 유리감은 독서노트를 한 편의 완성된 글로 재구성하려고 애쓸수록 멀어진다. 그치만 글로 안 쓰고 인용구 메모만 남기면 너무 단편적인 인상뿐이라 나중에 다시 읽어봤을 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계 독서 네트워크에 통합이 되지 않는다. 화해가 잘 안 됨.

2장. 바로 이 순간의 짧은 역사

칸트의 뿌리는 어디인가 → 고대 그리스까지 가보자

파르메니데스는 ‘궁극적으로 불변하는’ 거대한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일자’라고 불렀음. 모든 변화는 환상.

칸트가 스베덴보리의 주장에 긁혔던(ㅋㅋ) 이유: 영혼의 의식이란 시간 연속성을 가진 통일된 자아감일 뿐 그 자체는 우리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스베덴보리 같은 게 튀어나옴.

칸트는 이제 아래 둘을 구분한다:

  •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
  • 그것 자체로는 경험할 수는 없지만 경험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79p 구불구불한 강물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이러한 이성을 과도하게 투사할 때, 우리는 세계에 관한 일관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 도구로부터 우상을 만들고 그 개념으로부터 유령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영원하고 형언할 수 없는 진리를 가정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가 자주 그러한 가정을 변질시켜 만들어내는 유령과 우상은 과학의 성공을 방해하기만 하는 형이상학적 편견으로 반드시 전락한다.

⇒ 이거 왠지 상담센터에서도 다른 언어로 들어봤을 법한 깨달음 같다. 이성에 사로잡혀 유령을 보는 이야기. 이러한 착각은 특히 우리가 관념을 시공간상의 물체처럼 상상할 때 잘 발생한다.

제논의 역설은 왜 발생하는가? 실재하는 물체를 그 물체에 대한 생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운동은 명백히 상대적이다. 어떤 운동/변화를 그것 자체로서 측정하려 할 때 운동과 변화는 우리 눈앞에서 흩어진다.

칸트가 다시 이해하기에

  • 우리가 변화를 경험한다는 건, ‘어떤 것’이 변화하지 않고 남아있음을 의미.
  • 그러나 그 불변하는 것의 차원을 시각화하기 위해 우리가 시공간적 경험을 이해할 때 쓰는 도구를 사용하면, 그게 곧 제논의 역설이 되고 스베덴보리가 된다.

3장. 시각화하라!

양자세계에서 운동은 입자에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운동을 관측해서 도출하는 것이 입자다. 관계로부터 출현하는 어떤 것이 입자.

대단히 근본적인 차원에서, 시공간상의 두 순간을 꿰어 맞추기 위한 논리적 선결 조건인 변화하는 순간의 흐릿함은 관찰의 대상인 실재 그 자체에 고유한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

4장. 양자 얽힘

상보성이란? 파동 측면 / 입자 측면 중 하나만을 선택해 관찰할 수 있고 둘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실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솔베이 회의, 보어 vs 아인슈타인, 코펜하겐 해석

  •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 두 입자가 충돌할 때 만들어지는 ‘얽힘’은 단지 측정에 의해 드러나고 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일종의 숨은 상태를 나타낸다. 실재와 관찰은 독립적이다.
  • 하이젠베르크: 관찰이 실재를 결정한다.

한편, 실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실재하는 악(나치)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반응했는지도…

5장. 영원의 상 아래에서

칸트가 하고 싶었던 주장

  • 우리가 아는 건 모두 감각을 통하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조건적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 VS 영원하고 궁극적인 표준이 있으며 이것이 세계를 결정한다고 믿는 철학자들
  • 이 사이에서 ‘그들의 세계는 함께 존재하며 지금 그들 서로의 세계를 무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

이를 위해 칸트가 도입한 혁명

  • 실제로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다.
    • 이것이 계몽주의로 가는 발판이 됨
  • 통합성의 필수 관점을 책임지는 기능은 이성이지만 이성은 스스로의 힘을 잘 모른다.

도덕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1. 인류가 가진 관습을 관찰
  2. 이것으로 보편법칙을 끌어낼 수는 없지만 무조건적인 의무는 알 수 있다.
  3. 성향을 일반화하고 비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과 시공간 개념을 이용해서
  4.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이러한 방식은 쓰지 않을 것. 신은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을 테니까
  5. 선택할 자유는 신 아닌 존재에게 있는 것

정리해서, 칸트의 도덕론

  •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현대적 의미의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해도 모순이 없는가?’ 따지는 성질.
  •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선택할 능력(자유의지)도 있다.
  • 근데 기껏 의무를 지켰는데 돌아오는 게 없으면? 낙담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상태(최고선)를 동경하게 된다. 예수는 이걸 보여주기 위한 모범상.
  • 최고선을 따르지 않는 공동체는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 뿐.

칸트가 물려받은 도덕법칙

  • 계보: 루터교 경건주의 - 아우구스티누스
  • 행동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적 동기.
  • 만인제사장설 + 누구나 악한 본능을 갖고 있다.

6장. 눈 깜짝할 사이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삼위일체를 가져와 아리우스주의에 반박하는 무기로 삼았다.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지 않고, 구별되지만 본질은 하나.

플로티노스의 영원에 대한 성찰, 《엔네아데스》

  • 시간의 본질: 결핍의 연속.
  • 영원의 본질: 하나의 절대적인 현재,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없으며 모든 시간과 우주적 원형이 분리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포착되는 것.

7장.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 수는 유한하므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가능한 배열의 수가 소진되어 우주가 되풀이될 것이다.

니체의 초인은 이 우주적 부조리에 맞서거나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반복되는 삶을 산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영웅적인 건 염두에 두지 않았음.

바벨의 도서관, 북맨(Book-man). 다른 모든 책을 해독하는 하나의 책이 있고 어떤 서사는 그 책을 열람했다. 그래서 그는 신과 유사하다.

8장. 엄숙함

우주는 시간 및 공간 속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시간 및 공간과 함께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출발점이었던 그 극미한 점은 우리가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려도 내내 안쪽을 보게 되는 지평선.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끓지 않는 양자 냄비의 역설은 왜 발생하는가?

256p 우리가 실재에 대한 기대 - 실재는 단일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리라는 기대를,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일 뿐일 관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경로는 실재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의 경주를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9장. 측정하기 좋게 만들어진 우주

인류 원리: 알면 알수록 이 우주에서 인류가 태어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다. 어떻게 이런 우주가?

  • A. 신의 계시다 (강한 원리)
  • B. 다중우주론 (약한 원리)

강한 원리

  •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한 어떤 지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 칸트 시대에는 이런 류의 편견 - 확증편향이 더 강해져 있었다.
  • 다시 돌아온 칸트의 이율배반. 칸트의 접근: 애초에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 철학자도, 과학자도 자신의 이론이 옳다고 여기는 건 ‘아름다워서’

미의 원천

  • 세계로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오는 정보를, 근저에서 그것을 통합하는 어떤 개념에 의해 연결된 것으로 지각할 때, 우리는 그 결합물을 완전하고 아름답고 조화롭다고 본다. 합목적성을 알아보는 순간 = 미.
  • 하지만 이게 자연의 본질적 특성은 아닐 텐데?

목적 없는 합목적성. 우리는 구체적인 관찰과 일반적인 설명의 조화를 마치 설계를 통해서 그 조화가 거기에 놓이게 된 것처럼 드러내는 이론에 끌린다. 잘 짜인 줄거리, 교향곡.

그리고 어떤 현상이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면 그 현상과 관계맺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또한 우리가 가진 인식 수단의 무궁무진함을 느끼게 된다. 경외감, 숭고함.

인류 원리의 경우 우리는 원인 없는 인과관계를 갖고 나와서 시공간 바깥에 놓는다. 그러나 원인 없는 인과관계는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인 없는 인과관계를 인간의 선택이라는 맥락 하에서만 가정해야 한다. 인과관계는 시공간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10장. 자유의지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 자유의지는 환상인가?

297p 유물론자와 예정론자, 모두가 그러한 방책을 구사한다. 그들은 자유의 환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위치, 즉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 귀속되지 않은 위치를 점유한 덕분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질문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알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점, 우리 앞에 놓인 세계가 우리가 행하는 조사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야 한다.

양쪽이 모두 범하고 있는 오류: 시공간상의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을 확대해서 그것이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로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라고 부풀리는 것.

309p 자유의지는 착각이 아니다. 착각 또는 망상은 이것이다. 선택한다는 것과 같이 너무 사실적이고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실제적인 어떤 것은 우리가 가장 거창한 형이상학적 허세로 지어낸 신의 눈 같은 불가능한 관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11장.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

코펜하겐 해석에 질렸던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

우리의 관찰이 고양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관찰이 우리를 얽히게 해서 한 세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이 우리의 지각 능력을 선험적으로 지배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그 형태를 지배하는 수학 법칙에 대해 우리가 유도할 수 있는 건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이미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통합됨. 리만 공간에서 우리가 알던 삼각형의 면적 공식은 참이 아님. 즉 선험적이지 않다. + 하이젠베르크는 인과관계라는 틀 자체가 대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반박. 시간, 공간, 인과관계는 과학의 조건 그 자체인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단지 ‘제한적’인 것.

373p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보에티우스가 걸어갈 길의 모든 단계를 안다고 해도 그는 결단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으며, 좋은 선택이든 나쁜 선택이든 선택의 책임이나 공을 면제받지 않는다. 그러한 지식을 가정하면 우리가 몸을 담그고 유영하는 시공간이라는 매체가 소멸하고, 그에 따라 그 불가능한 관점 때문에 내가 할 미래의 선택들은 영원한 지금이라는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지금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 확실히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앎이 내 선택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마치 내가 길을 선택할 때 누군가가 나를 목격해도 그것이 내 선택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보르헤스랑 칸트 파트보다 하이젠베르크가 배는 힘들었다

흑체 복사며 이중 슬릿 실험이며 양자 스핀 업 앤 다운이며.. 학교 다닐 땐 이 내용을 다 이해를 했던가? 이해했으니까 그래도 시험을 쳤겠지? 근데 지금은 왜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지

하지만 다 읽어서 뿌듯

이제 딴 거 읽으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