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는 전자책 기준으로 쓴 거라 종이책과는 맞지 않음

(12p) 급조된 것이라도 좋으니 정신을 갖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의 병이라고 부르던 병.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니메이션, 창작, 작업 세계에 대한 동경. 똑같은 병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써 여기서부터 책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19p) 우리는 호텔을 나와 산책하고, 나는 서서히 불안해진다. 사람들을 만나 섹스를 시도하고, 남의 피부가 남긴 정체 모를 안전감, 발이 땅에 닿은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버스에 올라타 앞으로 반나절 정도는 불안하지 않을 것 같다는 계산을 하며 길에서 펄쩍펄쩍 뛰어보던 날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이성과 가치관이 타인에게 쓸모있게 받아들여졌을 때의 안정감과 나와의 물리적 접촉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의 안정감은 다르다고 요새 느낀다. 옛날엔 내가 물리적 접촉에서 어떠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되게 어려웠던 거 같은데. 그걸 인정하면 지는 거 같고 ‘그래 원래 사람은~’ 의 반응도 듣고 싶지 않았던 듯. 그렇지만 뭘 해도 완전히 꺼지지 않고 다시 타오르는 불안은 나도 조금 알 거 같아서 ‘펄쩍펄쩍 뛰어보던 날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와닿았다.

(30p) 그 후로도 종종 엄마는 모호한 투로 나를 남자에 비유했다. 나를 여자에 비유한 적은 딱 한 번이었다. 그때 얼마나 감동을 했던지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뭔가를 느꼈는데, 최근까지도 언어화되지 못하던 인상이었다. 엄마는 내가 남자 같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여자의 가톨릭적 미덕을 결여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성욕은 폭력성이자 원죄였는지 모른다. 쌍둥이는 남자아이였지만 폭력성이 희박했으므로 나보다 딸로서 대해졌던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두 자식에게 각각 다른 형태의 거절을 드러낸다. 성적 욕구가 강하고 그걸 숨겨야 한다는 압박을 참아낼 수 없는 딸래미의 행태는 부모에게 거의 공포로 다가온다. 어떻게 그따위 몰골을 하고 다닐 수 있어. 직접적으로든 우회해서든 부모는 자식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부분을 잘라내려 든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공포스러운 건지 부모도 언어화할 수 없고 부모는 그저 자기 공포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식의 무엇이 깎여나가고 있는지에 눈 돌릴 여력이 없다. 사유는 다르지만 남자에 비유하는 표현을 집에서 오래 들었던 사람으로서 공감.. 그게 내 자아 의식을 되게 이상하게 꼬아버린다는 점에서도..

(39p) 의견을 함께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런 사람을 사랑까지 할 수 있다니 사무치게 부럽다.

저도요!!!! ㅠㅠㅠ

(50p) ‘나는 나와 의견이 합치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고양된다. 그러나 그 무리에서 기력을 얻고 나면, 그들하고만 지낸다는 발상에 내 존엄성이 다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것이 기분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안 보고 살면 된다는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 그리고 근래의 나를 가장 관통한다고 느꼈던 부분.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서 살면 그걸로 내가 행복해질까? 그걸로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면 왜 나는 시위 현장과 티알피지 모임과 창작 모임 독서 모임을 전부 거치고도 아직 정답 근사치조차 얻지 못했지?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분명 무척 근사한 일일 텐데, 동시에 왜 이렇게 지겹게 느껴지는 거지?? ㅠㅠ 자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를 찾아 거기서 행복을 얻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만 그들에게 정답이었던 것이 꼭 나에게도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고, 사실 그렇게 들은 썰은 모두 타인-전달용 언어로 가공된 거니까 실제 생각이 어떤지까지 다 헤아릴 순 없겠지요.. 여튼 이 50페이지의 문장에 밑줄을 이백만번쯤 긋고 싶었다는 얘기.

(67p) 누가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도와준 적이 없었던 데다,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다가 갑자기 누가 주물러 왔을 때의 안도감을 스스로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비통했다.

여기서 ‘안도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진짜 마음 속으로 기립박수 쳤다. 이렇게 솔직할 수가 있나? 쏘 뷰티풀.

(91p) 사랑이 없어도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까? 사랑의 실패가 없이도, 살고 싶은 집에 못 들어갔거나 받고 싶은 교육을 못 받았을 때나 하고 싶은 일을 못 했을 때가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고 인생 깊이 연루시키고팠던 사랑의 좌절 없이 연주할 수 있을까? 그만큼 음악에 몰두하는 사람은 그런 적이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영상을 찍고 있던 것이 여자의 남편임이 드러났다. 저런 음악의 무녀 같은 여자가 가정을 손에 넣다니.

평생 한 분야에 몰두해 그 바깥에선 어떠한 사건도 좌절도 겪지 않은, 심지어 그 분야에서 성취까지 이룬 사람의 올곧은 프라이드와 가정을 이뤄서 얻는 안락함을 양손에 다 쥐고 사는 거 너무 비겁하지 않나요? 우우 불공평하다 하나만 해라

(97p) 결함없는 사람이 어딨어, 나도 결함이 있어.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도 나를 사랑할수록 내 제정신을 믿지 않게 됐다. 나는 페티시화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다. 남자친구들과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들은 내가 전 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배외주의, 우익의 득세를 걱정하는 것이 바로 내가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겼으며, 성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원하고, 보편 복지로부터 시작하는 점차적인 제도 개혁을 원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종식을 원한다는 것 또한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 열을 내는 성질이라고 여겼다. 내가 동네 공터에서 들리는 농구공 소리에 얼어붙거나, 그네를 보지 않으려고 앞을 등진 채 걷고, 데모에 나가서도 풍물놀이 패와 최대한 멀어져 있으려고 하는 점 등이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했다. 페티시화에 능하지 않은 성격이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불안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세상을 잘 살아가려는 사람은 페티시화에 능해야 한다. 밈화에 능해야 하고, 모든 것을 스몰토크 주제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적절하게 드러내는 결함은 틀림없는 페티시가 되고 부적절하게 드러내는 결함은 제정신 아니네가 된다. 근데 제정신 맞다고 강하게 반발하자니 자신이 없다. 제정신.. 맞나?

(99p) 가족을 결성한 사람은 가족을 중심으로 주위를 페티시화하여 세상의 뒤죽박죽을 헤쳐나가지 시작한다. 나도 그것으로 오랜 공포가 풀릴까.

그러니까. 페티시화를 경계하는 동시에 나 역시 페티시화를 통해 세상에 녹아들고픈 이 근본적인-혼자됨-공포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101p) 만화의 홈통을 타고 배수되는 두부의 간수 같은 시간 속에서, 애니메이션은 물장구치고 또 허우적거린다. 그 제약 속에서 찰방찰 나아가다보면 내 시간도 안정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애들을 데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 아빠들에게 정신이 팔리고 나서부터는 애니메이션 속에 켜켜이 쌓인 매너리즘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모르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안 보게 됐다. 외우고 있던 감독과 애니메이터들 이름이 가물가물해졌다. 내가 아는 건 애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아직 못 가진다는 거였다.

이쯤 되니 저자랑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마음이 격하게 들기 시작.

(105p) 여자애들이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으려면 섹스에 관심이 없어야 하고, 성적으로 관심받길 원하지도 않아야 한다. 키스하는 그림보다는 거대 로봇과 함선을 그려야 한다.

아~~ 그건 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

(130p) 이 시기를 거쳐 나는 누가 나의 여성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거나 남동생처럼 털털한 상대로 위치시키려고 하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런 시도는 내게 이제껏 퍼부어진 성추행과 성희롱을 전부 무효화해버리려는 도전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걸 굉장히 늦게 깨달았는데. 누가 나의 여성성을 가볍게 여기거나 남동생 포지션으로 위치시켰을 때 그게 사실은 화내야 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정말정말 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아니 그치만 숨쉬듯이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여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저자의 촉이 좀 부럽기도. 저는 둔해서 살아남은 거 같지만요.

(143p) 나는 나의 방식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나카무라가 주겠다고 했던 행복에 대한 궁금증이 도토리의 터진 자리처럼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도토리는 썩어가고 있다. 썩는 것도 움직이는 것이다. 후회해본다. 나카무라를 잃었음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나카무라를 만나기 전에 뿌리내리는 행복을 몰랐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몰랐던 것을 후회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으면 좋았겠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었겠지. 근데 어쩌겠어요. 그땐 몰랐는데.



외롭고 싶지 않다는,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게 핀트가 엇나간 조언으로 느껴진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만 욕망하고 드러내면 쉽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건 진정한 마주봄은 아닐 텐데
받아들여질 형태로 나를 다듬고 싶지
그건 어떤 말로 표현해도 그 말에서 드러나는 겉뜻 이상의 욕망이겠지
하지만 받아들여지면 거기가 종착점인가?
그게 종착점이면 왜 시위 현장에서도, 티알피지 모임에서도, 창작모임도 독서모임도 있었는데 여전히 헤매고 있느냐 말이야
결국 난 뭘 기대하고 있는가?
어쨌든 현재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건 좋은 방향이다
어제의 나와 다르게 살아보는 건 좋은 일이야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기. 아무래도 나는 책과 모니터 앞을 벗어나야 할 거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