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기분이다. 오늘은 너의 항아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마 선주마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외엔 아는 정보가 없다. 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지만 가끔 그 모습을 상상은 해보지. 아마 흰색이겠고, 아주 크지는 않겠고, 먼지가 좀 쌓였을 수도 있고, 그리 예쁘게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인적 드물고 칙칙한 창고에 방치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나도 겉모습은 순 풍문으로 들은 것뿐이라 그저 상상만 해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항아리가 어딘가 있기는 하다는 게야.
열아홉 무렵 너희 언니에게 물었었지. 왜 항아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냐고. 너희 언니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게 말이 되냐고, 알려주기 싫은 거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을 해라 화를 냈어.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지. 아아, 너희 언니는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는 그 궁금증 자체가 뿌리 깊은 오만임을 이해했다. 다 어릴 때였어서 그런 거 아니겠니. 내게만 알려주지 않는 게 성이 나고 나도 응당 알 자격이 있다 생각했던 건. 그게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열아홉의 나를 지금 내 앞에 데려다 놔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거야.
나이를 더 먹고서도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니다. 이맘때가 되면 달을 보게 되고 싫든 좋든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니까. 한 명쯤은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온갖 곳에 연락을 돌려 항아리의 행방을 알아내는 상상을 가끔씩 해 보지. 그러면 말야, 그 꼴이 아주 우스워. 내가 주인공이 되어, 네 항아리는 대상이 되어, 나는 찾아 헤매고 항아리는 나를 기다리고, 마침내 조우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극은 너무 신파적이지 않니. 나는 이제 그런 광대놀음엔 지쳤단다. 그래서 항아리는 계속 그 자리에 두려 해. 뭐 대단한 걸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듯, 여전히 그날에 얽매여 꼴값 떠는 나를 네가 좋게 볼 거 같지도 않으니.
근데 가끔 궁금은 하거든. 그건 어디에 있을까. 해가 잘 드는 곳일까 바람이 솔솔 부는 곳일까. 그 앞으론 어떤 사람들이 스쳐지날까. 스쳐지나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항아리가 내게는 무척 큰 의미를 갖는데 정작 그들은 항아리를 아무렇지 않게 눈에 담을 수 있고 나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부조리하지. 그렇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다는 걸 이제는 알아. 누군가에겐 세상을 둘로 갈라버릴 만한 큰일이 누군가에겐 고작 길가의 돌부리 같은 것이고, 나 역시 매일 네 항아리를 생각하며 살진 않으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지. 많이 흘렀다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내가 너를 잊은 만큼 너도 나를 잊었겠다 싶을 만큼⋯⋯.
이런,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야겠다. 생각나면 또 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