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이냐고? 뭐, 그렇다고 봐야지. 고향을 열여섯에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살아본 곳 중엔 여기 제일 오래 살았으니까. 아주 뿌리를 내렸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근데 뿌리를 내렸니 뭐니 하는 게 애초에 허상이지 싶어. 코로나 때 물거품 되긴 했지만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였잖아. 다 잠깐 거쳐가는 도시고 잠시 거쳐가는 삶인 거지. 사는 땅, 사는 집, 그런 데 의미 두는 건 부동산 시세 확인할 때뿐인 사람이 한 트럭이야. 지방 살았던 사람들이나 그런 노스탤지어를 쫓을걸.

처음 이 동네에 온 게 8년 전인가.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서 가물가물한데, 그땐 짐이 많지 않아서 이사업체 없이 아버지 차에 대충 얹어서 왔을 거야. 자식놈 영 못미덥다고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셨지. 침대만 용달 트럭을 불렀던가? 그리고 동네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을 먹었지. 그때 짜장면 먹은 집은 진즉에 망했어. 이 동네는 가게들이 빨리 바뀌거든.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 커피 한 잔을 팔천원에 파는 근사한 카페도 즐비했고, 단지 옆에 12차선 고속도로가 인접해서 창문을 1mm라도 열었다간 여는 만큼 고속도로 소음과 하나되는 방이었지만 나는 그 정신나간 소음을 사랑했거든. 새벽 세 시 네 시에도 꽝꽝 달리는 트럭 소리가 불면증 환자에겐 거의 선물이었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 그 빌어먹을 놈의 잠을 기다리며 이름모를 트럭 기사의 밤을 상상하는 일은 퍽 즐거웠어. 물론 내가 아는 트럭 기사의 삶은 순 매드맥스와 유로트럭뿐이지만.

부엌이 손바닥만해서 밥은 대체로 나가서 사먹었어. 식당 추천이라도 해줄 수 있음 좋을 텐데 정감 가는 식당이 많은 동네는 아냐. 그나마 가던 곳들은 이미 다 망했고. 아, 라면집은 아직 있나? 콘크리트 바닥이 꼭 니코틴 중독자 폐처럼 끈적거리는 술집 골목에 있던 거 말야. 옛날엔 많이들 줄 서서 먹었지. 근데 난 거기 라면은 영 취향이 아니더라고. 고깃기름이 둥둥 떠다니다 못해 내가 이 라면 속 돼지비계가 될 것 같은 맛인데 그걸 왜 먹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이 동네를 상징하는 맛이었던 거 같긴 해. 기름지고 끈적끈적하고. 아직도 생각나는 게, 옛날에 그 라면집 옆옆 건물쯤에 타코집이 있었거든? 몇 번을 가도 사람이 나 말고 한둘밖에 없는 게 곧 망할 거 같긴 했지만 난 좋아했었어. 근데 하루는 주말 아침에 거기 혼자 방문해서 창가자리에 앉아 타코를 먹는데, 창밖으로 뭐가 되게 아름답게 휘날리는 거야. 낙엽더미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가을 회오리바람을 타고 길바닥에서 훨훨 날아오른 란-제-리 셔-츠-룸 찌라시였어. 란-제-리 셔-츠-룸. 그런 진기한 풍경을 나만 봤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 난 그날 이후로 그 술집 골목에 들어갈 때마다 꼭 바닥에 널브러진 찌라시 문구를 하나씩 읽어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그밖엔 음, 어렵네, 상담센터가 괜찮아. 코로나 때 상담을 오래 다녔거든. 코로나 때문에 다닌 건 아니고 이래저래 일이 좀 있어서. 원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원형 테이블 한가운데에 곽티슈가 놓인 걸 보고 끔찍할 정도로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매번 그 진부함에 신세를 지고 나왔지. 진짜 진부한 건 나였던 거야. 원장님은 좋은 분이었어. 비록 눈에 아주 잘 보이는 벽면에 구리빛 십자가가 걸려 있어서 그것만큼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지만 말야! 상담센터 바로 앞에 저렴한 회전초밥집이 있어서 끝나면 꼭 거기서 밥을 먹었는데 나중엔 사장님이 콜라 서비스도 주시고 그랬어.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매번 벌개진 눈으로 초밥을 먹고 가니 기억하실만도 해. 종업원 아주머니도 잘해주셨지. 거긴 아직도 있냐고? 망했지 뭘 물어.

많은 게 없어졌어. 일 때문에 잠깐 떠나 있다가 작년에 돌아왔는데, 그 잠깐 사이에 진짜 다 없어졌다니까? 동네 사람이면 누구나 알던, 어디서도 안 파는 진한 초콜릿을 내주던 터줏대감 카페도 사라졌고, 뜨끈한 상하이 요리를 종류별로 팔아서 뭘 시켜도 맛있던 식당도 사라졌어. 난 누가 이곳에 놀러올 때면 꼭 거기를 추천했는데 말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몽블랑을 먹어보고 기쁨을 느꼈던 디저트 가게도 사라졌지. 이제 더는 맛볼 수 없게 된 음식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사장님들은 지금쯤 뭘하고 계실까. 그런 상상 해본 적 없어? 시내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내다보면 길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잖아. 저 사람들은 다 어딜 가고 있을까? 저 사람의 경로는 내가 다니는 경로와 전혀 다를 거 아냐. 동네라고 인식하는 범위도, 평소에 자주 가는 식당도, 매일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채우는 시답잖은 잡념도, 하여간 모든 게 나와 다르겠지. 어쩌면 20년 이상 이곳에 살았을 수도 있고, 이사 온지 한 달도 안 됐을 수도 있어. 여전히 근사하고 멋진 게 많은 이 동네를 사랑할 수도 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진절머리를 낼 수도 있겠지. 궁금하잖아. 저런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 동네가 되는 걸텐데 정작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없으니까.

동네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이런 얘기밖에 안 나오지 않나? 그래도 내 고향에 비하면 재밌는 얘기 많이 한 거야. 난 누가 고향에 대해 물으면 철 지난 독재자 동상이 공원에 서 있고 지역 내의 모든 초등학교가 그 동상 보러 현장학습 가는 곳이라고 말하거든. 작은 도시라 달리 갈곳이 없기는 해. 그래도 똑같이 진부할 거라면 사람이라도 북적대는 게 낫잖아. 그리고 이제는 뭐랄까, 마냥 관찰자로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이 아니다 싶을 때도 있어. 누군가는 나를 보며 이 끈적끈적한 동네에 몇 년씩 녹아드는 끈적끈적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거 아냐.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얘기하는 거지, 끈적끈적한 동네라는 말은.

어때, 이만하면 얘기가 다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