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는 사랑

이제는 팬덤 안에서 발생하는 정치학에 대해 이런저런 책이 많이 나와 있지만 케이팝 아이돌의 논란 및 공론화를 중심으로 다룬 책은 이게 유일했던 거 같다. 내게 기쁨의 감정만 안겨줄줄 알았던 아이돌이 나를 윤리적인 문제로 배신해 버릴 때, 내가 그들에게 내바친 시간과 사랑이 진창에 처박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전히 사랑하거나 가장 먼저 그를 손절하는 사람이 되거나 둘 중 하나뿐인가? 어느 쪽으로든 비겁해지고 싶지 않고 제3의 길을 찾고 싶다면 그건 어디인가 하는 고민을 나도 막연하게 했었고,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 덕질을 제대로 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목차만 봐도 한숨이 나올 것이다. 3장 제목. “너 같은 아이들이 사랑받는 직업으로 성공하면 안 되지.” 4장 제목. “진짜 피해자면, 아냐, 도로 삼킬게요.” 그리고 5장 제목. “내 인생론이 결국 OOO이 형성한 거라는 거지.” 굳이 책의 본문을 펼쳐보지 않아도 이 안에 누구의 어떤 목소리가 들어있을지, 생각나는 연예인 이름도 팬덤 이름도 (회한과 자조로 가득찬 트윗들도..) 무수하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1부는 아이돌 덕질의 메커니즘을 잘 모를 사람을 위해 전반적인 개념과 흐름을 설명하고 2부는 실제로 ‘망설이는 사랑’을 겪었던 팬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케이팝 팬덤에 대해 잘 몰라도 1부 덕분에 충분히 읽을 만하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을 주된 레퍼런스 삼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그 찬란함을 지우지 않는 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끌어안고 논쟁을 이어나가는 일이 산업의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26p)

그러나 아이돌 논란의 핵심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아이돌 아티스트는 ‘진실’이나 ‘사과’보다는 ‘퇴출’이나 ‘탈퇴’를 요구받으며, 그런 요구의 기저에 놓인 것은 ‘정직할 책임’보다는 ‘사랑받을 자격’이다. (86p)

추천 알고리즘, 덫, 동물이 자신을 가두거나 자살하도록 회유하는 일종의 ‘설득하는 기술’. 덫은 사냥감이 스스로를 해치도록 유도한다. 이는 사용자를 언제 어떤 새로운 정보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로 만듦으로써 그의 무의식적 습관까지 프로그래밍한다. 간헐적 정적 강화. (113p)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을 찾아나서는 과정, 혹은 그 사건을 자신의 삶과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 (166p)

인격의 상품화라는 수사는 종종 아이돌 산업과 팬덤을 빠르게 악마화하고 그 이상의 정교한 논의를 차단하며, 이는 인격의 상품화 안에서 생기는 팬들의 자책감과 실천을 누락함으로써 한편으로 상품화의 효과를 비가역적이고 단일하게 전제한다. (179p)

관심을 윤리적 문제로 이해하는 한 논문에서는 우리가 관심 경제 안에서 관심을 받음으로써 다른 이의 인식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식적 행위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누군가에 대한 관심을 회수하는 것은 그의 인식론적 역량을 빼앗는 일임을 지적한다. (중략) 따라서 누군가에게 관심을 끊는 일은 단지 그가 돈을 벌 수 없게 하는 일을 넘어, 그가 인식적 행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인식적 부정의이기도 하다. (199p)

그리고 사족 및 메모

  1. 요즘은 부쩍 이런 방향의 고민을 많이 한다. 비단 덕질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모종의 애정을 가진 대상이 남에겐 아주 끔찍한 무언가였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화의 포문을 열어주는 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느낀다. 같은 이유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도 언젠가의 독서 목록에 들어가 있다.
  2. ‘공적 담론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과시함으로써 인정 욕구를 추구하는 현상’을 그랜드스탠딩이라고 한단다. 이런 현상에 이름이 있는줄 처음 알았다. ‘분노하지만 논쟁하지 않고, 판단하지만 성찰하지 않는 집단적 도덕주의와 그랜드스탠딩’.
  3. 음모론적 구조. 사람들은 ‘인성’을 몇 개의 영상과 캡처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4. 케이팝 공론화 문화를 배운 사람들이 기업 불매운동도 비슷하게 접근⋯하나? ‘도덕’이 메인 키워드가 되고 주로 온라인 공간에서 굴러가며 여기도 사상검증과 그랜드스탠딩의 논리가 작동한다.
  5. 세상에 ‘순수한 즐거움’이란 없다. 그런 게 있다면 그 즐거움에 연결된 수많은 맥락을 외면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양가성을 직면하는 태도다. 무언가가 다소간 석연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힘을 인지한다는 것.”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기. 뒤처져 남겨진 사람들. 남겨져서 집요하게 망설이는 사람들의 사랑. 전력으로 사랑했는데 결국 원치 않은 결말로 남겨진 사랑. 그런 걸 되새길 때면 늘 뭔가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꼴은 좀 못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못난 꼴로 남겨지지 않았을 텐데.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비평조의 글이나 쓸 수 있었을 텐데.
  6. 여전히 구-장르에 남아 있는 트친들을 보며 어딘가 배신?하고 나왔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근데 이걸 팬덤 바깥에 있는 타자는 잘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동은 오로지 치열하게 망설이는 사랑을 겪어본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어떤 면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모른 척할 것인가 윤리적 고민에서 달아나지 않고 능동적으로 연루되어 본 사람들의 감각이 있다.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이렇게나 퀴어하고 눈이 크게 뜨이는 제목의 책이 전혀 그런 인상이 없었던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대단히 놀랍다. 난 아직도 이 책을 볼 때마다 이게 오월의봄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좋은 책이었다. 다양한 의견을 기꺼이 들어줄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꼭 해보고 싶다. 분명 이 책의 주장을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혼란스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화해 볼 가치가 있다.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주파일’들은, 동물의 삶을 성적인 측면까지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동물의 자위를 도와주는 사람들, 실제로 동물과 관계를 갖는 사람들, 현재 파트너(동물)는 자신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 보호자와 펫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놈의 성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는 즉각적인 반감이 들 수 있지만 사실 ‘성적인 측면이 존중받는가’ 하는 질문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도하게 섹슈얼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흑인들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섹슈얼 대상으로 여겨지는 중증 장애인들을 생각하자.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항상 성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한다. 대중은 아이와 청소년과 여성을 존중하다가도 그들이 우리 예상 밖의 성적인 측면을 보이면 - 우리가 원하는 순수성의 틀에 맞지 않으면 - 즉시 그들을 매도한다. 성적인 측면에 대한 존중은 자연스럽게 실천하기 꽤 어려운 가치고, 어떤 존재를 존중한다고 말할 때 한번쯤은 고려해 볼 만한 무언가다.

종종 ‘섹스할 권리’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아직도 중증 장애를 앓는 자신의 친구를 안쓰럽게 여겨 어차피 몇 년 살지도 못할 텐데 virgin 으로 죽게 둘 순 없다고 매춘부에게 데려갔다던 내용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기억한다. 이 영상을 처음 접했던 8년 전의 나는 중증 장애인의 섹스 라이프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언어화하기 힘든 울림을 받았었다. 영상을 다시 열어본 지금도 감상을 한줄로 표현하긴 어렵다. 물론 ‘섹스할 권리’ 같은 단어를 충분한 방어논리 없이 썼다간 그딴 게 왜 필요하냐고 너 한남이냐고 사이버불링 360도로 당하고 글이 내려가겠지만, 나는 적어도 이런 단어가 나오게 되는 배경에 대해선 얘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타자와 할 수 있는 친애의 표현 중 가장 농밀하고 접촉하는 표면적이 넓고, 이성과 체면으로부터 단절하고 자신의 신체 및 동물성을 마주할 기회가 되는⋯ 그런 것이 사람에겐 때로 필요한 법이고, 누구나 그런 접촉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복 받진 않았다.

성을 존중한다는 건 곧 신체를 존중한다는 것이고 그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 된다. 가족 구성에서 아이는 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전까지만 ‘아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반려동물을 오구오구 내새끼 하고 영원히 ‘아이’처럼 대하는 문화 안에선 동물의 성까지 존중하긴 어렵다는 게 주파일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사람과 동물이 함께 지낼 때 사람의 생활 환경에 동물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한 환경과 동물을 위한 환경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저자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주파일들의 집은 대개 사람보다는 동물의 편의에 맞춰져 있었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 눈에는 주파일들이 X또라이 변태 새끼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저 이런 성향을 타고난, 심지어 무척 보수적인 윤리관의 소유자로 여긴다. 왜냐면 그들은 오로지 사랑하는 한 동물과만 그런 관계를 갖고 절대 흥미 본위로는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섹스할 수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은 정반대에 있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자신을 윤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모노가미의 문법을 확실히 지키는 듯했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 자체도 아주 흥미롭지만 책을 쓴 저자가 긴 세월 가정 내 폭력을 겪으며 사랑/섹스/폭력 등의 주제에 오래 천착해 있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랬기 때문에 주파일을 연구 주제로 고르게 됐다고 저자가 직접 밝히고 있기도 하고, 결국 그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맴돌며 책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아래 문단이 작지 않은 울림을 줬다.

폭력에는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끝내려는 힘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체감을 통해 알고 있다. 폭력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신체에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섹스보다도 생산적이다. 폭력은 증오나 분노처럼 분리되기 어려운 감정을 만들어내면서 인간을 자극한다. 그리고 계속 폭력에 시달리면 자신의 내부에서도 폭력성이 싹을 틔운다. 그 싹이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향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바로 자신에게로 향했다. (248p)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메모.

  1. 폭력에는 분명 이런 면이 있다. 폭력은 사람 안에서 그 전에 없었던 무언가가 피어나게 만든다. 물론 그 피어남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쓰자는 말이 전혀!!!! 아님!!!! 요지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당해야 했던 어떤 폭력의 흔적은 지금도 내게 남아 있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고 어디론가 향하게 만드는 추동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추동 자체를 모른 척하자는 게 바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이 되지요.
  2. 하지만 폭력으로 인해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성장 서사마냥 말하는 것도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므로 보통 그 경계선을 안 넘고 싶어하는데 역시 사회학 책이 짱이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교란하는 언어를 쓰지… 이런 책이 어떻게 나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