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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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8 “아무리 양심적으로 오키나와의 피해를 이야기하더라도 거기서는 오키나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숨은 메시지가 들려온다.” 전 이게 진짜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내심 내가 저 자리에 있을까봐 불안한 거야 내가 당하고 싶지는 않은 거지

휘말리고 떠맡는다는 건 남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해설하는 일도 아니고, 원래 다 그런 법이라고 뻔뻔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병자로 타자화하여 치료하는 일만도 아니고, 그 사이 어딘가 서술되지 않은 틈 속에서 앎을 확보하는 행위다.

남의 일이라며 회피하던 아픔을 지각하는 것은 구획되어 있던 자신의 토대가 무너지며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사태에 휘말리는 수동적인 전개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하다. ‘내 몸에 떠맡는다’는 파농의 말은 휘말림으로써 생기는 자신의 혼란을 타자의 아픔과 함께 능동적으로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게 생각났어요

의사소통은 원래 혼란스럽다. 대화와 독서 - 모두 혼란스럽다. 대상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과정.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던 아픔을 지각하는 건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그건 어쩌면 가해자였을 수도 있을 나, 어쩌면 피해자였을 수도 있을 나, 그것을 지금까지 몰랐던 나를 전부 보게 하기 때문에 몰랐다는 걸 알게 하기에

따라서 떠맡는다는 것은 당장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이 어려움을 끌어안는 일이기도 하다. 아픔에 휘말리고 그것을 떠맡는 것을 안다는 행위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우선은 이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중얼거림을 금지하고 우리를 병자로 처리하거나 범죄자로 조치하는 세계에서 계속계속 난로 앞에 모여 말함으로써 방어태세를 취하고 폭력을 예감하고 새로운 타자를 찾는 수밖에 없겠지요

2025-07-18 이 난로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자꾸 생각난다. 누가 잘 만들어준 난로 옆에 헤헷 하고 꼽사리 껴서 가는 게 편하고 좋았는데 요즘 점점 내가 직접 난로팟을 꾸릴 능력과 능동성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그렇고

아 우리 증말 문제투성이인데 누가 해결 좀 해줘야 하지 않나~ 하고 둘러보면 내가 어느덧 그걸 남한테 미룰 연차가 아님 이잇 젠장

한때 저도 사수를 보며 생각했지요 당신이 그래도 내게 뭔가 미래를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지? 구체적으로 뭘 보여달라는 건지는 말하는 나도 모르지만 당신이 가진 인사이트 뭐시기가 있을 거 아닌지? 그리고 사수 연차가 되어보니까 알겠음 인사이트는 여전히 없는데 그걸 고민하는 성실성이 필요함

취미 영역에서도 누가 불러주면 헤헷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나가는 역할만 했는데 지금부터라도 난로를 직접 만들어 버릇해야 뭔가의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난로 만들기 101 배워야 된다

관련 있는 말은 아니지만 요즘 읽고 있는 모 웹소에 대해서도 이걸 ‘덕질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있다기보다는 이 웹소가 new 난로를 만들었다는 인상이 있음 그리고 사실 덕질이란 게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그렇게 인식하는 쪽이 저한테는 더 잘 맞는듯

2025-07-20 ‘ㅇㅇ이니까’라는 근거는 없고 ‘ㅇㅇ가 아니기’ 때문에 회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그저 ‘ㅇㅇ로 보인다’는 이유가 전부라는 설명을 읽고 문득 주디스 버틀러 ebs 강연 캡처 트윗에 인용으로 남자는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병적인 증상으로 구분되어 있는 영역이 체험에 관한 기억을 따라다닌다면 이 증언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내던지거나 ‘병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보였다’고 멋대로 서술할 것인가? 책 『망고와 수류탄』이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했음

2025-07-27

황야 한복판에 홀로 내던져져도 논의를 할 타자를 발견하고 장소를 만들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역량. (중략) 황야란 자신도 분명 소속되어 있는 사회이지만 아무리 해도 그 사회에서는 있을 곳을 찾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응시할 때 떠오르는 세계의 조용함에 대한 것이다.

저는 연구자가 아니어서 ‘회사가 말 안 통하고 나와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을 좀처럼 찾을 수 없고 있을 곳이 없게 느껴져도 논의를 할 타자를 발견하고 장소를 만들어 나가는 역량’으로 읽었음 제에길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저자는 그런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발언 경쟁식 의자 앉기 게임의 양태를 벗어난 세미나 ‘화요회’를 시작.

그 게임에는 ‘아는 사이’나 ‘좌파’ 같은 코드가 들어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좌파’란 어떤 종류의 인맥에 소상하다는 뜻일 뿐으로 ‘아는 사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구분된 지식 양이나 학계 습성의 습득 정도, ‘아는 사이’ 같은 코드가 서로 얽히는 가운데 의자 앉기 게임은 계층적 질서가 되고 그 질서는 또다시 몸에 익혀야 할 습성으로 정착된다.

대학원생이 아닌데도 왠지 알 것 같음 뭔가.. 기시감이 있어

또 그 웹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심사’가 아니라 ‘자신을 넓혀나가고 새로운 만남과 집합성을 향하는’ 논의 나도 하고 싶었어 나는 진짜로 나랑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칭구가 되고 싶었어 근데 내 화술이 좋지 않은 거 같았어.. 설득에 실패했다구

읽는다는 행위에서 ‘난로’를 모색한다길래 이 아저씨 혹시 독서모임 안 해보신 거 아님? 그게 글케 잘 흘러가지가 않아요 쉬익쉬익 했는데 몇 장 뒤에 ‘그것을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부연해 줘서 진정함

근데 진짜로 뭔가를 논의하는 모임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의견의 차이 같은 게 아니고 ‘동시에 복수의 발언을 하거나 들을 수 없고 두 발언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 우선 어느 한쪽을 보류하거나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맞아 그에 대한 해결책은 휴식과 기록뿐인 것도 맞음

책이 종장에 들어서더니 갑자기 모임 잘하는 법.. 기록이 중요한 이유.. 이런 걸 알려주고 있음 약간 어리둥절 중요한 거 맞지 ㅇㅇ

전 불성실한 독자라 보론 같은 건 안 읽을 거임 미안하지만 본론과 후기면 충분해요 보론은 상상계의 내가 읽어줄 거야

올바름이라는 레일을 탈선하지 않게 나아가는 일은 올바름이라는 횡단적인 슬로건 속에서 서로 다른 복수의 움직임을 대표하려고 하는 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자의 올바름이 닫힌 보신인 반면, 후자에는 어려울 줄 알면서도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나가려고 하는 타자에 열린 태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