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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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불쾌함’이라는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자원 배분과 결정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더 불쾌하고 피로한 사람이 더 발언권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2022-03-01 다 읽었다.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최신작인 『사랑의 현상학』과도 일맥상통 하는듯. 이미 이 책 쓰실 때부터 레비나스를 좋아하셨던걸까.

2022-03-02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 행위의 동기가 그 자신 안에서 나왔는지, 교육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얼마나 자발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지’에 따라 그 행위의 가치를 매기는 일에 익숙하다. 타산과 이해 관계보다는 자발성을 더 존중한다. 돈과 권력, 명성 등과 같은 자기 바깥에 있는 목표를 향해 행동하기보다는 개인의 흥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지금 사회가 자발적인 내적 동기를 너무 중요시 한다는 거에 공감. “진심으로 즐기고 성장하고 싶어하는” 거에 무게 두는 거 솔직히 지친다.

2022-03-02

작년에 한 국립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 대학의 신문을 만드는 학생이 인터뷰하러 와서 처음 한 질문이 “현대사상은 왜 배워야 하나요?”였다. 이 질문을 한 학생은, 내가 그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하면 그것을 배워도 좋겠지만 내 답에 설득력이 없으면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학술 분야가 배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거만함과 무지에 정말로 감동받았다.

세상에는 스무 살짜리 학생이 갖고 있는 가치 척도로는 계량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그 학생은 자신이 애용하는 30센티미터 자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측량하려는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자 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건 왜 배워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 스승이 답을 준들, 아직 배우지 않은 제자는 답을 이해할 수 없다. 자기가 납득하지 못하면 배울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자신을 ‘배움’의 구매자 포지션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오히려 독이다.

2022-03-02

자기결정•자기책임이라는 삶의 방식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밖에 없다. 하지만 리스크 사회에서 강자들을 살펴보면 다들 상부상조•상호지원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그 덕분에 리스크 헤지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리스크 사회에서 자기결정•자기책임을 관철할 수 있는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스크를 떠안는 존재는 자기결정•자기책임의 원리에 충실한 약자들뿐이다.

2022-03-02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힘 자기 돈으로 사는 사람이 ‘자립한 인간’일까? 그건 고립이지 자립이 아니다. 자립은 주변 사람들이 ‘저 이의 언행은 믿음직스럽고 조언과 연대를 구할만하다’ 인정해서 사후에 획득되는 호칭이다. 스스로 ‘나는 자립했다’ 선언하는 건 불가능하다.

2022-03-02

‘파랑새’를 찾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파랑새’를 찾으러 떠난다면 골목의 눈은 누가 치우겠는가?

2022-03-02 일과 배움을 포함한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내가 소모한 자원과 받은 보상이 ‘등가’인지는 애초에 판단 불가능하다. 그러한 비교는 무시간적인데 나의 자원 소모는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 그리고 사실 ‘등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교환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 가치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