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픽, 책에 갇히다
1월에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가 오늘에야 도착 알림을 받은 『책에 갇히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라니 취향이 아닐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첫번째 이야기인 ‘붉은구두를 기다리다’ 부터 너무 행복하게 읽었다. ‘오즈의 마법사’ 를 건국설화로 여기는 부족, 구전설화만이 남은 세계,
신화 내용을 연극으로 선보이는 제사, 그리고 그 제사를 총괄하는 제사장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끝에 가면 이야기 자체가 또다른 신화가 되는 구조가 너무도 정갈하고 깔끔해서 가슴 벅차하며 읽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신화로 여기는 부족이지만 주인공들의 이름은 인디언 부족을 떠올리게 하고 (푸른소, 붉은구두, 검은사슴 등등) 24절기의 하지와 동지 개념이 그대로 등장한다. 그리고 부족의 대척점에 로봇이 나온다(!)
읽다 보면, 문장에서 자연스레 떠올렸던 (익숙하게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계속 부숴진다. 이 세계관 속의 로봇은 정말로 내가 아는 ‘그’ 로봇인지, 하지와 동지가 정말로 24절기의 그 개념인지. 그렇게 이해에 덮어씌워져 있던 기존 상식을 걷어내고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이것 역시 신화이므로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 지가 중요하다는 걸 메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거기까지 연결하는 흐름이 너무 간결해서 매우 취향이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성별이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맨 마지막에 언급이 되는데 (물론 저 세계관의 남녀가 우리가 쓰는 ‘그’ 남녀 구분과 동일한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신화의 주인공은 남성으로 생각하게 되는 걸 산뜻하게 잘 비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오른아버지/왼아버지 라는 단어도.
지금은 두번째 단편 ‘금서의 계승자’를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다. 작가님이.. 독자를 고문하고 있자나요……. 처음 몇 페이지만 봤을 땐 책을 의인화한 컨셉인가 하고 즐거운 오타쿠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보다 보니 모럴을 저멀리 내던져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금서의 계승자’도 끝. 초반부 빌딩이 너무 독자를 괴롭게 했던지라 마지막의 빨간색 엔딩이 속시원했다. 아 역시 혁명! 그다음 단편인 ‘12월, 길모퉁이 서점’은 개인적으로 좀 미묘했다. 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매력 포인트를 잘 모르겠어서.. 이세계물의 조상님 격 같긴 하지만 말이죠
가정에서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서점에서 위안을 찾는 부분까진 되게 서정적인 동화풍이었는데 여기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스테리 월드로 갔다가 마지막엔 외계인 SF 로 끝난 게 어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