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틀린 도티,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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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9 『원본 없는 판타지』 드디어 끝내고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진짜 너무 재밌다.. 머리 끙끙 싸매는 논픽션 읽다가 소재 자체가 재밌는 책을 읽으니 아주 기부니 조아요

2021-01-09 토라자에서는 죽음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견고한 경계가 아니라 넘나들 수 있는 경계로 보고, 서양 의학 기준으론 사망한 상태여도 토라자의 전통에 따르면 ‘숨이 멈췄을 뿐 죽은 게 아니기’ 때문에 보존처리만 하고 집에 둔다고 합니다. 몇 개월에서 길면 몇 년까지도.

2021-01-09

여성의 몸은 생식기든, 섹슈얼리티든, 몸무게든, 옷 입는 방식이등 종종 남성의 시선 하에 놓인다. 몸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혼돈스러워지고 야생의 것이 되어 해체되었을 때만 찾아지는 자유가 있다. (…) 아마 재구성 같은 과정은 우리 여자들이 시신을 다시 돌려 받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2021-01-09 산 사람과 (서양 의학 기준으로) 죽은 사람 사이의 확고한 경계선을 마구 헝클어뜨리는 얘기는 언제 읽어도 재밌다. 뭘까 이 기묘한 해방감…

2021-01-09 어제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아무 관련없는 제3자가 ‘이제 이 사람은 사망했습니다’ 를 선고하고 아무도 못보는 곳에서 후처리를 하는 거 사실 좀 폭력적인 거 같아. 스위치 on/off 하듯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아닐 텐데. 너저분한 중간과정도 가감없이 보여지면 좋겠어.

2021-01-09

공과금을 낼 때가 되면 돈을 내야 하지요. 회사에서는 내가 돈을 내고요. 여기 식당에서도 먹었으면 돈을 내야 해요. 우리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설혹 죽음이 두렵다는 감정이 들더라도, 그 느낌을 그냥 느낄 수밖에요. 청구서가 날아오면 지불해야 하는 거죠.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겁니다.

2021-01-14

가족 구성원이 루리덴을 찾아오면 입구에서 고인의 이름을 타이핑하거나 칩이 든 스마트 카드를 갖다 댄다. 이렇게 하면 벽면에 환한 백색으로 빛나는 불상 하나만 제외하고, 온통 청색 불이 들어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여러 이름을 뒤질 필요가 없다.

2021-01-14 “가을 풍경!” 하고 외치니까 불상 색 촤라란 하고 바뀌는 거 너무 웃기다 무협소설에서 초식 쓰는 거 같고 막 이렇게 스마트하고 유쾌하고 간지나는 납골당이라니;

2021-01-14

화장이 끝나고, 조각난 뼈들이 화장로에서 나온다. 서양의 화장장에서는 이런 뼈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지만, 일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대나무 젓가락과 쇠젓가락 몇 벌을 받는다. 상주가 발뼈부터 시작해, 젓가락으로 고인의 뼛조각을 집어 들고 항아리에 담는다.

2021-01-14 유가족이 시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라스텔 (라스트 + 호텔) 에 대한 설명. 저자가 이 시설을 구경하는 내내 거의 박수홍의 러브하우스 수준으로 들떠있어서 독자인 나도 자꾸 두근두근 하게 된다 이게 이렇게 두근댈 일인가

2021-01-15 시신과 몇 년간 같이 살기도 한다는 토라자에 대해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였는데 두개골을 집에 모셔두고 숭배하면서 이게 신과 신도를 연결해주는 매개라서 집도 지켜주고 질문에 대답도 해준다고 믿는 냐티타 문화에서 약간 벙쪘다 선입견 갖고 보면 안되는데 너무 크툴루 소재 느낌

2021-01-15

죽음을 똑바로 마주하는 일은 심약한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시민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주하게 하는 것은 죽음을 다루는 모든 전문가, 즉 장례지도사, 묘지 관리인, 병원 근무자들의 책임으로 봐야 한다.

2021-01-15

유가족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슬픔 속에 가둬두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 이는 유가족이 슬퍼하는데 도움이 되고, 슬퍼하는 것은 치유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21-01-15

나는 안다. 내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마음이 편안할 거라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례란 내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그로 인한 나의 슬픔을 환한 대낮에 꺼내놓는 것이다. 이웃과 가족이 함께, 공동체가 곁에서 지지해주는 가운데 인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