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속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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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6 친구들이랑 함께한 제주도 여행에 이어 홀로 3박4일 속초 여행을 왔다 날씨 뉴스 보고 잔뜩 쫄았는데 제주도도 그랬고 속초도 그냥저냥 평온하다

점심은 곤드레 추어탕에 돌솥밥.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추어탕 못지않게 구수해서 흥겹게 잘 들었다 (?)

구름이 드라마틱하긴 했다. 바람도 꽤 세서 내가 비를 피하려고 우산을 든 건지 비바람이라는 보스에 맞설 유일한 도구로 우산 필살기를 쓰는 중인지 좀 헷갈렸을 정도.. 그치만 신발이 젖는다거나 도저히 숙소 밖으로 못 나갈 그런 날씨는 아니었다.

이번 여행의 첫 책 개시. ‘명예, 부, 권력에 대한 사색’ 괄호나 주석으로 재밌게 잘 비꼬는 작가는 언제나 취향이다. 책 제목에 어려운 단어가 많이 들어가서 조금은 겁먹고 있었는데 되게 쉽게 쓰인 책이라 안도했다. 그래도 논픽션이라 속도는 잘 안 남..

하지만 설명조차 어떤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사람들이 언어에 대해 최소한도의 신뢰와 선의를 갖고 있어야 하고, 또 그들이 어떤 전통적인 것들(보르헤스의 용어로),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와 담론이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응결된 ‘규범’(그 경로이기도 한)을 공통적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있엉댜 계속 설명을 해나갈 수 있다. 내 관찰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끊임없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서 (…)

그는 프로이트의 비현실적인 이론을 파괴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많은(한 가지, 한 종류에 국한되지 않은) 상처들은 그의 소설 창작의 바닥나지 않는 견실한 재료일 뿐이었으며 그것을 활용해 그는 남을 이해하고 동정했다.

문우당서림. 동네에 오래된 서점이 있다- 정도로만 알고 책 구경이나 해야지 하고 왔는데 너무나 인생 서점이었다. 여기 알바로서의 삶에 욕심이 생길 정도로 멋진 공간이었다. 이런 서점이 있다니 속초 정말 좋은 도시잖아…….

중앙시장에서 포장해 온 오징어순대와 감자전은 그저 그랬다. 아니 이거 먹을라고 그렇게들 줄을 섰단 말야? 내일부턴 그냥 아무거나 먹어야지. 숙소에 돌아와선 신유진 작가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에세이만큼 치명적인 취향저격은 아닌 거 같은데? 싶으면서도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깝다.

2020-08-07 이튿날. 환경보호를 위한 게스트하우스의 지침인지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여름다운 습도를 간만에 참 진득-하게 느껴봤다. 대도시와 쾌적한 근무환경의 우산 아래에서 계절감을 너무 잊고 산 건 아닐까.. 의외로 후텁지근한 수면은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밥 먹었다.

물회는 매우 맛있었다. 내 시급이 이 물회 가격보다 높다니 자본주의는 정말 기묘한 시스템이다… 부와 명예에 대한 책을 읽는 중이라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날씨는 오늘도 좋았다. 무조건반사로 사진을 찍는데, 어차피 이 사진 다시 본다고 바다가 주는 감각이 살아날 것도 아니라 도로 지울듯.

물회집 오는 길에 예뻐보였던 카페에 갔다. 말차라떼 맛은 그냥 그랬다. 루프탑에서의 바다 뷰가 좋았다. 책은 여행 기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내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갈릴듯.

동아서점 들러서 책 두 권 사고 (속초엔 왜 이렇게 좋은 서점이 많은가. 속초 대체 뭐하는 곳인가…) 중앙시장에서 아바이순대국 먹었다. 어제 오징어순대는 별로였는데 순대국은 꽤나 눈이 뜨이는 맛이었다. 날씨는 하루종일 쾌청했다.

비는 커녕 노을이 꽤 예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바로 옆엔 고층 아파트 건설이 진행 중이고 건설 반대 현수막이 걸려있다. 현지인도 관광객도 원하지 않는다면 이건 누구의 수요로 이뤄지는 공사인걸까. ‘이 뷰에 아파트가 없는 게 말이 돼?’ 하는 부 그 자체의 판단인가.

소호라떼라는 메뉴를 마셨다. 마+우유+꿀의 조합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그리고 건강했다) 딱히 커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음료는 좀 다양하게 팔아주면 좋겠다. 왜 음료가 꼭 달거나 카페인이 있어야 하냐구요.

  • 낮책 한권 밤책 한권 들고 왔는데 둘다 반정도 읽었다. 순조롭넹.

첫번째 단편에서 테러를 배경으로 쓰실 땐 오우야 그래도 프랑스에서 거주하시던 분이라 이런 일을 가깝게 느끼시는구나 싶었는데, 세번째 단편에서 기억상실과 불치병까지 등장해 버리니까 K-스타일 신파가 자꾸 떠오르잖아요. 살짝 설정과다가 아닌가 싶고. 역시 전 작가님 에세이가 더 취향.

2020-08-08 셋째날. 느지막하게 일어나 칠성조선소 (를 수리해 카페로 만든 공간)에 왔다. 속초에서 가장 힙한 카페라는데, 이젠 힙이란 단어의 의미가 ‘사람이 북적북적한’으로 변모한 게 아닌가 싶다. 멋있기로는 문우당서림이 만 배쯤 멋있었는데.. 다행히 비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표면상 인간의 사유와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평균주의의 본질은 지혜로 만들어진 세계와는 안 어울린다. 특히 대중사회가 매스 미디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은 뒤에는 더더욱, 지혜에 필요한 끈질김, 사색, 경청의 공간은 보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며칠 전부터 생선구이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일인분은 안 판다는 빠꾸를 몇 번 먹고 시무룩해하던 찰나, 사장님이 여기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저 혼잔데요..’ 쭈뼛쭈뼛 하니까 ‘한 명이 열 명 되고 그러는 거죠.’ 라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신피디통큰생선구이 사장님 충성충성.

상대주의는 당연히 문제가 크다. (…) 상대주의는 가장 근본적인 시비와 선악의 판별을 인간의 모든 가치, 신념, 도덕의식과 함께 일괄적으로 개인의 취향으로 격하시켰다. 인간이 어떤 것도 고수하지 않고 또 고수해서는 안 된다면, 그리고 판단과 선택을 포기한다면, 실제로 얻는 것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특수성과 다양성을 보유한 각각의 개체가 아니라 내용도 깊이도 저항력도 없는 원자화된 개인이다.

3박4일 여행에서 세번째 밤이 돼서야 비가 제대로 온다. 주룩주룩 빗소리 들으면서 잘려니까 기분 조으네.. 물론 따뜻한 실내에서 들어서 좋은 거겠지만

2020-08-09 오는 길엔 비가 제대로 왔다. 여행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