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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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8 오쓰카 에이지의 감정화하는 사회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고 오탈자 발견. ‘없게 것이다’가 뭐죠!

아직 30페이지 남짓밖에 읽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히고 시니컬한 유머도 종종 보인다. “오늘날의 일본인은 이와 같은 일본인상을 보면서 메이지 시절부터 이렇게 국민과 덴노의 마음이 하나였다고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제발 도덕 교과서 같은 곳에 사용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같은 ㅋㅋ

2020-03-09

라자라토는 이때 이러한 ‘무형의 가치’를 창출하는 ‘무형 노동’에 사람들을 ‘무상 노동자’로 참가시키기 위해 ‘주체성’이나 ‘자기 표출’이 동기 부여의 수사로 활용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즉 근대적 개인의 욕구 그 자체가 이런 순환적 생태계에 무상 노동으로 참가하는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2차창작, 유저의 의견 등으로 불리는 모든 행위는 그 외형이 블루/화이트칼라의 시간제 노동과 달라서 그렇지 엄연히 노동이다. 그리고 인터넷 플랫폼은 우리가 이 노동을 자의로(자기 표출을 목적으로), 무상으로(어떨땐 돈을 지불하면서) 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플랫폼의 존속에 필수이기 때문.

트위터에 쓴 글, 웹툰에 단 댓글, 블로그에 남긴 리뷰, 이 모든 게 그 내용의 수준을 떠나 ‘컨텐츠’다. 여기서 모인 빅데이터로 누군가가 이득을 보며 플랫폼에선 수익이 발생하지만 유저는 단지 자아 표현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이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하다.

웹툰에 꼭 댓글 시스템이 있어야 될까, 왜 아무도 시험 삼아 저거 폐쇄해보자는 말은 하지 않을까를 아주 나이브하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책 읽으면서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다 ㅎ..

우리는 ‘감정’을 순식간에 표출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이렇게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감정 표출’이라는 형태로 ‘노동’하도록 항상 요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사람들은 온갖 형태로 자신의 ‘삶’을 플랫폼에 무상 컨텐츠로 제공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2020-03-11

인간은 다른 인간을 낮잡아 볼 수 있기만 하면 계급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된다.

스쿨 카스트 문학론이 뭘까 했는데 소위 학원일진물 이야기구나. 이야 너무 재밌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제 ‘승자’에게 감싸 안기고, 인정받고, 눈물 흘리는 것으로 ‘패자의 목소리’가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승자의 품에 안기고, 눈물 흘리고, 거기에 ‘마음’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이 나라 전후 문학의 한 영역이었던 ‘패자의 문학’은 확실히 죽어 버린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서 아주 많이 본 거네. 약자가 목소리를 내는 형태마저 강자의 입맛에 맞추려는 행위. 강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 자신을 장애인으로 밝힌 사람에게 ‘힘내세요! ^^’로 응답하는 것. 개개인의 삶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동정할 타겟으로 대상화하는 것.

2020-03-14 감정화하는 사회 4장 - 라인은 문학을 바꾸었는가. 가면 갈수록 내 지식이 모자라서 아쉽다. 저자가 쓴 다른 책이 언급되고 훅 넘어가는 게 많아서 문장이 이해가 안되고 (캐릭터 소설이 사소설이랑 어떻게 동일한거지!) 사소설도 얘기만 많이 들었지 지식이 얕아서 잘 모르겠다 흐엉

사소설, 와타시가타리가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데 되게 중요한 키워드일 거 같은데 인터넷 설명만 봐선 잘 모르겠다. 다른 책도 읽어봐야 할 거 같고.. 후반부에 AI 얘기가 생각보다 재밌다. “AI가 일본에서는 부녀자가 되고 북미에서는 혐오 발언을 한다” 같은 일축 시원하고 좋네

즉 언문일치체에서 ‘나’란 남성을 향하는 가상의 ‘나’였으며,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진 ‘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남성이 쓴 문학 >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여성 캐릭터 > 이 문학의 내용과 어투에 실제 여성들이 영향을 받음인건 알겠는데, 왜 그 여성 캐릭터 묘사가 현실과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감정만 남기는 형태가 된건지 아리송하네. 언문일치체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어렵다..

일본 서브컬처의 여동생 캐릭터 집착이 생각보다 역사가 깊구나. 저기 언급된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역서는 커녕 한국어로 된 정보가 별로 없넹..

2020-03-28

지역이나 성별, 출신과 무관하게 누구나 쉽게 언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동시에 말하는 언어와 쓰는 언어를 한없이 접근시키려는 운동이 ‘언문일치 운동’이라면, 빈정거리는 말이 아니라 이 운동이 ‘트위터와 라인으로 부흥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컨텐츠의 집합을 구전 문학의 연장선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재밌다. 작자 미상으로 농담 따먹기 할 때나 썼지 구전 문학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사소설과 언문일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에 한계가 있는게 갈수록 아쉽다 ㅠ

형식 자체가 발휘하는 힘 때문인지 아니면 복잡한 역사적 현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형식에는 충분한 매력이 있고 따라서 존재 이유가 있다. 앞으로도 남겨 두고 어울리는 역할을 맡기면 좋겠다. 다만 문제는 우리의 평상시 소통 내용, 즉 있는 그대로를 써야 할 연설이나 편지나 신문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형식을 가미한 것이 훌륭하다고 느껴도 괜찮을지 여부다.

맥락은 다르지만 N번방 박사놈이 악마의 삶 어쩌구 헛소리 했던 게 생각나네. 하드보일드도 영웅서사도 충분한 매력이 있는 구조지만, 이런 형식을 가미한 게 다 훌륭한 건 아니지. 가해자를 서사화하는 포장지로 쓰이는 건 말도 안 되고.

‘형식의 미학이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야나기타의 견해를 인용했는데 그건 문학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입장일 때만 가능한 거 아닌가? 구전 문학의 참가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입장에선 이 ‘형식’이 주는 미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참가자들이 그때그때 즉석으로 만들어낸 결과가 최종적으로 ‘형식’이 되는 거라면 우리는 (지분은 작을지언정) 형식의 창작자가 되는 건데..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