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이 덜컹거리자 그는 꿈에서 깬다. 내려야 할 역은 아직이다. 전날 밤 일이 늦게 끝난 데다 주말치곤 일찍 일어났다. 바깥의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고개가 꾸벅꾸벅 기운다. 잠깐 열어본 휴대폰에는 알림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장마전선 북상의 영향으로 전국에 비가 내릴 전망입니다. 비가 오고 습한 날씨에는 감전 사고가 발생하기 쉬우니⋯.’ 오늘 아침 기상 캐스터가 전한 뉴스를 누군가가 단체방에 옮기며 웃는다. 그러게 누가 7월에 결혼을 해. 웬 고생이야.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두둔한다. 다 사정이 있었겠지. 식장 예약하기가 쉬운 줄 아냐. 오늘만큼은 선배 노릇을 할 수 있는 몇몇이 알만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대화를 이었고 달재는 비 오는 날 결혼식을 올리면 행운이 깃든다는 얘기가 『어바웃 타임』에만 나오는 거였는지 실제로 있는 미신인지 잠시 고민했다. 날씨 때문에 애들 더 긴장했겠다. 더운 거보다는 시원한 게 낫지 뭐. 평소에도 종종 하던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눈을 감는다. 친구들이 저마다 농담을 던지고 누군가는 벌써 뷔페 후기와 근처 카페를 물색할 때 그를 놓아주지 않는 생각은 다른 것이다. 어제 회사에서 저지른 사소한 실수, 입고 있는 옷의 불편함, 오늘의 운세와 행운의 컬러 같은 것.

그냥 무난한 거 할 걸 그랬나. 선택은 늘 어렵다. 마지막까지 고민할 줄 알았다면 진작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후배들 결혼식에 뭘 그렇게까지 신경 써. 하지만 왼쪽. 명확하게 말해주는 친구들이 많았을 테니까. 하나는 진회색 정장 셋업에 흰 셔츠와 짙은 군청색 넥타이, 깔끔하고 예의 차린 느낌인데 너무 깔끔한 나머지 이 복장 그대로 출근해도 될 거 같고 하나는 연회색 재킷에 분홍색 셔츠, 산뜻하긴 한데 아까 것에 비하면 꽤 화려해서 눈에 띌까 봐 걱정이다. 단체 사진 찍을 땐 재킷 입고 찍어야 할까. 좀 그런가? 친구들이라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 그 정도는 그냥 입어도 돼. 화이트 수트를 입은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하지만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정은 결국 스스로 해야 하고, 그는 고심 끝에 지금 것을 골랐다. 나서는 길에 사진도 몇 장 남겨두었다.

20명 가까이 되는 동기들 단체방이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울리는데 알림을 아예 꺼둘 수 없는 건 예식장도 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비도 오는데 모여서 택시 타고 가자. 도착하면 은행 앞에서 봐. 이달재는 거기까지 확인하고 전철 밖을 내다본다. 열차는 호기롭게 강을 가로지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에 강물은 그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문에 반사되어 비치는 제 표정은 나쁘지 않다. 그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노란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찰박이던 어린 시절부터 여전히 비 내리는 창밖 구경을 즐겨하는 지금까지. 그는 비와 우울을 결부시켜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이따금 바깥을 밝히는 번개와 한 박자 늦게 울리는 천둥도, 그에겐 그저 풀리지 않는 작은 신비일 뿐이다.

-

그는 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농구를 관뒀다. 대학교에 가서는 공 대신 기타를 잡았다. 정기 공연에도 빠지지 않고 올랐고, 후배들끼리 공연할 때는 종종 퍼커션을 쳐 주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아예 파트장까지 맡았다. 졸업 이후 뿔뿔이 흩어진 북산고와 달리 대학교 친구들은 대체로 비슷한 곳에 취직해 멀지 않은 동네에 살았고,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탓에 농구공을 붙잡고 지냈던 학창 시절은 마치 전생처럼 느껴졌다.

기타 동아리에 들겠다고 하자 잘 어울린다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말은 고등학교, 더 이르게는 중학교 때부터 들었던 것이기에 이달재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마저도 단박에 수긍하고 납득한 듯한 미소를 보였을 때는 차마 티 없이 웃을 수 없었다. 농구가 어울린다는 말은 좀처럼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직업으로서의 농구는 고려하지 않았고 제 것 역시 평생 가는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그 미지근한 온도에 제가 화상을 입었다. 더 강렬하게 좋아했다면. 그래서 더 깊게 불태울 수 있었다면 달랐을까. 쟤는 농구하다가 애가 이상해졌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덜 아쉬웠을까. 하지만 이달재는 이상해지지 않았다. 그는 졸업해야 할 순간을 알았고, 모두가 제게 어울린다고 했던 통기타를 시작해 새로운 시간을 나아갔다. 한 기수 아래 후배들이 오랜 기간 CC로 만나다 기어이 결혼한단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축하했고, 미국에서의 긴 도전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온 태섭이 혀 꼬인 채 술을 들이켤 땐 함께 잔을 기울이며 진심으로 위로했다. 

빗물에 눅눅하게 젖었던 바짓단이 전철의 에어컨에 겨우 말라갈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수락 버튼을 누르면 건너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달재야! 어디야. 오는 중이지? 그는 담담히 대답한다. 응. 가고 있어. 전철 안이야. 곧 내려. 그리고 한 번 더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본다. 역시 어색하다. 오늘은 동행 없이 혼자라 이 어색함을 같이 견뎌줄 사람도 없다. 하지만 옷이 튄다는 사실보다 그걸 다름 아닌 제가 입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좀 더 어색하고 민망해, 그는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길을 나섰다.

-

장우산을 꼭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 멀리서 여럿이 손을 흔드는 게 보인다. 평소라면 은행 간판 정도는 금방 찾았을 텐데 비 때문인지 정신이 없었다. 오 달재 왔네! 너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오느라 고생했어. 동기들의 인사가 귓가에 스치고.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수호는? 우산 아래서 불쑥 등장한 손이 제 등을 때리자 그는 빠르게 사과한다. 미안. 요즘 좀 바빴어. 수호는 오늘 일 있어서 못 온대. 유진이 넌 아직도 손이 맵네. 물론 바빴다는 게 아주 거짓은 아니다. 그와 한집에 사는 친구가 오늘 개인 사정으로 못 온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고. 그러나 둘러대는 줄 알면서도 그녀가 표정에 내보인 걱정 역시 거짓이 아니어서 그는 아니, 정말 그저 바빴을 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라고 다시 덧붙인다.

달재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작은, 이달재가 퍼커션 파트장을 맡을 때 회장을 맡았던 유진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구나 저마다의 환상을 안고 들어왔을 대학교. 그 환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통기타 동아리에서 이달재는 여학생들의 한 줄기 풀뿌리 같은 희망이었다. 현실은 만화와 달라서 잘생긴 남자는 캠퍼스 전역을 뒤져도 찾기가 어려운데 동아리 신입생에게 개수작 부리는 남자 선배는 지치지도 않고 등장했기 때문에, 신입생 환영회 술자리에서 다시 생각해도 개새끼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어느 고학번 선배에게 일갈을 했던 남자 동기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모욕적인 일에 그건 모욕적이라고 말해주는 사람. 여차하면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서도, 저 혼자 정의감에 휩싸여서도 아니라 단지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진은 깊은 위안을 느꼈다. 그녀는 이달재가 제 남자친구이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생활 반경이 멀어지면 그대로 멀어지는 사이인 건 좀 섭섭했다. 일이 바빴다는 말은 그 이상을 설명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만나는 사람이라도 생겼나. 어느 쪽? 유진은 촉이 좋았다. 대학 생활 4년간 그럭저럭 친하게 지낸 동기로서, 한때는 동아리 회장과 파트장으로서 어울리며 지켜봤던바 그녀는 이 동아리의 수면 아래를 흘렀던 비밀 몇 가지를 제가 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달재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지난 지금까지 제게 아무 말이 없는 것이 내심 서운했고, 동시에 그가 숨기고자 한다면 계속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애초에 그가 말을 꺼내지 않는데 제가 먼저 묻기엔 애매한 주제이기도 했다.

그녀는 붙잡고 있던 어깨를 이만 놓아주었다. 옆에서는 감탄사가 나왔다. 와. 지금 빗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 말 하나도 안 들리는데 유진이 네 말만 잘 들린다. 역시 회장님.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나 아주 폭우를 뚫는 데시벨이⋯. 달재는 그 말에 도로 왁 하고 성을 내는 유진을 웃으며 말리고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하나둘셋넷다섯. 그를 포함해 남은 사람은 여섯이니 셋씩 찢어지면 딱 맞다. 택시 한 대가 도착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유진과 그 일행을 먼저 태워 보낸다. 조수석에 탄 유진은 제 비닐우산을 접더니 눈을 부라리며 묻는다. 너는 오늘 다른 일정 없지? 뒤풀이도 갈 거지? 그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음, 아마? 잘 모르겠어. 근데 옷 잘 어울린다. 예쁘네. 유진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씩 웃는다. 컬이 잘 말린 단발머리가 크림색 블라우스의 프릴과 함께 찰랑였다. 오늘을 위해 장만했지. 이따 봐. 휴대폰 알림이 시차를 두고 울린 건 차가 출발하고도 좀 더 나중이다. ‘너도 오늘 잘 어울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곰돌이가 조금 전의 그녀처럼 씩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달재는 괜히 제 넥타이를 매만진다. 양복을 입기에 7월은 습하고 덥다. 그러나 우산 위로 쏟아지는 소음은 자질구레한 잡념을 모두 묻어버리고, 애매하게 친한 동기들 사이에 끼어 그는 비로소 안도한다. 아주 친하지 않기 때문에 화제는 한두 가지로 수렴한다. 오늘 날씨. 결혼할 후배들 이야기.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학 시절 되새김질과 사회생활에 찌든 한숨. 그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대화도 충분히 즐겁다고 생각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유진만큼은 아니어도 반가웠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후배 결혼식에 가자고 했는데 돌려받지도 못할 축의금 내기도 싫고 결혼식 행진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는 말까지 굳이 나와야 했는지는.

-

수호가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동아리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나 가을학기에 입학하는 사람 처음 봐. 그럼 외국인인 건가? 새내기들의 순진한 궁금증이 하나, 그리고 선배들의 노파심이 나머지 하나였다. 악기 해 본 적 있다길래 뽑긴 했는데 쟤 진짜 우리 동아리 들어오려고 한 거 맞지? 맞은편 건물 밴드 동아리랑 헷갈린 거 아니지? 짧게 묶은 꽁지머리, 부스스하게 튀어나온 잔머리와 피어싱, 오래 입은 티가 나는 청재킷과 등에 멘 기타. 신발장에 서서 좁은 동아리방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동기들을 바라보던 수호는, 확실히 통기타 동아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달재는 수호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만났던 것만 같았다. 나중에 자기소개를 했을 때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외쳐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한 것이 그와 수호의 첫 만남이었다. 내 친구 중에도 미국에 있는 애 있는데. 그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그는 근래 제가 추고 있는 엇박자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 시기의 이달재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속 세계는 이상하게 뒤섞여 있어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교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거나 서로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농구를 했다. 그리고 종종 태섭과 손을 잡았다. 그것도 깍지를 껴서. 깨고 나면 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농구하면서 하이파이브는 수도 없이 쳤지만 별달리 의식한 적은 없었고, 같은 포지션에 같은 단신 선수로서 그를 동경은 했지만 다른 관계를 상상해 본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태섭은 마치 손바닥과 손바닥의 거친 면이, 온기와 살갗이 전부 닿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를 붙잡고 있고 이다음을 상상하는 마음은 부정할 수 없이 선명해 정작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그랬나? 아니, 아닌 거 같은데⋯. 

그는 제가 이제 와서 미련을 갖는 게 둘도 없는 소꿉친구인지 불발탄으로 남을 첫사랑인지 같은 추억을 공유한 집단인지, 어쩌면 지나 보낸 삶 전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농구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북산고 사람들과는 종종 만났다.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을 시기였고 고작해야 작년 또는 재작년에 불과한 추억은 아직 날것처럼 생생해 했던 이야기를 또 해도 질릴 틈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늘 태섭의 근황으로 돌아왔다. 치수 선배와 준호 선배는 내심 그의 진일보를 뿌듯해했고 대만 선배는 뿌듯해하다가 술에 좀 취하면 시키지도 않은 자기반성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이달재는, 코트 위에서의 추억을 그들만큼 즐거이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초라했다.

모두가 어렸다. 어려서 그토록 뜨거울 수 있었고, 진심이었고, 어렸기 때문에 본인들이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는 일부러 말을 피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짚지 못했다. 예를 들면 오일이와 병욱이. 왜 그 애들은 소식이 점점 뜸해지더니 이 자리에 나오지 않는지. 더 이상 농구로 구성되지 않는 일상과 더 이상 하나로 묶이지 않는 우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이달재는 그럴 때마다 송태섭을 떠올렸다. 이 자리에 태섭이 있었다면 이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단편적인 아쉬움부터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꿈의 부끄러움에 대해선 영원히 말할 수 없으리라는 쓸쓸함, 애초에 농구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가본 적 없는 미국의 땅을 상상할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비겁해졌다고. 핑계 대지 않고 지금도 뛰고 있을 친구와 다르게 저는 결국 어디에도 마지막까지 힘을 쏟지는 않는다고. 그건 여태 해 왔던 농구도, 지금 치는 기타도, 하물며 사람을 향한 마음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같은 반 여자애를 짝사랑하는 마음과 태섭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마음은 달랐고, 그는 그 마음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후퇴했다. 누구도 그에게 송태섭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제가 게이인지 바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농구를 공통 분모로 갖지 않는 사이에 이번엔 다른 이름으로 우리가 되어 보자고 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태섭과 함께 코트에 섰던 자신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야 했다. 그건 무엇보다 이달재 본인이 바랐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그날엔 한순간에 들키고 만 것이다. 단지 오늘 처음 만난 친구가 개성이 강해 보이고 미국에서 왔고 피어싱을 하고 있어 그게 태섭을 떠올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

택시 차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경로는 언제 봐도 지켜보는 재미가 있고 남의 결혼식은 언제 와도 약간의 지루함이 남는다. 축의금 봉투와 식사 쿠폰을 교환하고, 인사를 건네고, 수호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답을 하고, 사진까지 찍고 나자 그는 벌써 지쳐 본식을 앉아서 보자는 걸 거절하고 구석에 엉거주춤 섰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가뜩이나 정신없어 뵈는 신랑·신부를 더 붙들 이유도 없거니와 굳이 저 원형 테이블에 앉아 다시 수다를 시작할 힘도 없었다. 수호랑 같이 왔으면 좀 나았을 텐데. 홀 안팎을 드나드는 얼굴 중엔 오랜만에 보는 이들도 많다. 식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후배들은 물론 안면만 있는 선배들, 같은 과 친구의 전 여자친구같이 서로 누군지는 알되 아는 척하긴 애매한 사이도 있고. 그러니 그 사이에서 이한나와 눈이 마주친 건 그에게도 한나에게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야 같은 대학에 다녔으니 인맥이 겹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한나? 요즘 잡지사에서 일해. 기사를 쓴다던데.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당연히 태섭이었고, 달재는 문득 이한나 역시 친구의 전 여자친구 카테고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녀와 눈인사까지 나누고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달재와 이한나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의 농구부로 삼 년을 부대꼈는데도 이한나와 둘만 남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태섭에 대해, 아무튼 농구부와 앞으로의 미래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는 주제로 대화를 했는데, 다른 주제도 만들어 둘 걸 그랬다는 후회는 같은 대학교에 진학한 한나가 그의 공연에 관객으로 왔을 때 처음으로 했다. 잘하던데. 좀 멋있더라. 게시판에 붙은 전단을 보고 우연히 왔다던 그녀는 간단하고 꾸밈없는 소회를 남겼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었다. 간만에 듣는 칭찬인 건 둘째치고 농구가 아닌 다른 일에 매진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그도 이한나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인지도 몰랐다. 너무 가까웠던 사이가 아니라서. 그녀는 이후에도 공연을 종종 보러왔다. 와 줘서 고마워. 오늘 애들 실수 많이 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웃으면 한나는 아냐 잘 들었어. 세 번째 순서에 여자애들 단체로 했던 노래 좋더라. 덕분에 기분 전환 잘 했어. 그렇게 말하며 돌아갔다. 이달재는 어쩌면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 위해 왔는지도 모른다고 매번 생각했다. 다 털지 못한 마음이나 볼품없는 동질감, 아니면 제 남자친구에 대해. 그 당시 송태섭과 이한나의 연애를 아는 건 극소수의 몇몇뿐이었다. 달재는 그녀가 북산고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그 연애 때문이라고 짐작했지만 굳이 술이라도 한잔하겠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럴 만큼 친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제가 그녀를 위로해 주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실은 나도 태섭이가 보고 싶다고 거기서 잔을 비우며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다 이십 대 초반의 일이다. 서른의 이한나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반갑다는 듯 환한 미소로 말을 건넨다.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의 만남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 역시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태섭이 귀국하고 나면 당연히 두 사람의 결혼식에 가게 될 줄 알았건만, 어쩌면 제가 그 결혼식에서 사회를 볼지도 모른다고 머릿속으로 예행연습도 하곤 했는데 현실은 남의 결혼식에서 하객으로 만난다니. 그는 태섭이 제게마저 이한나와의 이별을 곧장 말하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사실은 헤어진 지 좀 됐다고 고백한 것을 기억한다. 아니, 왜? 어쩌다가?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 전에도⋯. 그 뒤에 따라붙는 말을 이달재는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농구를 떠나보내던 시기의 제 마음이 한 문장으로는 갈무리되지 않듯 이한나와 함께한 송태섭의 역사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포함하면 거의 십 년인데. 달재가 그렇게 말했을 때 태섭은 사실 십 년이 좀 더 된다고 덧붙였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진 않았다.

이한나는 실은 오늘 신부 측 친구로 왔는데 부케를 받는 게 하마터면 제가 될 뻔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이달재는 실은 오늘 축가를 부르는 게 하마터면 저와 제 동기들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후배들이 하기로 했지만. 그나저나 옷 예쁘다. 잘 어울려. 그는 한나가 입고 온 카키색 원피스를 보며 말한다. 고마워. 비 오는 날에 구두 신는다고 고생했지 뭐. 날씨가 정말. 그녀는 싱겁게 말한다. 

여기 갈비탕이 맛있다는데 난 약속 있어서 밥은 못 먹고 가.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갈비탕 얘기는 오는 사람마다 다 하더라. 그는 짧게 웃는다. 너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고? 나야 뭐. 여전하지. 한나 네가 잡지사에서 일한댔나? 일은 어때?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마지막 말을 하지 못했다. 나 사실 네가 쓰는 글 보고 있어. 이번 ‘롱런하는 여자들’ 특집 재밌더라. 우리 그 잡지 구독하거든. 내 친구가 좋아해. 위트가 좋다고. 나도 몰랐던 네 칼럼에서 문장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준 적도 있어. 분명 기쁘게 들어주었을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한 건 친구라는 호칭이 과연 수호를 가리키기에 적절한가, 다른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야 할 자리에서 우리끼리 비혼이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얘기로 열을 올리는 게 바람직한가보다는 제 자신감의 문제였고, 이달재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수호와 그는 매년 이맘때 꼭 한 번씩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졸업하고 같이 산 지는 이 년이 넘었다. 학교 다닐 때 룸메이트 생활을 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삼 년이 조금 안 된다. 동거를 제안한 건 순전히 생활 방식이 잘 맞고 불편함이 없어서였다. 빨래는 종류별 색깔별로 구분해서 빨아야 하고 먹은 음식은 제때제때 치워야 하는 그를 유난스럽게 보지 않는 수호가 좋았다. 이달재는 아침 일찍 조깅을 했다. 직장인이 되고서는 오전에 시간을 내기 어려워 퇴근하고 검도를 배우러 다녔고 일이 바쁘면 종종 야근도 했는데 수호는 그가 몇 시에 들어와서 불을 켜고 부스럭거리든 잘만 잤다. 한편 수호가 틀어두는 시끄러운 음악을 이달재는 크게 거슬려하지 않았다. 생판 처음 듣는 노래가 종일 흘러나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을 즐겼다. 어떤 밴드의 곡인지 궁금해지면 한번 물어봤고, 침대에 누워 발을 까딱거리다 나쁘지 않으면 웃었다. 나중엔 설거지를 하며 기억 속의 멜로디를 아무렇게나 흥얼거렸다. 그리고 가끔은 매트리스 위에서 키스를 했다. 가끔은 더한 것도.

하지만 두 사람은 이 관계의 이름표에 대해 좀처럼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달재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수호는 그 말고도 만나는 사람이 몇 더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랬고 그게 본인과 잘 맞아 보였다. 둘은 한 번도 그 문제로 다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넌 왜 네 친구한테 나를 애인으로 소개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애인까지는 부담스러워서 그렇다 쳐. 근데 우리가 아주 친구 사이로 같이 사는 건 아니잖아. 그렇잖아? 우리 스킨십도 하고. 심지어 네가 먼저 했으면서. 수호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진심으로 의아하긴 이달재도 마찬가지였다. 친구 사이로 사는 거⋯지 않나? 그런 거 한다고 꼭 연애는 아니잖아. 그게 첫 다툼의 시발점이었다. 

우리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가 있었던가? 뭐⋯ 굳이 만들려고 하진 않았지. 하지만 그냥 친구이지만도 않았잖아. 그냥 친구는 한 침대에서 안 자. 서로 안는 짓도 안 해. 아니⋯. 내가 되게 비겁한 사람처럼 들리는데. 내 말은, 애인은 좀 다르지 않아? 난 네가 밖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이 네 애인이고 난 아니라고 생각했지. 애인을 여럿 두는 게 가능하다면 친구와 안는 것도 가능하잖아. 그건 또 따로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난 우리도 애인이었으면 좋겠어. 정확히는 우리가 중심이었으면 해. 다른 사람들한테 내 파트너라고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너인 거 같고. 근데 넌 요만큼도 그런 생각 안 하는 거 같더라. 그래서 약간⋯ 이상했는데. 여하튼 혼자 앓는 것보단 속 시원하게 물어보는 게 낫다 싶었어. 달재야. 넌 우리가 사귀는 게 싫어?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꼭 그래야 하나? 사귄다 아니다, 예스와 노 사이에서 답을 내려야 하나? 우리가 사귄다니. 그는 자신을 뚜렷하게 게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확신할 만큼 제가 남자에 미쳐 있는 거 같진 않았고, 또 바이라고 주장할 만큼 양쪽을 공평하게 좋아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애정이란 마음이 아니라 행위의 한 갈래였다. 그가 농구를 그만둔 게 농구를 싫어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인 것처럼. 그와 수호의 동거도 가끔 서로를 만지작대는 것도 전부, 제가 선택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만일 마음을 증명해야 한다면. 그의 인생에서 나는 틀림없이 이걸 좋아했다고 단언할 만한 애정은 오로지 한곳의 풍경에 박혀 있다. 지지 않는 태양, 체육 시간에 같이 돌던 운동장, 잘 닦인 농구공과 매끈한 코트, 지금에 비하면 무한에 가까웠던 체력과 아릿한 행복이 때로 고등학생 송태섭의 얼굴을 하고 이달재를 돌아본다. 어쩌면 제가 품는 애정이란 전부 그 시절의 레플리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버틸 힘이 필요할 때마다 창고에서 야금야금 꺼내쓰는지도. 사람들은 그걸 청춘이라고 부르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는 타인에게 유일무이한 약속을 할 수 있을 만큼 제 마음이 무한히 흐르는 거 같진 않았다. 오히려 어제까지는 모든 게 선명하고 즐거웠는데 네 위치를 정확히 하라는 요구를 받은 지금은 돌연 불행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달재는 침묵했다. 수호도 그 이상 묻지는 않았고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된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 해 여름 퀴어 퍼레이드를 앞두고 둘은 다시 싸웠다. 이달재는 그해 행사에 가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잠을 잤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사랑이 이긴다고, 오늘은 우리의 날이라고 외칠 때 그는 사랑이 이긴다고 쉽사리 믿지 않았고 그곳의 ‘우리’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 자신도 없었다. 

슬프게도 그날 축제는 폭염이었다.

-

비 오는 날의 갈비탕은 제법 맛있었다. 결혼식장 음식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 않느냐는 말이 쏙 들어갈 만큼. 옆 테이블에서 이곳은 예약할 때 출장 뷔페를 부를지 일괄 갈비탕으로 통일할지 골라야 하는데 뷔페보다 갈비탕이 훨씬 낫다는 말이 들렸다. 과연. 이달재는 조용히 쉬지 않고 먹었다. 단체 사진 촬영에 시간이 오래 걸려 식당에 늦게 오기도 했고, 저 멀리서 한 바퀴 인사를 돌고 있는 신랑·신부가 이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에 허기는 채워두고 싶었다. 결혼식의 흐름에 익숙한 제 또래는 모두 상태가 비슷해 보였다.

후배들은 아직 기력이 넘쳤다. 나이 한두 살 차이가 이 정도로 컸던가. 달재는 슥 뒤를 돌아보다가 테이블에 벌써부터 소주병이 올라간 걸 보고 앉아있는 후배들의 얼굴을 살폈다. 폐가 될 정도로 불콰하게 취하진 않았지만 어째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보다 축가를 마친 저들 기분을 더 내고 있었다. 하긴 긴장했겠지. 얼마 만에 하는 공연이었을까. 원래대로 제가 축가를 불렀다면 그도 진작에 잔 하나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달재는 문득 결혼식 중간에 먼저 자리를 떴던 한나를 떠올리고 휴대폰을 열었다가, 열어서 뭘 하고자 했는지 명확한 용건을 만들지 못하고 도로 닫았다.

숨도 안 쉬고 먹은 거 같아. 유진이 허망하게 중얼거릴 때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 나선다고 아침은 못 먹었지, 비 온다고 고생은 했지, 그 와중에 점심도 늦게 먹었지⋯. 옆에 부모님 서 계시지만 않았어도 한 소리 했을 듯. 이 자식들이 사람을 굶기고!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앓는 소리를 한다. 어유 나는, 밥도 밥인데 커피 땡겨 죽겠다. 카페 좀 가자. 근처에 괜찮은데 아는 사람? 이때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건 평소에도 원두가 어떻고 산미가 어떻고 하며 일가견을 뽐내던 이들이다. 나 아는 데 있어. 자리 있는지 전화해 볼게. 그 모든 대화가 오갈 때 유진은 먼저 가지 말라는 신호로 달재의 셔츠 뒷자락을 구김 가지 않게 붙들고 있고, 이달재는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대학 시절엔 그와 유진을 사귀는 사이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주 붙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녀와 달재는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고 툭툭 치는 스킨십 정도는 불편함 없이 했다. 하지만 이 년 아니라 이십 년을 살아도 수호와 그를 한 가정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나올 텐데, 유진과 그는 고작 동아리에서 사이좋게 지내다 주말에 영화 보고 술 좀 마신 걸로도 커플처럼 보인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정작 수호는 한 번도 그런 말이 없었다. 유진과 어떤 사이인지 묻는⋯.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수호의 눈에 그는 확고한 게이처럼 보일까. 수호가 밖에서 다른 애인을 종종 만나는 일과 그가 지금 유진을 만나는 건 얼마나 다른 행위일까?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폭포처럼 쏟아붓는 하늘을 모두가 멍하니 바라본다. 날씨 죽인다. 어쩐지 웃음이 날 정도로 시원한 공기 속에서 비닐에 넣어두었던 우산을 하나둘씩 꺼내 보면 조금도 마르지 않은 물줄기가 죽 떨어져 내린다. 우리 예전에 엠티 갔을 때도 이렇게 비 온 적 있지 않았나. 야외 레크리에이션 계획했던 거 다 취소하고. 어떤 미친놈이 방에서 기타 치면서 가사에 비 나오는 노래 메들리 부르고. 아 그거 진짜 웃겼는데. 글쎄, 엠티도 엠티지만 나는 비 하면 역시 공연 한 시간 전에 폭우 왔던 게. 유진이 그렇게 읊조리면 주위에 서 있던 동기들이 폭소한다. 우리 첫 공연? 그건 다시 생각해도 악몽에 나올 만해. 이달재도 거기엔 덩달아 같이 웃는다. 홀에 사람들 절반은 왔었나. 분위기 살리느라 힘들었지⋯.

그래도 우리 그때 제대로 친해져서 그건 좋아. 전에도 사이는 좋았지만 뭐랄까, 이만큼 편하진 않았는데. 이달재가 나지막한 감상을 뱉자 누군가가 너스레로 답한다. 아- 이달재는 그날 사람이 바뀌었어. 나 우리 파트장님 다시 봤잖아. 

-

한나가 보러 온 게 그날 공연이었다. 가을학기 정기 공연 한 시간 전에 쏟아진 유례없는 소나기. 네가 노래 부르는 거 꼭 보러 가겠다고 했던 상당수가 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주변을 돌아다니다 비를 피해 온 낯선 사람들이 텅텅 빈 자리를 채웠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박수 소리, 관객이 더 어색해하는 분위기와 조명을 아무리 써도 밝아지지 않는 장내가 모두를 짓눌렀다. 가을학기 정기 공연은 원래 그해 1학년들끼리 만든 무대를 처음으로 올리는 곳이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그거야말로 이후의 어떤 공연보다 긴장되는, 그리고 이후의 어떤 공연보다 사골처럼 오래오래 우려먹게 되는 첫 공연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긴 했었다.

그땐 송태섭과 이한나를 분리해 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객석은 농구 코트가 되었다. 지하 공연장은 곧 심판대였다. 넌 지금 어디에 있니. 농구든 사람이든 뚜렷하게 사랑했을 두 사람 앞에서 그는 열심히 노래했다. 그리고 뒤풀이 자리에서는 말없이 마셨다. 날이 날인지라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태섭이 미국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없는 사람에겐 뭐든 숨길 수 있다. 아무리 눈치가 빨라도 지구 반 바퀴를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자리에서 잠시 빠져나와 취기를 달래는데 담배를 피던 수호와 눈이 마주치면 그땐 아무것도 감출 수 없었다. 수치와 미련. 그는 가본 적 없는 땅을 떠올리게 한다. 제가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 뚝뚝 떨어져 내리는 동경과 그리움. 하물며 수호는 그날 저만큼 취하지 않았다. 가을학기에 들어온 그는 그날 무대에 오르지 않았으니까.

꿈은 장렬하게 꺾이는 게 아니라 싱겁게 녹아버리는 것이고, 그는 결국 자신이 바란 만큼 뜨거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떤 순간은 진실로 남는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밤. 추했을 게 분명한 주절거림, 구태여 묻지 않고 옆에 있어 주던 침묵과 그럼에도 그날 오갔을 무언가. 그 뒤로도 그는 수호가 담배를 피우러 가면 따라 나갔다. 달재 넌 담배 안 피우잖아. 음, 그냥 바람 쐬러. 시험 삼아 한 모금 얻어 피워본 적도 있었으니 아주 비흡연자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흡연자들과 멀찍이 떨어져 담배를 피던 게 따라 나오는 저 때문인지 처음부터 그의 습관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처럼 빠져나와 놓고 담배 대신 다른 걸 찾은 건 수호가 먼저였고, 그 이상을 시도한 건 달재가 먼저였다. 

여자애와 그랬다면 자신도 그걸 연애로 규정했을까. 하지만 그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간 많은 커플들이 서로를 어떻게 좋아하는지 쭉 보아왔다. 그걸 기준 삼자면 제 마음은, 이제 와서 수호가 저를 애인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마음에 답하기엔 한없이 미지근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다. 수호도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룸메이트의 이름만으로는 충분치 않을까. 우리가 뭘 하고 사는지 남들에게 떠벌릴 것도 아닌데 같이 사는 친한 친구로는 어떤 점이 부족할까. 어차피 수용해 주는 사람들 앞에서나 쓰게 될 말, 그냥 원하는 대로 불러주면 되는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구나.

생각할수록 마음이 갈피를 잃어 그는 제가 아는 수호로 애써 돌아온다. 수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갑자기 부엌에 들어가 4인분은 족히 될 요리를 한다. 매번 레시피가 바뀌는데 조개가 들어간 파스타는 그도 제법 좋아한다.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항상 웃지만 둘은 남겨본 적이 없다. 수호는 곧 비가 올 것처럼 날이 흐리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넌 진짜 부지런하다. 어떻게 이런 날씨에 조깅을 하고 와. 그가 투덜대면 달재는 그냥, 습관이어서, 하고 나면 개운해, 하고 어른 같은 대답을 한다. 정작 고등학생 때는 연습하기 싫어서 뺀질거리다 주장에게 혼난 적도 숱한데 이제 와서 편할 대로 꿰맞추는 건 조금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수호는 진지하다. 아, 운동부 남학생? 그래서 너 농구하는 건 언제 보여줄 건데. 이달재는 농담하지 말라며 웃는다. 그게 언제 적인데. 이제는 동네 애들한테도 질걸. 그러고 보면 수호는 지금도 그 자세로 누워 있을까. 몸을 돌리긴 귀찮지만 대화는 하고 싶다는 듯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이달재는 여전히 둘의 첫 술자리를 기억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생생하게. 정말로 그 순간에 의미를 두어서인지 친구들끼리 하도 곱씹으며 몇 번이고 되새긴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저는 기억나지 않는 물기 어린 밤 제가 쏟아냈을 무언가. 그 이후로 친구들을 좀 더 편하게 대한다고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 자신. 그러나 수호에게 그와 처음 만난 날을 물으면, 물론 이것도 저것도 다 기억은 나지만, 그것보다는 망할 총장 때문에 한창 시위하던 무렵 현장에서 너를 본 게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거기서 동아리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고. 아, 그때 살벌했지. 잘 되진 않았지만. 이달재도 기억은 한다. 그게 왜 자신을 떠올리는 인상적인 기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입안에서 자꾸만 그날의 담배 맛이 감돌았다.

-

“가려고?”

“응. 이제 슬슬.”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 담긴 컵 캐리어가 계산대에 놓였다. 적당히 산미 있는 걸로 골라 달라고 했으니 둘 중 하나는 취향에 맞겠지. 아쉽게도 커피는 그가 잘 아는 영역이 아니고, 친구들에게 물은들 무엇이 수호의 취향일지는 알 수 없고, 메시지에 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깨어 있는 상태도 아닐 것이다. 

“사실 걔 오늘 감기 기운 있다고 결혼식 못 가겠다 한 거여서.”

“감기 걸린 사람한테 커피를 먹여도 되나?”

“안 될 텐데, 내 것만 사가면 또 화낼걸.”

“맞춰주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여름 감기 개도 안 걸린다고 꼭 전해주고.”

“그래서 성질부리면 그건 또 내가 감당해?”

웃으며 커피를 들면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친구가 가방을 건네준다. 우산 까먹지 말고. 맞은편의 다른 친구가 양손에 턱을 괴며 중얼거린다. 뭔가 의외야. 너랑 수호랑 둘이 산다는 게. 되게 안 맞을 거 같은데 막상 보면 은근히 균형이 맞아. 자주 나오는 식은 소리에 이달재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뭐, 재밌고 좋아. 심심할 틈은 없어.

비는 아침보다 시들해졌다. 다음에 또 봐.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어두워 언제 다시 쏟아 내릴지 모른다. 장마라고 했으니까. 손에 든 게 많은 그를 대신해 유진이 유리문을 열어준다. 문에 달린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앞뒤로 흔들렸다.

“오늘 재밌었어.”

“나도. 간만에 봐서 좋았어.”

“좀 자주 나와. 번개 모집할 때마다 불참에 투표하지 말고.”

“알았어. 다음번엔 수호도 꼭 데리고 올게.”

오? 이달재 약속한 거야.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으면 이달재는 문을 빠져나와 고개를 짧게 흔든다. 손을 흔들 수 없는 탓이다. 노력은 해 볼게. 나 갈게!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한 손엔 우산 다른 한 손엔 커피 캐리어를 든 채 그는 길을 나선다. 

아프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 사람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게 건강한 건 아니잖아. 그는 수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왜 우리 사이에 연인의 말이 필요한지. 후배들 결혼식이 그렇게도 가기 싫었는지. 아프다고 핑계 댄 거 들키기 싫어서 문을 잠글 정도인지. 혹시 예식장에 신랑으로 서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지. 그건 그를 외롭게 하는 상상인지. 왜 하필 자신이어야 하며, 그래 좋다고, 우리 사귀자고 말하면 그때부턴 다 괜찮아지는 것인지.

아닐걸. 그는 확신한다. 커피가 쏟아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으면 저 멀리서 전철이 지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로에 부딪히는 거친 마찰음이 비 내리는 공기를 메운다. 우린 그렇게 명확한 곳에 서 있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고, 아마 너도 그럴걸. 평범한 커플은 우리처럼 키스하지 않을걸. 평범한 게이는 여성복 쇼핑몰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며 이거 너무 예쁘다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 애초에 로맨틱한 기류가 없는데, 앞으로도 만들어 갈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커플이 돼. 아니야. 아니라니까. 

군데군데 깨진 보도블록이 그의 발걸음에 따라 덜그럭거린다. 때로는 불규칙하게 고인 빗물이 튀어 오른다. 바짓단은 이미 젖은 지 오래라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다. 어쩌면 맑은 하늘 아래 말끔한 정장을 입고 산뜻한 미소를 짓는 건, 그런 삶을 사는 건 처음부터 그에게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덥고 습한 날씨에 어쩔 수 없이 흐르는 땀과 제 손에 들려 미지근하게 녹아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집에 가면 곧 세탁을 맡겨야 할 정장 바지와 자꾸만 흐트러지는 넥타이. 그리고 이제 와선 잘 골랐다 싶은 연분홍 셔츠. 그러니까 꼭, 반듯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근사한 결말은 영원히 맺어지지 않을 것이다. 농구는 그의 풋풋한 꿈이 아니라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지지부진한 패배고 송태섭은 그의 아련한 첫사랑이 아니라 당장 이번 달 말에도 생일 축하 연락을 보내줘야 할 친구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에, 이름 없고 초라한 땅에 뿌리를 내린다. 마찬가지로 수호와 그는 평범한 연인이 될 수 없다. 둘에겐 아직 꼭 맞는 팻말이 주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정착하지 못하는 그는 아끼는 사람과 미련을 전부 끌어안고 외딴곳에 계속 선다. 그게 이달재가 아는 거주 방식이었다.

어쩌면 수호와 그는 더 이상 지금처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이든 먼 훗날이 되었든. 그냥 원하는 대로 불러주고 끝날 문제였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부딪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령 그는 퀴어 퍼레이드까지 가서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 애인은 아니고 그냥 같이 사는 사이라고, 우린 그런 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 건 이달재에게 중요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다. 그를 애인이라고 소개하고 싶어 하는 수호의 바람은 중요한 것이다. 하고많은 단어 중 하필 그걸 골라왔다는 사실이 알려주는 맥락도 있었다. 빙빙 둘러왔을 뿐 그는 지금 수호에게 고백을 받은 상태에 가까웠다.

그냥 눈 딱 감고 알겠다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미 이것저것 다 하는 사이에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지금과 아주 많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원래 같이 사는 사이엔 이렇게 맞춰 가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호라면, 그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러면 나는?’

결국 뭘 어쩌고 싶은 건지.

역사로 향하는 건널목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저마다 각양 색색의 우산을 들고. 신호등의 불빛이 물웅덩이에 비쳐 길가를 은은하게 물들인다. 단호한 빨간색. 이쯤 되면 슬슬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은 타이밍에 신호등이 몇 번 깜박이고는 이내 초록색이 켜진다.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이달재 역시 수많은 인파에 뒤섞여 앞으로 걸어 나간다. 손에는 두 명 분의 커피를 들고, 길을 은은한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며.

그 순간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전철이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