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구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시간을 통과하는 송아라의 이야기 (NCP)
오빠는 가끔 착각을 한다. 여자들 사이엔 뭔가 통하는 게 있다고. 엄마와 딸 사이는 아들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건 성별의 문제이기보다는 그냥 오빠를 지켜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거라고, 중2의 송아라는 거실에서 홀로 판판한 수박 맛 아이스바를 빨아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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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마지막 주는 폭염이었다. 여름날의 더위는 지겹다. 길거리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방학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대개 친구들과 피서를 보낸다. 다음 학기는 나도 정말 공부할 거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며 친구의 방에서, 하지만 한 시간도 못 버티고 쩍쩍 하품하다 슬그머니 주방에서, 손잡이를 직접 돌려야 하는 가정용 빙수기로 얼음을 갈며 친구들과 끝없는 수다를 떤다. 언제 먹어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얼음을 숟가락으로 퍽퍽 부수며 여름은 역시 이런 맛이라고, 밖에서 파는 과일빙수는 뭐 든 것도 없는데 비싸기만 하다고 여중생 셋의 삶을 모아 진중한 결론을 내린다. 각자의 시럽 취향을 공유하며 한 친구는 멜론 소다 한 친구는 포도를 꼽을 때 송아라는 당당하게 블루 하와이를 외친다. 이름이 멋있잖아. 왠지 하와이 같잖아.
친구들은 종종 빙수 먹다 말고 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형제자매 욕부터 한숨 섞인 부모님 뒷담까지. 남자애들이랑은 몇 시간을 놀아도 이런 얘기 근처도 안 가던데 여자애들끼리는 왜 그런 걸까. 어쩌면 이 셋 모두 남자친구가 없는 탓에 진짜 흥미로운 주제로는 떠들 말이 없어서인지도 모르지만, 화장했다가 들킨 얘기 언니 옷 몰래 빌려 입었다가 싸운 얘기 집에 늦게 들어가서 혼난 얘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라 너는 어때? 난 얘가 자기 오빠랑 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어. 우리 오빠는 뭐 크게 터치 안 해서. 좋겠다. 아 진짜 부럽다. 야, 근데 아라 자체가 너처럼 놀질 않아⋯ 얘 보면 모르겠냐. 엄청 건전해.
그거 무슨 뜻이야. 나처럼 놀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빨리 해명하라며 한 친구가 다른 한 명의 멱살을 쥐어 잡고 흔들 때 송아라는 깔깔 웃으며 유리그릇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숟갈을 해치운다. 송아라는 이런 대화에 특별히 우울해하지 않는다. 뭐 하러 말하겠는가. 우리 집은 가족의 형태가 남들과 좀 다르다고, 오빠랑 딱히 싸우진 않지만 엄마와도 마찬가지지만 그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또 아닌 거 같다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실행해 본 적은 없다. 친구들이 부럽다고 생각해 본 적도 아직은 없다. 그녀는 다만 얼음을 씹는다.
거실 구석에서는 선풍기가 달달거리며 돌아간다. 버튼 주변의 칠이 조금 벗겨졌지만 더위를 식히는 데는 문제 없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세 시가 지났다.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굳이 몸으로 맞아보지 않아도 뜨겁다는 게 눈에 보인다. 밖에 나가기 싫다. 나도. 누가 순간이동 발명 안 해주나. 흰소리들이 툭툭 오갈 때 그녀는 오늘 엄마가 얘기한 케이크 픽업이 몇 시였는지, 그 시간에 맞추려면 여기서 몇 시쯤 출발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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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은 그녀에게도 난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그랬다.
엄마는 원래도 반응이 큰 사람이 아니고 오빠는 원래도 자기 일에 무던하게 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두 형제의 생일과 송아라 자신의 생일은 다르게 지나간다. 그녀의 생일엔 모두가 조금씩 웃는다. 그녀 취향의 케이크를 사고 선물을 받고 - 오빠는 요즘 로드샵 브랜드도 꿰고 있다 -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제 생일이라고 고깔모자를 쓸 만큼 애는 아니건만 송태섭은 굳이 그걸 씌우고 놀리길 좋아한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반면 손윗형제들의 생일엔 모두가 숨을 참는다. 귀 뒤에 아가미가 돋을 판이다. 날은 덥고 습한데 아무도 말을 하질 않는다.
왜 오빠 생일엔 늘 딸기 케이크야? 오빠 딸기 좋아해? 언젠가 그렇게 물었더니 송태섭은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딸기 맛있잖아. 고작 그런 대답을 했다. 그 말도 속이 꽉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큰오빠가 딸기 좋아했나? 아니면 그땐 빵집에 딸기 케이크밖에 안 팔았나? 그녀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렇잖아. 딸기는 여름 과일도 아냐. 아무 데나 가도 있을 거 같지만 찾아보면 생각보다 파는 곳 잘 없어. 하지만 그런 궁금증을 건넨들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진 않을 걸 알기에 송아라는 수면 위에서 겨우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다문다.
두 사람에게 송준섭은 어떤 의미인지 송아라는 알 수 없다. 송아라는 때로 제가 큰오빠를 그리워할 자격도 박탈당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했을 작은오빠와 달리 그녀는 한동안 큰오빠가 정말로 어느 섬에 가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그 섬을 무슨 집 근처 놀이터마냥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으로 상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어른들이 멋모르고 떠드는 것처럼 초라한 결말로 불쌍해해야 하는 일로 여기지도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의 정황은 지금에 와선 도통 기억나는 게 없었고 큰오빠의 부재 역시 그녀에겐 심장을 파 헤집는 공포가 아니었다.
생일은 그저 생일이다. 태어난 걸 축하하는 날. 그녀는 심지어 기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떠난 걸 그리워하는 날. 나도 가끔은 아빠가, 큰오빠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날. 거기서 마지막까지 간추려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면 큰오빠에겐 기일이 없다는 것, 비록 제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빠는 장례라도 치렀는데 큰오빠가 떠난 건 온전히 그리워할 날조차 없다는 불일치에서 오겠지만 그렇다고 생일을 기일처럼 보내는 것 역시 그녀는 찬성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다. 밖에선 허구한 날 주먹질을 하고 들어오면서 제게는 손 한 번 장난삼아 휘두르지 않는, 말주변도 없으면서 제가 울상을 하고 들어오면 대번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저 쪼그만 오빠의 생일이 고작 이렇게 지나가 버리는 게. 재미없는 여름방학의 몇 안 되는 이벤트인데, 삼백육십오일 중에 일등은 아니어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은 즐거워야 할 날이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게. 그녀는 모처럼 생일인데 재밌게 보내자고 할 수도 없고,
‘친구 집에 오븐도 있단 말이야. 케이크 만들 거면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딸기 케이크가 준섭의 흔적인지 아닌지도 기억 못 하면서 그 시절부터 이어졌을 규칙을 이제 와서 바꾸자고 할 수도 없었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건 어쩌면 자신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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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8월의 첫 주. 송아라가 어쩌다 집에 혼자 남아 아이스바나 먹게 되었나 하면 그 이유는 어머니에게서 기인한다.
그녀의 어머니 김향기 씨는 식당에서 일을 한다. 적어도 송아라가 알기론 그랬다. 일하시는 곳에 가보지 않은지는 좀 됐다. 초등학생 때는 어머니가 일하던 식당이 학교에서 가깝기도 했고 저도 어렸기에, 길에서 넘어져 다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장실이 급하면 오빠와 함께 식당으로 달려가 많은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이른 시간에 앉은 손님들이 종종 용돈이라도 쥐여주면 부리나케 뛰쳐나가 길 건너 문방구에서 오락을 했다. 오빠는 거기서도 농구를 했고 송아라는 철권을 했으며 조금 더 커서는 둘이서 펌프를 뛰었다. 그건 송태섭과 송아라 둘만이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추억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일요일 하루만 쉬었다. 출근은 자식들이 학교 간 다음에, 퇴근은 남은 반찬을 싸 들고 저녁 늦게. 그리고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식당이 문을 닫는지 일주일씩 긴 휴가를 보냈다. 그중 여름휴가가 매년 이맘때였다. 나는 일주일에 이틀을 놀아도 짧게 느껴지는데 엄마는 대체 저 귀한 시간에 집에서 혼자 뭘 할까 하는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어졌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아마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다고, 어제부터 식당 쉰다고 했는데 집에 없다고 땡그란 눈을 한 저를 오빠가 그곳에 데려갔을 것이다. 엄마 저기 있잖아.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해변에 홀로 걸터앉아 넋이 나간 듯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은 어린 두 자식에게 같은 감상을 안겨주었다. 가까이 가지 말자. 저기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도, 어떻게 저 햇볕을 견디고 5초 이상 앉아 있을까 싶은 여름에도, 김향기 씨는 몇 년이 가도록 제 자리를 지켰다. 둘 다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철이고 식당도 휴가라고 했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면 송태섭과 송아라는 눈빛만 주고받았다. 물론 이해를 못 할 건 없었다. 송아라 역시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었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을 수 있지. 다만 어째서 혼자 있고 싶다는 그 마음조차 비밀인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눈치로 알아채야 하는 규칙이 많은지는 좀처럼 답을 알 수 없을 뿐.
송아라는 오늘 그 길을 한번 걸어보았다. 엄마가 내내 앉아 있는 그 자리에도 앉아봤다. 앉아서 기다리면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바다는 그냥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치. 해가 이리로 뜨면, 지는 건 저쪽으로 지겠지.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녀는 별 소득 없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낡은 선풍기를 틀고, 냉장고에서 아이스바를 꺼내 봉지를 뜯으며 오늘 다이어리 첫 문장은 뭐로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집에 며칠씩 혼자 있는 건 처음인데 무섭다, 가 적절할까. 하지만 너무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오빠. 송아라는 그 호명을 오늘의 첫마디로 쓰자고 결심한다. 그 말이 어느 오빠를 가리키는지는 확정 짓지 못한 채.
오빠.
엄마가 오빠 경기를 보러 갔어. 나는 빼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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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하자면 송태섭은 착각을 한다. 그녀의 엄마는 딸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아들에게 잔인해질 땐 딸에게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고, 만약 둘 사이에 송태섭이 모르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건 성별이 아니라 농구 코트의 여집합이다.
전국 대회를 나간다고 일요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러 간 건 오빠였는데 돌연 엄마마저 그날 오후에 짐을 싸고 있었을 때 송아라는 어이가 없었다. 각종 갈등과 풍파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집이지만 이건 또 상상해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좀 더 차분하게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제는 잘도 했으면서 일 보 전진에는 반드시 이 보 후퇴가 따라온다는 듯 오늘은 볼멘소리가 먼저 나왔다. 뭐야? 엄마 어디 가는데?
‘오빠 경기하는 거 보러.’
‘이때까지 안 가다가 갑자기? 오빠한테는 말도 안 하고?’
‘말하지 마. 오빠 몰래 다녀올 거야.’
‘엄마 경기하는 데가 어딘지는 알아?’
‘⋯감독님 전화번호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엄마 언제 올 수 있을지 가봐야 알아. 냉장고에 카레 있으니까 챙겨 먹고, 식탁에 돈 좀 뒀으니까 필요하면 친구들이랑 그걸로 뭐 사 먹고 그래.’
‘엄마.’
‘저녁에 집으로 매일 전화할 테니까 전화 받고.’
‘엄마!’
‘왜?’
‘나도 가면 안 돼?’
‘⋯엄마 너까지 데리고 다닐 자신 없어.’
‘내가 무슨 초등학생이야? 나 잘 따라다닐 수 있어.’
‘다음에. 다음에 같이 가. 오늘은 엄마도 힘들어.’
김향기 씨는 어쩐지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아들의 원정 경기를 늦게나마 보러 가는 수줍은 부모보다는 응급 키트를 바구니에 쓸어 담는 재난 생존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야 그 먼 곳까지 가는 교통편이 자주 있진 않겠지만, 오빠네 학교가 1차전에서 바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경기를 보려면 서둘러 가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국 대회라는데 우리는 응원하러 안 가냐고 몇 주 전에 슬그머니 물었던 건 송아라였다. 오빠네 학교가 전국에서 논다는데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멀어서 좀 그런가? 하지만 엄마의 표정에는 티끌 같은 변화도 없었다. 자기는 관심 없다는 듯. 이제 와서 농구를 응원해 줄 기력은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그런데 이제 와서? 나는 빼고 엄마 혼자?
김향기 씨는 문단속 잘하라고 연신 당부를 뱉으며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송아라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집에 오빠도 없이 혼자 있어 보는 건 처음이라 뭘 하면 좋을지 감이 잘 안 잡혔다. 내일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우리 집 놀러 오라고 할까. 하지만 송아라의 집에는 빙수기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초대해서 놀기엔 좁기도 좁았다. 헉. TV라도 봐야겠다. 그녀는 후다닥 리모컨을 들고 TV를 켜 예능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집에서 혼자 보는 일요일 예능은 생각만큼 재밌지 않았다. 그럼 외국 영화! 엄마가 안 좋아해서 집에서 자주 못 보는 외화 채널로 넘어가자, 좀 재밌었다. 옛날 흑백영화에는 그녀가 잘 모르는 낭만이 흘렀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예뻤다. 그 고아함은 봐도 봐도 새로웠고 그녀는 간만에 소녀의 감성을 즐겼다.
TV는 자정 넘어서까지 켜져 있었다. 역시 집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탐사보도 다큐멘터리까지 지나가고서야 전원이 꺼졌다. 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제야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우르릉. 쾅.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울림. 폭염 뒤를 고스란히 따라온 호우였다. 세차게 치는 빗소리. 가끔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가 거칠었다. 거실 불은 모두 끄고 방문은 살짝 열어둔 채 바닥에 요를 깔고 눕자 맨다리에 닿는 감촉이 까슬까슬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잠시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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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솔직하게 말해 줘.
내가 어제 큰오빠 얘기 꺼내서 그래?
나랑 있기 불편해서 나 안 데리고 간 거 아냐?
큰오빠 사진이라도 꺼내 놓자고. 얼굴 잊겠다고. 두 모자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송아라는 그 말을 쉽게 꺼낸 게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아빠 얘기를 하는 상상, 큰오빠 얘기를 하는 상상보다 두 사람에게 송준섭의 이름을 꺼내는 상상을 훨씬 더 많이 했고 각오를 깊게 다졌고 1초도 채 안 되었을 그 짧은 시간 엄마의 설거지 소리가 멈췄을 때 그녀는 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우리 이제 큰오빠 얘기도 좀 하고 지내면 안 될까. 나 큰오빠 기일 제대로 챙기고 싶어. 그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 준비해 둔 말은 이것저것 있었으나 훨씬 간결하고 투박한 요구가 먼저 튀어나온 까닭은 실은 그거야말로 가장 절박한 말이어서였을 것이다.
송태섭은 이 집 식구 셋 중 제가 외따로 논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이 집에 남은 남자는 한 명. 농구하는 사람도 이제는 한 명. 너랑 엄마가 고생이 많지. 그런 말을 이따금 했다. 하지만 송아라가 생각하기에 진정 외따로 노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큰오빠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못 들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목소리도 가물가물했다. 아빠는 말할 것도 없었다. 너무 어릴 때 두 사람의 상실을 통과한 탓에 그녀는 솔직한 말로 실감이 잘 안 났다. 죽었다고 아무리 되새겨봐도, 이건 눈물이 흘러야 할 일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봐도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청나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작은오빠와 엄마가 지금이라도 그 이름에 가시가 박히고 손이 델 것처럼 구는 것과 달리. 송준섭의 존재는 물론,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준섭이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된 그 나이는 그녀마저 한참 전에 뛰어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애였을 것이다. 물론 준섭이 떠났을 때 그녀야말로 진짜 애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7월 31일이 가까워지면 송아라는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 식탁에서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다. 이럴 거면 내게도 큰오빠를 알려 달라고. 중학생 송태섭과 초등학생 송아라가 방과 후 오락실에서 가끔 펌프를 뛰었듯 초등학생 송준섭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냐고. 오빠는 학교에서 무슨 과목을 제일 좋아했냐고. 혹시 학교에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고 그랬냐고. 초등학생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큰오빠 학교에서 인기 많았을 거 같으니까. 키도 컸고.
그러니까 나도 알려줘.
나만 두고 가지 마.
나만 빼고 농구하고, 나만 빼고 다 알고, 나만 빼고 둘이서만 특별한 형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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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깬 송아라는 오래 얽매여 있지 않는다.
생각이 많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타고나길 엄마보단 아빠를 닮았다. 아빠의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녀 스스로는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꽤 단호하게 말한다. 아라 너는 아빠를 닮았다고. 외모도 외모지만 성격이.
그런 말을 할 거면 엄마 아빠 연애담이라도 한 줄기 들려주던가. 아빠 성격이 어땠다는 건데. 흥칫뿡이야. 송아라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냉장고에서 카레를 꺼내 데워 먹는다. 어울리지 않게 카레는 맛있었다. 오늘은 즐거운 월요일. 두 사람은 언제쯤 올까. 점심은 뭐 먹지. 비 잠깐 그쳤던데 슈퍼 갔다 올까. 먹고 싶었던 과자 잔뜩 사서⋯. 그녀의 머릿속엔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알차게 보낼 방법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거기에 우울이 침범할 틈은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봉지 과자 대신 핫케이크 믹스를 집은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뒷면에 적힌 레시피대로 혼자 만든 팬케이크는 끝장나게 맛있었다. 오후 내내 본 영화 속 사랑은 정열적이고 뜨거웠다. 엄마는 알려주지 않는 맛이었다.
중학생 송아라에게 전국 대회 결과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건 김향기 씨가 저녁의 전화 통화로 한발 늦게 중계해 주었다. 다행히 1차전에서 떨어지진 않았나 봐. TV 소리를 잠시 끈 송아라가 농담처럼 그 말을 건넬 때 수화기 너머에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그거 다 보고 올 거야? 오빠네 학교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묻자 김향기 씨는 아니, 그건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근처에 어지간한 숙박업소는 만실이었고 남은 방은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그녀의 여름방학 역시 정해진 기한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내일이 끝일 거야.’
‘내일이 2차전 아냐?’
‘응. 근데 내일 붙는 학교가 지난 3년 내내 우승을 놓친 적이 없는 곳이라네.’
‘켁. 너무해.’
거기까지 갔는데 아깝게! 작은오빠의 운이 아깝다는 건지 엄마가 쓴 비용이 아깝다는 건지, 아무튼 그게 송아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김향기 씨는 또 작게 웃더니 내일 저녁 버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집에는 그다음 날 아침에 도착할 거라고. 와. 그게 무슨 강행군이야. 응원을 이렇게 다녀오는데 오빠한테 비밀인 건 좀 너무한다. 송아라는 키득거리며 전화선을 배배 꼬는 동시에 내일 아침엔 바닥을 드러내게 될 카레 냄비의 설거지를 생각했다. 남은 자유의 시간 단 하루. 그 이름은 8월 3일. 내일은 아이스크림을 사야지. 엄마는 커피 맛 와일드 바디, 오빠는 탱크 보이.
그리고 난 수박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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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수박 바는 엄마와 오빠가 돌아왔을 때 같이 먹으려고 산 거였는데.
오전에 빨리 슈퍼를 다녀와 냉동고를 채우고 오후에는 또 내내 영화만 본다는 계획이 엄마의 때 이른 전화로 틀어졌다. 어어. 엄마. 저녁에 출발하기 전에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 점심 먹고 있었지. 비 지금은 안 와. 응 그냥 영화 보면서⋯.
엄마 울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졌어? 설마 오빠 다쳤어??
그런 거 아냐. 엄마는 거짓말을 했다. 울어 놓고 안 운 척. 숨 한번 크게 들이쉬면 다 괜찮아지는 척. 진짜로, 그런 거 아니고, 오빠 경기 잘했어. 잘하더라. 오빠네 학교가 이겼어. 엄마는 질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송아라는 싱겁게 대답했다. 오. 웬일이래. 그러나 다음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친 건 아니구나, 안도하는 동시에 불쑥 화가 솟았다. 뭔데. 그럼 왜 그런 눈물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전화해 사람 놀라게, 하는 투정 섞인 마음은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치달았다.
난 왜 여기 있을까. 집에서 혼자 TV 보다가 오빠가 다친 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해야 하고. 그러면서 이다음을 또 물어봐야 하고. 승리도 패배도 전부 전화로 전해 들으면서, 그 자리에 같이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전화선을 뽑고 소식을 아예 차단할 수도 없는 이 지독한 거리감.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김향기 씨의 설명은 길어졌다. 그러나 설명에서 전해지는 흥분보다 조금 전 엄마가 안 울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더 강하게 닿았다. 아니, 어쩌면 엄마가 흥분한 게 느껴져서 마음이 더 싸늘하게 식는지도 몰랐다.
엄마 집에선 한 번도 그런 모습 보인 적 없잖아. 그렇게 좋아할 거였으면서 내가 가자고 했을 때는 왜 안 간다고 했어. 왜 또 나는 빼고. 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나만 빼고 한 가족인 것처럼⋯.
아라야?
흥. 그녀는 수화기를 막고 코를 들이마신 다음 대답한다. 으응. 아니야. 엄마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한 거야? 점심은 먹었어? 아, 그치. 그건 나중에 들을래. 응. 내일 아침에 오는 거 맞지? 그럼. 완전 깨끗하게 해 놨지. 이미 한번 들었던 말을 또 묻고 또 듣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겨우 통화가 끊어졌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송아라는, 아무래도 아까 보던 영화를 마저 보기는 그른 거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은 이제 겨우 한 시였다. 엄마는 정말로 오전 경기 끝나고 곧바로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농구. 하여간 그놈의 농구. 태양계에 태양이 있다면 이 집은 거실 한가운데에 농구공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농구공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며 빙글빙글.
짜증 나. 그녀는 한 번 더 코를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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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오빠 경기를 보러 갔어. 나만 빼놓고. 그다음 문장은 한참이나 이어지지 않는다.
집에 있으면 기분이 더 별로일 거 같아 산책을 했다.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나온 게 엄마의 그 해변이었다. 하지만 해변을 내내 거닐어봐도 여기서 혼자되는 엄마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이마에서 땀만 삐질삐질 흐를 뿐. 하긴 그걸 중학생인 제가 아는 게 더 이상한가. 덥지도 않은지 해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다. 그러나 반팔 반바지에 가죽이 조금 벗겨진 샌들, 누가 봐도 마실 나온 동네 주민 차림인 그녀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오빠. 송아라는 문득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그건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생일에도 쉽게 이름을 말할 수 없고 기일은 아예 언제라고 집을 수조차 없는, 그러나 지금 같은 때에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조를 수 있는 한 사람. 이럴 때만 말을 청하다니 치사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엄마랑 작은오빠 때문에 짜증 난다는 얘기를 큰오빠 말고 그럼 누구한테 해. 송아라는 뒤늦게 제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를 떠올린다. 친구들이 말할 땐 별거 아닌 듯이 들렸는데. 아주 흔하고 사소한 일처럼 들리던데 왜 자신의 가족 이야기는 그렇게 되지 않는지.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 우울하다는 뜻은 아냐. 그녀는 덧붙인다.
산책을 다녀온 송아라는 괜히 하릴없이 이 방 저 방을 들락날락했다. 엄마가 쓰는 화장대 서랍을 한번 열어보고,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화장품 뚜껑도 한번 열어보고, 오빠 책상에 세워져 있는 - 여자친구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예쁜 언니 사진이 있는 - 액자도 들춰보고 놀았다. 청소는 똑같이 하는데도 오빠 방은 제 것과 다른 냄새가 풍긴다. 남자 향수 냄새와 땀 냄새, 뭐 그런 것들이 뒤섞여서. 아침마다 머리를 올려 세우고 향수를 칙칙 뿌리는 모습에 송아라는 때로 참 가관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저런 향수는 가장 작은 사이즈로 사면 얼마쯤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제가 생일 선물로 받았던 귀찌를 여태 잘하고 다니는 것처럼 오빠의 생활에 녹아들 무언가도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테니까. 기껏 골라서 포장까지 해 놓고도 아직 못 준 건 순전히 제 용기가 부족한 탓이지만.
마지막으로 열어젖힌 방은, 그건 누구도 방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곳이다. 송아라는 이곳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옛날 물건들은 전부 엄마가 쌓아 두었고 행여나 찾을 게 있을 때조차도 놔둬, 엄마가 할게, 등으로 거절당해 왔으니까. 저건 아마도 오빠들 농구 시합 찍었던 비디오테이프. 먼지 쌓인 카메라. 이거 설마 오빠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인가. 팔다리 멀쩡하게 붙어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카세트테이프도 있고. 팝송? 낚싯대⋯. 비디오테이프 여기 또 있네. 뭐가 이렇게 많아. 이건 연도도 붙어 있고.
나 집에서 혼자 재밌게 잘 놀았고. 다음엔 나도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까 그때 같이 가면 되잖아? 근데⋯.
잠깐 고민은 했다. 다룰 줄도 모르는데 막 만졌다가 고장 내면 어떡하지. 하지만 기껏해야 전원 켜기, 비디오 재생하기, 비디오 꺼내기 세 가지 기능만 쓸 줄 알면 된 거 아닐까 싶었고 실은 쓸쓸함이 더 앞섰다. 집에 며칠째 흐르는 긴 침묵에 대답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설령 화면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이라 해도. 김향기 씨가 평소에 이 비디오들을 어떻게 정렬해 놓는지 전혀 모르는 그녀로선 순서를 어지르고 싶지 않았고, 연도가 적힌 것 중 저와 송준섭이 함께 나올 만한 테이프 하나를 골랐을 뿐이었다.
지직거리며 켜진 조그마한 화면은 송태섭의 초등학교 입학식으로 시작했다. 정확히 십 년 전이었다. 놀랍게도 그 영상에는 아빠가 등장했다. 연도를 생각하면 물론 그랬겠지만, 송아라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영상은 이래저래 낡은 태가 났다. 화질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 화면 밖에서 간간이 들리는 어른들의 말투와 동네 분위기, 하지만 무엇보다 아빠가 등장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옛날이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주제에 의기양양한 송태섭은 너무 우스워서 김이 샌달지, 애 같다는 감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송아라는 정직하게 두 오빠와 아빠의 목소리만을 쫓았다.
작은오빠의 초등학교 입학식, 큰오빠는 이미 그때도 농구를 하고 있었다. 제 기억보다 훨씬 더 앳되고 자그마한 모습으로 코트 여기저기를 누비는 모습은 생각지 못한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작은오빠는 훨씬 더 큰 울림을 받은 게 분명했다. 큰오빠도 아직 영락없는 애인데 그 옆에 달라붙어 나도, 나도, 를 하는 초등학교 1학년은 정말 작았고, 또 그 옆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콧물 잔뜩 먹은 소리로 삑삑이 신발을 신고 쫓아가는 다섯 살 어린이는 더 작았다.
그걸 보고 딱히 기분이 좋았던 것도 아니거든? 결국 그때도 오빠들은 농구했고 아빠가 가르쳐 줬고 엄마가 사진 찍어 준 거잖아. 나는 농구 안 했는데. 이 집에서 나는 항상⋯.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할머니 집에서 보낸 듯한 여름방학 기록이 지나가고 마침내 두 오빠의 생일 케이크가 등장했을 때 송아라는 절로 숨을 참았다. 십 년 전에도 케이크는 딸기가 얹어진 생크림 케이크였다. 저 동네에서 딸기 케이크는 진짜 어떻게 구한 거지. 역시 큰오빠 취향이었을까.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이 나란히 고깔을 쓴 오빠 둘이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짝짝대는 박수 소리와 곧바로 터지는 미니 폭죽. 생일이 같다니 우린 정말 특별한 형제야. 오빠들도 어릴 땐 참 시끄럽게 굴었구나 싶던 그 순간.
‘그래, 너희 둘은 특별한 형제니까 케이크 남은 건 동생한테 양보하자?’ ‘네!’
화면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아라는 그때까지도 영상 속 제 모습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혼자 농구하지 않는 애. 외따로 노는 애. 하지만 어린 송준섭이 둘째를 건너뛰고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을 때, 그 표정은 외면할 수 없었다. 송준섭은 뿌듯해 보였다. 제가 제법 오빠 노릇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티가 났다. 세 남매 모두 케이크를 한 조각씩 받고 아직 마지막 한 조각이 남았는데, 아빠는 은근슬쩍 케이크 상자를 막내의 등 뒤로 치워 두고 있었다. 송아라는 처음으로 뒤로 감기 버튼을 눌러 보았다. 다시. 처음부터.
첫 장면부터 다시 보니 그제야 상황이 보였다. 다섯 살배기 어린이는 처음부터 이게 누구 생일인지 관심이 없었다. 영상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컷팅식을 할 때까지 쭉, 케이크에 눈이 꽂혀 있었다. 누가 줬는지 당당하게 고깔모자도 쓰고 있었고 초를 불 때도 같이 불고 싶어 하는 걸 두 오빠 사이에 자리가 없어 끼지 못한 거였다. 오늘은 오빠들 생일이야. 아라 생일 아냐. 그렇게 나지막이 이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화면 밖에서 들렸다. 하지만 당당하게 제 몫의 케이크를 쟁취한 막내가 생크림을 입가에 다 묻혀 가며 먹을 때 그걸 번갈아 닦아주는 남자들의 손길은 조금도 거칠지 않았다.
‘아라야, 맛있어?’
그렇게 묻는 송준섭의 말투는, 지금 들으면 너무 어린애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따라 하고 싶은 듯 옆에서 괜히 알짱대는 송태섭의 모습과,
‘우리 공주님이 맛있게 먹으면 됐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모습에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아빠는 비디오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 보여 드릴 건데 웃어야지!’ 하는 말을 가끔 했다. 어쩌면 이 비디오는 김향기 씨의 육아일기인 동시에 집에 길게 머물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남긴 기록인지도 몰랐다. 그녀와 닮았다던 아빠. 얼굴도 얼굴이지만 무엇보다 성격이. 그녀는 한 번 더 뒤로 감기를 눌러 이번엔 맨 처음부터 다시 틀어보았다. 그렇게 호탕한 웃음소리가 담긴 건 형제의 생일 파티 장면이 유일했다. 멀리까지 나가서 사 온 듯한 케이크. 송아라의 접시 위에만 하나 더 얹어진 딸기. 비디오 전체에서 몇 안 되는, 농구와 무관한 순간.
그녀는 쓰던 다이어리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결국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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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새벽까지 오락가락하던 비는 말끔하게 그쳤다. 별일 없었어? 응, 없었어. 나 설거지도 다 해 놨다? 응. 잘했어.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덧붙이는 말. 고마워. 그게 끝이었다. 엄마는 잠시 식탁 위의 달력을 보더니 여태 7월에 머물러 있던 장을 8월로 넘기고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오래간만에 선선한 게 느껴졌다.
야간 버스로 쌩쌩 달려왔을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 오빠는 목요일 오후에 신칸센을 타고 집에 왔다. 점심이 살짝 지난 시간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묻는 말은 입을 통해 나오지도 않았다. 남매는 죽이 잘 맞았다. 물어 뭐 해. 그녀는 눈짓으로 창밖을 가리켰고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송태섭은 금세 제 짐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으러 나갔다.
송아라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걸 굳이 참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엄마를 찾는 송태섭이나 돌아온 이후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엄마나. 둘이 아주 바쁘구만. 뭐 사랑싸움하세요? 한 명이 왔다 가고 또 한 명이 왔다 가고, 집은 다시 조용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쿵쿵 울리는, 오빠가 계단을 타고 날듯이 내려가는 소리. 지긋지긋하게 우는 매미. 무더위. 냉장고엔 비록 그녀 몫의 수박 바는 남아 있지 않지만 엄마의 와일드 바디와 오빠 몫의 탱크 보이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 먹으라고 하고 나는 이따 친구들이랑 빙수 먹으러 가야지. 그녀는 생각한다. 역시 자기는 밀려드는 파도의 파랑보다는 블루 하와이의 파랑이 조금 더 취향이라고.
그리고 그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언제든지 농구 코트의 파랑(波浪)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송아라는 안다. 오빠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된다. 비디오 속의 큰오빠도,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뛰고 왔을 작은오빠도, 공을 낚아채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된다. 뭣도 모르면서. 근사한 분석은 한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 마음을 졸이게 된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는, 오빠보다 그녀가 더 잘 안다. 그녀는 늘 주인공의 무대가 아니라 청중의 관객석에 있던 사람이니까.
질투했다면 오빠의 그런 힘을 질투했을 것이다. 중학생씩이나 되어서 엄마·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따위의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오토바이 사고로 만신창이가 돼서 두 달이나 입원해 놓고도 후유증 하나 없이 회복한 그 기적과 행운을 탐낸 것도 물론 아니고, 그렇게 갖은 일을 겪어놓고도 또 다음을 만들어 내는 저력이. 그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누군가에겐 있었다.
‘농구라면 진절머리를 내던 엄마를 기어이, 경기를 보러 가게 할 만큼 말이지.’
그리고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바깥의 사람을 소외시킬 수도 있을 만큼.
하지만 이젠 괜찮았다.
송아라는 작게 웃으며 신발장에서 제 신발을 꺼내 신는다.
이제 그녀는, 두 사람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