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송가네의 역사. 카오루 상의 이야기 (NCP)
上
료타가 고2였던 그해 여름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한다. 제가 발 들일 수 있는 곳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어 한 발짝 뒤에서 건넨 생일 축하와 그다음 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쪽지를. 수건을 개듯 깔끔하게 접어 둔 종이를 완전히 펼쳐 들었을 때 그녀는 내용을 읽기도 전에 숨을 삼켰다. 지우고 고쳐 쓴 흔적이 조금도 없는 단정한 편지. 망설임 없이 단번에 썼다기엔 그런 아이가 아닌 걸 잘 알았다. 그렇다면 옆에 다른 종이를 두고 쓸 말을 여러 번 다듬었을까. 그 애는 저를 닮아 생각이 많으니까. 그런 면이 카오루의 눈에는 유독 잘 보였다. 그게 늘 애틋했고 동시에 조금 안쓰러웠다.
여름방학을 맞아 안나는 방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 그녀도 쉬는 날이라, 이따 친구와 놀러 나간다는 안나에게 간단히 아침밥만 차려주고 밖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눅진한 바닷내음이 끼친다. 도보 거리에 바다가 있는 탓이다. 그녀는 자연스레 집 앞 해변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본능이다. 무얼 하든 늘 이곳으로 돌아온다. 한 손엔 아침에 다 못 읽은 편지를 쥔 채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해변가엔 사람이 거의 없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걸 느끼며 그녀는 마저 내디딘다. 이곳에서 그녀가 앉는 자리는 몇 군데로 정해져 있다. 그날 고른 곳은 널따란 통나무 벤치였다.
그 끝에 걸터앉아 편지의 첫 줄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그녀는 깨어지듯 울었다.
그녀의 차남은 종종 그녀를 그런 식으로 울리곤 했다.
그날의 편지는 그녀에게 수문(水門)이었다. 긴 세월 굳게 닫혀 있던 댐에서 처음으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짧고 간결한 문장들을 그녀는 읽고 또 읽었다. 이 아이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어제 문득 제 형 생각이 나서? 아니면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렸을 때부터? 그보다 더 전에, 엉망진창의 몰골로 집에 돌아와 제 문을 걸어 잠갔을 때인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제 둘째를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그게 종종 두려웠다. 제 곁에 남은 게 몇 없는데 그 남은 것들을 지킬 방법을 스스로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게.
결국 먼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나. 그녀는 제가 좀 더 현명한 부모였으면 어땠을지 잠시 돌이키다 이내 그만둔다. 그 생각을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답을 모르는 걸 보면 아마 이번 생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래. 료타와 소타가 한 자리에 섰다면 그녀는 적어도 관중석에는 있어야 했다. 그건 유니폼을 입고 코트 위를 한껏 누비는 자식들의 어머니로서 그녀가 일찍이 깨우친 제 자리였다. 카오루는 불현듯 몰려오는 생각에 서둘러 모래를 털고 일어난다. 경기 대진표가 어떻게 되더라. 벌써 늦은 건 아니겠지.
형이 섰을 곳이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생들의 비밀 대화란 다 거기서 거기였고, 어린 두 아들이 눈을 반짝이던 명문고의 이름 정도는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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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보러 갔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뒤의 대화를 잘 이을 자신도 없거니와 그날 료타가 만끽했을 기쁨을 복잡하게 휘저어 놓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제 아들을 다시 봤다. 늘 첫째와 함께 떠올려서 그런지 아니면 제 자식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제 안에선 유독 어리다는 인상이 강했다. 형이 하는 건 다 부러워하고 형이 같이 안 놀아주면 울며 떼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카오루는 바람처럼 불어오는 그리움에 옅게 웃는다. 하지만 그날 코트에 선 료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단단히 선 어른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의 이름까지 다 기억나진 않았다. 그러나 저보다 한참은 더 큰 친구들을 뚫고 돌진하던 그 순간의 기세는 다시 떠올려도 벅찬 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학교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 게 좋겠다고. 사실 오키나와에서 간이 경기를 보러 다니던 시절엔 종종 감독님들과 인사도 나누곤 했었다. 그런 자리를 멀리하게 된 건 소타를 잃고서도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들을 필요 없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싫었고 거기에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는 저 자신은 더 싫었으며 마치 제가 모르는 료타를 저는 안다는 듯 말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홀몸으로 자식을 어떻게 키워. 그래도 아들한테는 남자 어른이 있어야지. 봐. 이번 일도⋯. 애써 흘려보낸 가시 박힌 말들이 그럴 때면 유독 생생하게 살아나 제 폐부를 찌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괜찮을 것 같았다. 경기를 보고서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저기에 서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괜찮은 분일 것이다. 그분이 보는 미야기 료타는 어떤 사람일지도 내심 궁금했다. 동네 제과점에서 종합 선물 세트까지 집어 든 건 그 때문이었다. 연세가 조금 있는 분 같던데 괜찮을까. 그렇다고 학교에 몰래 찾아가는데 료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라 그녀는 제과점 사장님의 의견만을 믿었다.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교무실에 전화를 걸어 안자이 감독님의 연락처를 묻고 약속을 잡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렇게 만나 뵙게 된 감독님은 생각보다 풍채가 좋은 분이었다. 경기 때는 혹여 료타가 알아챌까 봐 구석에서 조용히 본 탓에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푸근한 인상의 어르신. 그게 그녀의 첫 감상이었다. 전 국가대표라는 말만 듣고 제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한 번도 학교에 얼굴을 내밀지 않다 갑자기 찾아온 만큼 놀라실 법도 한데 그런 기색도 없었다. 제 앞에 가볍게 놓이는 찻잔을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푸른 향이 코끝에 어른거렸다. 교무실에 타고 흐르는 정적에 먼저 말문을 연 건 그녀였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전화로 인사드렸던, 미야기 료타 엄마 미야기 카오루입니다.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일이 바빠서 최근에 료타가 농구하는 걸 자주 봐주질 못했어요. 차를 몰고 오는 길에 혼잣말로 미리 다듬었던 문장들이 천천히 이어졌다. 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했는데 제가 신경을 못 써줘서.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요. 그 말에 감독님은 사람 좋게 웃으며 찻잔을 가리켰다. 일단은 차를 좀 드시죠. 집사람이 밖에서 선물 받은 건데 맛이 괜찮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제가 좀 서둘렀나 싶어 머쓱하게 잔을 들었다. 과연 녹차를 한 모금 마시니 온기에 긴장이 녹는 것도 같았다.
미야기 군은 잘하고 있습니다. 부원들 사이에서 차기 주장으로 손꼽힐 정도인데요. 그게 감독님의 첫 마디였다. 미야기 군에게 북산이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오히려 제 쪽에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생각보다 후한 평가에 그녀가 멍하니 되물었다. 료타가⋯ 잘하나요? 농구를 좋아하나요? 그걸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전문가의 눈에는 어째 보이는지. 혹시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서 있는 건 아닐지. 맞은편의 소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감독님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미야기 군은 강합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요.
혹시 아드님의 장래에 대해선 대화를 해보셨을까요. 아뇨⋯ 아직요. 그녀는 그제야 제가 한 번도 료타의 다음을 물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속내에 촉을 세우기도 바빠서, 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이 뒤에 대해선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카오루 자신도 뒤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고. 감독님이 보시기엔 료타가 프로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나요. 저희는 그렇다 해도 지지해 줄 형편이⋯. 제 입으로 꺼내기 불편한 말끝에 뒤를 흐리자 감독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요하다면 장학 재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미야기 군은 지금 이 순간의 농구를 즐기고 있으니까요.
아이들은 강합니다. 원래 어른이 복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눈 깜짝할 새 커 버리지 않습니까.
그건 어쩐지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가. 이분은 누군가를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일을 나보다는 훨씬 많이 해 보셨겠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새어 들어온 오후의 햇살 속에 미세한 먼지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정말 눈 깜짝할 새네요. 저는 몰랐어요. 저는 이걸 처음 겪어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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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이 끝나고 그녀는 바닷가로 향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오랜 습관. 차에서 내려 바닷가를 마주하면 비로소 제가 돌아와야 할 곳에 왔다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인생에서 없어지지 않을 도돌이표. 어느 바다건 간에 그녀는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여즉 돌아오지 않는 큰아들과 가끔 그 어깨가 너무도 그리운 남편이 떠오르고. 그러고 나면 얼마 전 제 옆에 서서 바다를 똑바로 응시하던 둘째가 떠올랐다. 너는 어디를 보는 걸까. 그 시선의 끝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그녀는 알고 싶었다. 너는 멀리멀리 어디까지 날아갈까.
료타가 쥐여 준 소타의 아대가 아직도 그녀의 가방 안에서 굴러다녔다. 소타의 물건은 모두 방 한쪽에 정리해 뒀고, 옛 사진이나 영상은 종종 꺼내 보아도 물건은 건드릴 일이 잘 없었다. 처음엔 소타의 흔적이 세월에 조금씩 삭아가는 걸 보는 게 괴로워서였고, 지금은 굳이 그럴 것 없다는 데 이르러서였다. 그러니 그 아대를 보며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실상 소타가 아니라 료타다. 그 아대를 내내 갖고 있었을 제가 모르는 어느 시점의 료타.
형이 섰을 자리에 제가 서게 되었다던 차남은 이제 형의 아대를 내려놓고 어디를 보는 걸까. 그녀는 사실 지금도 집에 돌아왔을 때 료타가 없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안나는 그 정돈 아닌데 료타는 좀, 어렵다. 아들이라 그런가. 남편이 있었으면 남자끼리 통하는 게 있었을까. 주위에서 하도 그런 소릴 하니까. 생각이 많은 건 저를 닮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애들은 눈 깜짝할 새에 큰다는 감독님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 그녀는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러게요. 어쩔 땐 나흘 만에도 애가 큰 거 같아요. 애는 자꾸 크는데 제가 그걸 따라가기가 어렵네요.
손때 묻은 아대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바다를 내다본다. 그리고 속으로 말을 다듬는다. 료짱. 네가 무얼 보든. 그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든 엄마도 그 풍경을 보고 싶어. 여전히 집에 네가 없으면 두렵고 또 가끔은 너를 보며 소짱을 떠올리지만. 그래도 괜찮은 거 같아. 이제는 그게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아. 엄마가 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사실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눈물이 흐르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리움은 때로 기쁨에 닿아 있잖니. 우리 가족이 함께였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래.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게 이제는 너무 애틋하고⋯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니까.
그녀는 눈을 감고 다짐을 되새긴다. 괜찮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도 아마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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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유독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애매하게 내리는 눈과 애매하게 추운 날씨. 그중에서도 가장 애매한 건 제 둘째 아들의 표정이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해주지 않는 게 그녀로서는 의아했다. 전에 비하면 장난도 가끔 치고 편해진 것 같던데 아직은 좀 벽이 있나. 아니면 경기를 앞두고 긴장해서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며칠 뒤에 인생 최초로 주장 타이틀을 달고 코트에 설 예정이었다. 다행히도 윈터컵은 도쿄에서 열렸다. 저번처럼 히로시마까지 가지 않아도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정작 료타에게 의견을 물으니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기에 안나와 함께 경기를 보러 간다는 계획은 없던 일로 했지만.
안나는 종종 주장 타이틀을 단 제 오빠를 놀렸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역시 주장!’하고 깔깔거렸고 그럼 료타는 꼭 약속이라도 한 듯 눈썹을 잔뜩 치켜올렸다. 그 만담이 제가 보기에도 우스웠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식탁 위에 익숙한 종이쪽지가 또 놓여 있는 걸 봤을 때는 조금 의아했다. 편지로 얘기할 만한 내용이 있었나. 안나는 전날 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자고 오기로 한지라 집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인가 싶기도 했다. 처음에 받아봤을 땐 꽤 당황스러웠는데 두 번째가 되니 좀 귀엽게 느껴졌다.
펼쳐보니 내용은 저번보다 훨씬 짧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면 의논드릴 게 있어요.’. 이걸 굳이?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편지지에 뭘 썼다가 박박 지운 흔적이 한가득했다. 아. 편지로 말하기 좀 어려운 내용이었나보다. 그것마저 귀엽다는 생각에 카오루는 풋 하고 웃었다. 아마 장래에 대한 이야기려나. 설마 이렇게 써 놓고 다른 사고를 친 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 좀 오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료타의 입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던 거다. 그녀는 간만에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료타는 열심이었다. 장학 재단이 있다. 감독님께 여쭤봤는데 추천서를 써주실 수 있다고 했다. 경쟁률이 워낙 높아서 사실 안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내년 상황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기회가 온다면⋯ 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는 료타 앞에서 카오루는, 그가 보는 풍경을 응원하고 싶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얄팍한 다짐이었는지 깨닫는다. 미국이라고. 그 먼 곳을. 무려 2년이나. 심지어 일이 잘 풀리면 아예 그곳에서 선수가 되고 싶다는 거잖아.
미국이 농구의 본고장인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걸 어떻게 모를까. 바로 그 이유로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농구를 접했는데. 그녀는 미군 장병들이 오키나와에 바글바글 모여 있던 시절을 직접 겪은 사람이다. 미군 기지에서 일했던 남편은 말할 것도 없다. 료타는 워낙 어릴 때였기에 그런 것까지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그녀에게 미국은 마냥 먼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식을 보내고 싶을 만큼 정다운 곳도 아니었고. 그녀는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마 자식들에게 밝힐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괜찮아졌는데. 정말 이제서야 겨우 제 자식이 손에 잡히는 거 같은데. 앞으로도 지금만 같으면 좋겠다 생각한 게 그렇게 큰 꿈이었나. 얕게 뿌리 내렸던 안도가 뭘 기대했냐는 듯 이내 바스러진다. 저를 놔주지 않는 도돌이표로 돌아오고 만다. 짙은 바닷내음 속으로 한없이 처박히는 기분에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힘겹게 입을 열어 겨우 한 문장만을 뱉었다. 엄마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좀 줘.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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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바다에 서 있는 스스로가 지겹다. 밀물이 밀려오고 다시 썰물이 지는 저 규칙적인 리듬이 싫다. 이제 좀 알 것 같으면 도로 쓸어가고, 이제 좀 정리가 됐다 싶으면 다시 휩쓸어 버린다. 모처럼 예쁜 모래성을 쌓았는데 다시.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평평한 모래밭이 눈앞에 드러난다. 가끔은 제가 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매번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게 현실이 맞나? 여기보다 더 분명하고 공고한 현실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료타와 안나를 생각해서라도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는데. 부모로서의 저는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이곳의 바다는 똑같은 바다여도 오키나와의 그것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조금 더 흐리고 스산하게 굴러가는 냄새가. 오키나와는 겨울이어도 이만큼 매서운 바람이 불지 않는다. 살을 에는 겨울의 바닷바람이 그녀는 차라리 반갑다. 바람 소리가 거세서 그녀의 울음소리 같은 건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그녀는 내장을 쏟아내듯 운다. 아니, 고함을 내지른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화가 나고 서러울까. 자신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는 이 순간 그녀에게 미야기라는 무게를 쥐여 주고 너무 빨리 떠난 이를 떠올린다. 소타를 잃은 건 그녀의 책임이다. 그녀가 제대로 된 어머니이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은. 카오루는 가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게 위험한 일 하지 말지. 도와주지도 말지. 모두에게 다정해서 저를 혼자 둘 바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더라도 지금 옆에 있어 주지⋯ 이럴 때는 유독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망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다.
속을 게워 내듯 울고 나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이제 와서 우습다. 그녀는 앞으로의 제 미래를 알 것 같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이곳에 와서 울게 될 것이다. 바다가 남아있는 한. 그 순간의 감정에는 마땅한 이름이 붙지 않는다. 슬퍼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라, 매주 분리수거 쓰레기를 비우듯 그녀에게는 주기적으로 토해내야 하는 아우성이 있을 뿐이다. 자식들이 발을 내디뎌 앞으로 나아갈 때 날개를 달고 날아갈 때 그녀는 어김없이 미야기의 뿌리로 되돌아올 테니까⋯⋯.
그날 밤 그녀는 료타에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혹시 엄마가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하라고.
료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며.
아무래도 그녀가 도와줄 건 없는 듯했다.
中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한다. 소타를 잃어버리고 십 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료타를 배웅하며 그녀는 그 속담을 떠올렸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간다. 영원히 초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대학에 간다. 이런 순간이 처음도 아니건만 공항에서 맞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감회가 남달랐다. 안나는 료타가 기어이 미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토라져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마다 말없이 숟가락을 툭 놓고 심술부리길 며칠. 하루는 제 분을 못 이겨 화를 내기도 했다. 무슨 말끝에, 그래 오빠 혼자 미국 가서 아주 잘 먹고 잘살라고 소리를 지르곤 이내 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 너머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식탁에 홀로 남은 료타는 그녀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날 밤 머쓱한 얼굴로 안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둘째의 모습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 이렇게들 컸을까. 어차피 떼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럴 나이도 지난 걸 아는지 한참 전에 눈물을 그친 안나도, 그런데도 먼저 문 앞에 서서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는 료타도. 감개무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그녀보다는 씩씩하게 잘 받아들이는 것 같으니까. 할 말을 제때 하고 흘려보낼 걸 제때 흘려보내는 건 어쩌면 어른인 그녀보다 아이들이 더 잘하는지도 몰랐다.
사실은 공항 출국장에서 손을 흔들면서도 실감이 안 났다. 도로 차를 몰고 한참을 운전해 온 다음 맨션의 층계를 올라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두 아들이 다 집에 없구나. 그 순간 넘어지지 않고 버틴 건 뒤에 안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없으니까 벌써 조용하다. 그치 엄마. 카오루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조용하네⋯ 안나는 어디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 오더니 식탁 위에 턱 하니 올려뒀다. 오빠가 테이프 잔뜩 두고 갔어. 이거라도 틀까? 그녀는 그러자고 했다.
테이프에 녹음된 건 대부분이 외국곡이었다. 밴드 사운드가 가미되어 리듬감 있는 노래들이 그녀에게 익숙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오키나와에서 보고들은 게 적지 않았다. Purple Rain, Purple Rain하고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것이 아리송해 그녀는 안나에게 물었다. 요즘은 이렇게 끈적한 게 유행이야? 안나는 에- 하고 볼멘소리를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난 이런 거 안 들어. 이건 다 작은오빠 취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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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한동안 그 테이프들을 자주 틀었다. 그러지 않으면 집이 너무 조용했다. 안나도 고등학생이 되며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료타가 전화를 걸기로 약속한 요일에는 어김없이 일찍 와 있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아 응, 응 그럼, 너도 어디 아픈 데 없지? 하고 저번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듣다 손을 척 내밀었다. 잠시만. 안나 바꿔줄게. 그러면 꼭 어, 바보 오빠, 그러엄, 나는 잘 지내지, 하고 시큰둥한 대답을 늘어놓는 것이다. 제 오빠가 그랬듯 전화선을 손으로 배배 꼬아가며. 사춘기가 올 법도 한데 늘 느긋하고 또 조금은 엉뚱한 것이 안나는 제 아빠를 닮은 데가 있었다.
서로의 일상을 편지로 쓰는 일은 모자가 둘 다 서툴렀다. 아니, 모자지간이라 서툰 건지도 몰랐다. 료타의 편지는 늘 안부 인사에 가까웠다. 저는 잘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마 그녀의 편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작 그녀는 무언가를 썼다가 박박 지운 흔적에서 료타의 안부를 더 많이 읽곤 했다. 한편 안나는 가끔 제 몫의 편지를 따로 받았다. 남매간에 무슨 비밀 대화가 그리 오가는지. 안나가 제 방에 콕 박혀 답장을 쓸 때면 카오루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 내용이 궁금할 때가 많았으나 안나는 매번 제가 쓴 편지를 야무지게 풀칠해서 식탁 위에 내놓았다. 제 자식이지만 그럴 땐 참 빈틈이 없었다.
세월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흘러갔다. 제가 약속한 기한 2년을 다 채우던 그해 료타는 기어이 NCAA 대학 스카우트의 눈에 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프렙 스쿨은 끝이라고. 지원도 더 탄탄하게 받을 수 있을 거라며 전화로 소식을 전한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게 오랫동안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일일이 털어놓지 않았을 뿐 분명 그만 아는 고됨이 있었겠지. 지독했겠지. 이방인의 땅에 홀로 살며 뭔가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다년간의 편지를 통해 믿고 안심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료타는 소타의 몫까지 짊어지고 버겁게 살지 않았다. 정확히 미야기 료타라는 제 이름만을 등에 지고 선 아들에게 그녀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이미 그는 제 품을 떠나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료타가 미국 생활의 연장을 알려올 무렵 안나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해 잔뜩 기뻐하고 있었다. 장학금에 기숙사까지 제공되는 곳이었다. 저라도 보탬이 되어드려야지요-. 말끝을 길게 늘이며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키득거리는 것이 안나다웠다. 카오루는 후후 웃으며 안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번엔 그녀도 편안하게 그늘 없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 고생했어. 너 애쓴 거 엄마도 알아.
그 말에 안나는 환하게 웃었다. 응. 엄마. 한 치의 티끌도 없는 기쁨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게 너무 눈이 부셨던지 안나의 표정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와앙- 하고 우는 것이 어릴 적과 똑같았다. 그 모습이 카오루는 그저 애틋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안나의 얼굴에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엄마. 나 정말⋯ 정말로⋯⋯. 그 뒷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제 막내딸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안나. 다 네 힘으로 이룬 거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보탬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그건 진심이었다. 그녀는 안나가 저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휩쓸리기만 하는 인생. 기릴 사람만 잔뜩인 인생. 매일 같은 곳에 앉아 떠난 이들을 떠올리고 이제는 거의 창고가 되어가는 료타의 방을 보며 허물어지는 저를 다잡는 일상. 이런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는 물려줄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녀는 제 자식들이 모두 원하는 게 뚜렷한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제 길인지 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녀는 그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 그녀가 아는 건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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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동안 빈자리에 시달렸다. 안나까지 짐을 싸서 나가자 집은 무섭도록 고요해졌다. 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집에 드리운 장막을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다 메울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하염없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낮엔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집에만 돌아오면 그랬다.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말없이 앉아 있노라면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파도 소리 덕분에 그녀는 적어도 새벽만큼은 제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료타가 보내는 편지에 부쩍 걱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 혼자만의 생각인지, 집에만 계시지 말고 가끔은 바람 쐬러도 다니시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료짱. 무슨 소리니. 엄마 밖에서 일하잖아. 가끔은 상가 사람들이랑 수다도 떨고 그러는데. 그녀는 전화로 가볍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아들은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끔 화가 났다. 왜? 순수하게 저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왜 화가 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주말이 되면 그녀는 해변에 종일 앉아 있었다. 달리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었으니까. 누가 봤다면 저 양반은 참 한가한가보다 했을 것이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녀는 이미 문장을 외울 만큼 여러 번 읽은 편지를 다시 읽다,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다, 또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느꼈다. 바람이 불다가 슬며시 멎는다. 다시 부는가 싶으면 또 이내 멈춘다. 거기에 얼굴을 내맡기고 눈을 감으면 가끔은 잊고 있던 옛 생각이 났다. 료타도 소타도 태어나기 한참 전 그녀의 학창 시절이라든가. 처음으로 먹었던 블루씰 아이스크림의 맛이라든가. 어릴 적 양친의 손을 붙잡고 종종 들렀던 소바 가게. 그곳에서 남편과 했던 첫 데이트 같은 것들이.
그런 게 이제 와서 애틋하냐고 물으면 글쎄. 그럴싸하게 그리워할 만큼의 감정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리움에도 자격이 있다면 저는 자격 미달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 묻고 살았으니까. 이렇게 금방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꺼내어 닦아야 했는데. 정작 그녀가 살면서 매일 되새겼던 순간들은, 이쯤 했으면 까무러쳐 죽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저는 여전히 살아 있나 싶은 날들이었다. 마을의 친한 언니가 그녀를 다급하게 찾으며 카오루 짱,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글쎄 네 남편이⋯ 하고 울먹였던 날. 혹은 영문도 모르고 소타를 영원히 잃어버렸던 날⋯.
가끔 제 삶이 아프다고는 생각했다. 원망할 사람도 없어서 더 그랬다. 모든 화가 반드시 대상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어떤 날은 화가 나서 울었고 어떤 날은 슬퍼서 악을 썼다. 그리고 어느 날엔, 적응했다. 그녀가 떠난 이의 흔적만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휘청이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 옷자락을 붙들었다. 고사리 같은 손을 꽉 쥐고, 그것밖에는 붙들 게 없다는 듯 저를 말갛게 올려다보던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떠난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아프도록 잘 알았다.
옛 추억도 아픈 기억도 모두 지나 보낸 지 오래다. 하나하나 다 종이배에 띄워 보낸 끝에 그녀는 이곳에 홀로 남았다. 그게 쓸쓸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서도 낡은 자기연민을 버릴 수 없어서.
바다를 앞에 두고 그녀는 조금씩 규칙적으로 울었다. 그렇게 자신을 비워 내는 시간이 그녀에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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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의 NCAA 토너먼트와 대학교의 첫 학기를 지나 어느새 7월이었다. 료타는 2년 만에 일본에 돌아왔다. 잘 있는 거 확인했으면 됐다고, 집에 못 오는 걸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고 답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그를 마중했다. 스물이 넘으며 아가씨 태가 나기 시작한 안나가 옆에서 함께 팔을 크게 흔들었다. 오빠!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본 건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까무잡잡하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옆에서 안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빠 좀 이상해졌다. 카오루는 그 말에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생일 주인공과 함께 생일 파티할 수 있겠네. 그녀는 간만에 다 같이 케이크를 자를 생각에 웃으며 공항 밖으로 차를 몰았다. 정작 뒷좌석에 앉은 료타와 안나는 저들끼리 투닥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 오빠 징그러워. 야 너는. 2년 만에 만났는데 첫 마디가 징그럽다가 뭐냐. 그치만 이상한 걸 어떡해. 좀 떨어져 봐. 자리 좁아. 안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밀자 료타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카오루는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차는 몸집이 더 커진 듯한 료타와 2년 새에 키가 조금 더 자란 안나를 나란히 앉히기엔 비좁았다.
이참에 차를 바꿀까. 그녀가 중얼거리자 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것이 뚝 멈췄다. 엄마 진짜? 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물었다. 진짜 차 바꾸려고? 예상 밖의 적극적인 반응에 그녀가 더 얼떨떨했다. 바꿀 수도 있지. 안 그래도 슬슬 여기저기가 말썽이었어. 오래되기도 했고. 아니, 우리는 엄마가 일부러 안 바꾸나 했지⋯. 안나가 묘하게 말을 흐리며 료타를 슬쩍 보자 그가 대신 대답했다. 아버지가 운전하시던 차잖아요. 그래서. 그 말에 카오루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런 거. 그냥 타다 보니 오래 탄 거지.
그녀는 어쩐지 바깥 공기가 쐬고 싶어져 창문을 조금 열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창가 안으로 밀려들며 숨에 습기를 불어넣었다. 덜그럭거리는 차창. 한때는 남편이 앉았고 이제는 그녀가 앉은 운전석의 시트는 진작에 천이 다 해진 데다 얼룩도 잔뜩이었다. 낡디낡은 차. 떠올리자면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나 크게 의식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자식을 뒤에 태우고 장장 십여 년을 달리다 보면 알게 되는 것도 있었다. 차 정도는, 보내줘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은 떠났고 추억은 바랬으나 그 남은 자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그러니 좀 더 즐겁게 손을 흔들어도 될 것이다. 잘 가. 그동안 고생했어. 안녕, 하고.
요즘은 차 얼마나 할까. 알아본 적이 없는데. 카오루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료타가 끼어들었다. 급한 거 아니면 몇 년만 더 기다려봐요. 이 차 아직은 더 굴러가지 않을까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년 뒤에 무슨 일이 있는데? 료타는 몸을 뒤로 슥 빼더니 귓가를 미미하게 붉히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돈을 벌 거니까. 잠시 정적.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안나였다. 대박. 엄마! 오빠가 엄마 차 사줄 건가 봐! 혹시 나는 뭐 없어? 안나가 키득거리며 료타를 툭 건드리자 한쪽 눈썹을 잔뜩 치켜올린 그가 손을 휘 내저었다. 까불지 또.
한편 카오루 역시 차마 티는 못 냈으나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한때 제가 사준 바이크로 그렇게 속을 썩였던 아들이 이제는 저에게 차를 사주겠다고 이야기하니까. 좋네. 그녀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럼 엄마 기대하고 있을게. 료짱이 사준다고 했으니까. 웃으며 백미러로 그를 슬쩍 돌아보는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그 표정에 더더욱 머쓱해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2년 전과 생김새가 조금 달라졌을 뿐 변함없는 그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그것에 안도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2년 뒤에 거짓말같이 NBA 하부 리그 입성에 성공한 료타가 정말로 그녀의 손을 끌고 자동차 매장에 터벅터벅 향할 줄은 몰랐던 거다.
下
기껏해야 동네에서 탈 텐데 이렇게 클 필요 없지 않아? 게다가 너무 비싸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흐리는 그녀의 옆에서 료타는 한결같았다. 별로 안 큰데요. 안나도 타고 저도 가끔 타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설마 이번에도 해치백으로 사실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이전 차와 비슷한 스타일로 고르려 했기 때문이다. 료타가 탄다고 해봤자 일 년에 한 번도 올까 말까고 안나만 태우기엔 이전에 타던 것도 면적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차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제 차 불편하다고 하셔서 제가 그건 양보했어요. 근데 세단은 양보 못 해요. 안나도 이번엔 제 편이 아니었다. 오빠 이제 돈 번다잖아. 차 근사하고 멋진데 왜!
그래서 그녀의 몫으로 나온 게 짙은 푸른색의 중형 세단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료타와 눈을 반짝이는 안나를 앞에 두고 그녀는 차체만 만지작거렸다. 차갑게 내려앉은 겨울 공기 속에서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것이, 너무 오래되어 중고로 팔지도 못하고 폐차시킨 예전 차와는 많이 달랐다. 그게 조금 설레었다. 그리고 신기했다. 제가 아직도 새로운 것에 들뜨는구나. 설레는 일이 있구나. 차⋯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차야말로 변함없이 그녀 옆에 있어 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매끈한 광택을 입고 새로이 등장한 친구가 새삼스레 반가웠다. 그래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네. 차 예쁘다. 후후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료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광이 나는 새 차를 몰고 그녀가 일하는 식당으로 출근하자 인근 상가 전체가 술렁였다. 새 란도셀을 자랑하는 봄학기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여성 상인회 사람들까지 찾아와 카오루의 식당 문을 두드렸다. 카오루 짱. 차 바꿨더라? 그녀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망설이다 솔직하고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아들이 바꿔줬어요. 일단 그렇게 말하고 나니 아들이 NBA 언저리에 이름을 올린 농구 선수라는 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그간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다들 조심스러워했을 뿐, 홀로 식당을 운영하며 어딘가 말 걸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에게 다들 흥미가 있었던 탓이었다.
아들이 그 정도로 돈을 잘 벌면 카오루 짱 식당 좀 설렁설렁해도 되지 않아? 맞아. 잠깐 휴업한다고 걸어놓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래. 그동안 카오루 짱 여름에도 쉰 적 없잖아. 하부 리그라서 NBA 유명 선수들처럼 돈을 잘 버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가게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상인회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여름휴가 안 가? 아뇨. 여름에는⋯.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곧 다물었다. 여름에는, 소타와 료타의 생일이 있다. 그녀는 지난 몇 년간 두 아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다시 또 해변에 들르곤 했다. 어쩐지 바다를 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바다 너머에서 몸 건강히 살고 있을 아들 한 명과 저는 모르는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 아들 한 명을 떠올릴 때는.
여름에는⋯ 바다에 가야 해서요. 그 문장은 카오루 자신이 듣기에도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 건너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카오루 상. 일본에선 어딜 가도 근교에 바다가 있어. 아, 네. 그건 그러네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 여기서 장사한 지 거진 십 년인데 카오루 상 쉬는 걸 못 본 거 같아서 그래. 기껏 차도 번듯하게 뽑았겠다. 카나가와에서만 몰고 다니기는 너무 아깝지 않아? 그 말에 상인회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격렬히 끄덕였다. 맞아. 차가 아까워. 카오루 상 젊은데 좀 쉬엄쉬엄하고 살아야지. 꼭 만담의 한 장면 같은 풍경에 카오루는 얼떨떨하게 같이 끄덕였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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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는 가족끼리도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럴 형편이 못 되었고, 어느 시점부턴 그럴 분위기가 못 되었다. 7월이 깊어지면 집 전체가 깊게 침잠했다가 가을 단풍이 물들 때쯤 뭍으로 올라오곤 했으니까. 하물며 저 혼자서 카나가와를 벗어나 본 적은⋯. 어라. 떠올려보니 있었다. 료타의 경기를 보러 갔을 때. 본인에게도 말하지 않고 히로시마까지 다녀온 적이. 그러고 보면 오키나와를 떠나 여기에 뿌리 내린 것도 그녀 혼자 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제가 결정했던 일들인데 이렇게 생각하니 좀 낯설다. 생각보다 내가 거침이 없는 편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는 이 여름휴가를 온전히 혼자서 쓰기로 마음먹었다. 안나가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하면 자기도 같이 갈 수 있다고 했고 료타도 내심 걱정을 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 홀로 떠나고 싶었다. 멋진 새 차도 생겼겠다 아주 멀리멀리 가보고 싶었다. 자식들을 뒤에 태운 보호자로서가 아니라 미야기 카오루라는 제 이름의 무게만을 싣고. 그녀로서는 드물게 자기 의견을 피력한 것이었다. 남매가 어렸을 적 그녀는 결코 유한 성정이 아니었다. 남편이 없는 만큼 제가 더 엄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혼낼 때도 숱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에서 그녀의 주장을 내세워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여행은 혼자가 좋다는 건, 자식들도 처음 들어보는 어머니의 취향이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여행지가 어디였는지 밝혔을 때는 한 번 더 파란이 일었다. 아키타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료타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카나가와에서 아키타가 차로 갈 수 있는 거리예요? 그녀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중간중간에 좀 쉬면 돼. 그보다 더 먼 거리도 운전해 봤어. 말 없는 침묵과 앓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제가 차를 바꿔 준 게 정말 잘한 일이 맞는지 한 번 더 되짚어 보는 게 분명했다. 전 엄마가 교토나 오사카나 뭐 그런 곳을 더 가고 싶어 하실 줄 알았어요. 볼거리도 많고 관광지로 유명한 곳들이잖아요. 그 말에 카오루는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그녀에겐 그다지 궁금한 곳이 아니었다. 마음이 더 불편한 쪽을 고르라면 차라리 일본이었다. 물론 자식들에게 말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냥. 아키타가 가보고 싶어. 농구로 유명한 곳이라며. 소짱도 꿈꿨던 곳이니까, 겸사겸사. 그리고 아키타에 친척이 산다는 분 얘기를 들어봤는데 공기 좋고 물 좋고 맛있는 것도 많대. 그래서 거기로 가보려고. 이미 마음을 다 정한 듯한 말에 료타는 한참 말이 없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솔직히 걱정은 되는데⋯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소식 전해주시고요. 카오루는 문득 장난을 걸고 싶은 마음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료짱 다 컸네. 엄마가 너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왜 말도 안 하고 나가냐고 화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녀가 그립다는 듯 웃자 황당하다는 듯한 헛웃음이 돌아왔다. 그게 대체 언제 적이에요. 저 곧 있으면 스물넷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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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에 가보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다. 관련해서 이것저것 알려주신 건 상인회의 어르신이었으나 그녀의 마음속엔 처음부터 결정이 나 있었다. 여름휴가,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자마자 그녀는 아키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료타와 소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코트에 섰던 날의 기억이 여전히 그녀 안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만나보고 싶어 했던 동경의 대상. 최강 산왕. 지치지도 않고 사 모으던 월간 바스켓. 형제의 교차점이 된 곳을 한번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도 바다가 있으니까. 일본은 어딜 가나 근교에 바다가 있다는 사장님의 말처럼.
그녀도 이번엔 돈을 아껴야 한다거나 서둘러 가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8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라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 가게는 아예 잠정 휴업을 걸어뒀다. 달리 할 일도 없었고. 그녀는 차를 한참 몰다가 중턱에 로손 편의점이 보이면 멈춰서 생수 한 병과 도시락을 집었고, 길가에 꽃이 예쁘게 피어 있으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사진을 찍었다. 지난 겨울 료타가 차와 함께 쥐여 준 새 카메라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갈 길이 멀어 하루는 휴게소에서 차박을 했다. 어둠 속에서 빼곡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그녀는 긴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밤하늘이었다.
아키타에 도착해 소개받은 여관에 짐을 풀고 나자 피곤이 밀려왔다. 털썩. 그녀는 다른 생각 없이 곧장 드러누웠다. 단정하게 개어진 솜이불 위에 상체를 누이고 천장을 바라보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해방감. 이런 순수한 즐거움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제가 그 먼 거리를 운전해 기어코 여기에 왔다는 게 우스웠고 돌아가는 길에 똑같은 거리를 또 운전해야 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돌아가서 이웃 상가 분들한테 말씀드리면 까무러치게 놀라실 게 분명했다. 거기를 혼자 다녀왔다고? 우린 당연히 친구든 자식이든 데려갈 줄 알았지. 큰일 나려고 정말!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오는 내내 실감했다. 가야 할 곳에 가고 있다. 그리고 혼자 와서 다행이다. 운전 길에 종종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알 수 없는 감상에 휩싸였다. 북쪽으로 향하며 날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카나가와와는 또 다르게 여름인데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시야에 막힘이 없이 산과 들판만이 계속 펼쳐졌고 그녀는 점점 제가 안고 있던 생각들을 잊어버렸다. 그게 좋았다. 제가 지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가 버리는 시원함이. 그럼에도 미야기 카오루의 본질은 건드리지 않는 게, 그녀 자신도 모르던 고향에 향하는 기분이어서.
기껏 이 먼 곳까지 왔으니 자식들에게 자랑할 만한 여행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역시 처음엔, 학교를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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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왕공고의 이름이 큼직하게 새겨진 비석을 지나 그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체육관으로 향했다. 여름을 맞아 학교 체육관에서는 자유 연습이 한창이었다. 인터하이 준비인가. 그녀도 한때는 고등학교 농구 선수를 자식으로 둔 학부모였기에 계절별 대회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도 공이 부딪치는 소리와 밧슈가 코트 바닥에 맞닿는 마찰음이 잔뜩 울렸다. 정겹네. 그녀는 후후 소리 내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신발장에는 학생들의 신발이, 옆의 수납장에는 그간 산왕이 온갖 대회에서 휩쓸었던 트로피가 가득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하자 구경을 온 사람들이 간간이 서 있었다. 그녀는 들고 온 가방을 관중석 의자 위에 내려놓고 자연스레 난간을 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코트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유니폼을 맞춰 입은 어린 학생들이 각자의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에선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조금 더 어린 후배들에게 드리블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3점슛 라인에 서서 공을 던지는 연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 표정들이 모두 진지했다. 이 여름이 제 인생에서 무엇을 바꾸어 놓을지 그 무게를 다 안다는 듯.
그건 그녀도 잘 아는 풍경이었다. 그날의 경기에서 보았던 새하얗고 우직한 유니폼들. 경기장을 가득 메우던 응원의 함성. 쉴 새 없이 울리는 밧슈 소리. 허리를 더 숙여야지. 이렇게. 공이 림 위를 아슬아슬하게 맴돌다 골대 안으로 들어갈 때 모두가 들이키는 숨소리. 스틸. 속공! 저보다 배는 더 커 보이는 두 친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파고들며 휘날리던 새빨간 유니폼. 일련의 이미지가 조각조각 떠오르며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 더 자주 보러 올걸.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료타의 경기를 더 많이 보러 갈걸. 부끄러워하더라도 보러 가겠다고 할 걸.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들의 경기를 보러 다닌 게 너무 옛일이라 그녀 자신도 잊고 있었다. 분명 처음엔 자식을 응원하는 엄마의 마음가짐으로 그 자리에 앉지만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몰입해 그곳에 선 모두를 응원하게 된다는 걸. 그녀 또한 부모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었기에 그 뜨거운 열기에 취해서 가슴이 일렁일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게 아쉬웠다. 자식이 커가는 과정을 제대로 봐 주지 못한 것에 더해, 그녀의 인생에서도 뜨거울 수 있었던 순간을 놓친 것이.
심지어 료타는 지금 미국에 있다. 히로시마에서 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카나가와에서 차를 몰고 갈 수는 있어도 미국은 그렇게 갈 수 없었다. 그럼 미국에서 료타가 하는 경기는 보기 힘들겠구나. 그건 좀⋯ 아쉽네. 그녀는 때늦은 섭섭함을 한켠에 품은 채 카메라를 들고 체육관의 이곳저곳을 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카메라. 캠코더. 비디오⋯ 혹시 NBA 경기도 비디오를 구할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있겠지. 농구의 나라 아닌가. 분명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고 있을 것이다. 료타에게 보내달라고 하면 좀 이상한가.
학생들의 연습이 끝난 후 교정을 둘러보고 멀리 교외로 향하면서도 그녀는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돌고 돌아 먼 타지에서 마주한,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진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경기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수문(水門)이 되어 준 그날의 경기를. 그녀가 기어이 소리를 내지르게 했던 그 열기를, 울림을, 다시 겪고 싶었다.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에 카오루는 차를 도로 한쪽에 멈춰 세웠다. 오후의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며 공기를 데웠다. 피할 수 없는 온기에 목이 메었다.
농구는 언제나 자식들의 꿈이었다. 소타의 꿈이고 료타의 꿈이었지 한 번도 그녀 자신의 꿈인 적은 없었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봤을 때 그녀는 빈말로도 농구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소타를 잃은 후 료타가 내내 쥐고 있던 농구공을 집어던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나? 제가 의지할 건 농구밖에 없었다는 문장에서 그 농구를 원망한 적이 정말로 없었던가? 오랜 시간 동안 그녀에게 농구란 저와 둘째 사이에 그어진 장벽의 이름이었다. 둘째가 달고 날아간 날개의 이름이었고, 그녀가 메워줄 수 없던 부족함의 증거였다.
그랬던 게 이제 와서 눈이 부셨다. 그녀는 운전석 시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숨을 고른다. 소타의 물건을 모두 모아둔 방에서 홀로 돌려보던 비디오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재생되었다. 눈 부신 햇살 아래서 공을 튀기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얼굴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한 손에 아이스바를 들고 작은오빠 힘내! 를 외치던 어린 안나의 뒷모습이. 그걸 찍으며 얼마나 웃었고 또 눈부시게 행복했던지⋯.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럴 일도 아닌데 눈물이 솟는다. 오랜만에 흘리는 물방울이 들판의 바람을 타고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아직도 제 안에 녹아내릴 게 남아 있었나. 아직도 깨달을 게 있구나.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이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풍경도 사랑했다. 그래서 농구도 사랑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거닐던 풍경을 사랑했다. 그래서 바다도 사랑했다. 그 바다가 비록 너무 소중한 아들을 데려갔어도, 그녀에게는, 없어지지 않는 사랑이 있었다.
이번에도 둘째가 그녀를 울렸다. 그래도 이번엔 깨어지듯 울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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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에도 바다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에선 어딜 가도 근교에 바다가 있으니까. 그 말이 곱씹을수록 우스워 그녀는 자꾸 웃음을 터뜨렸다. 오후의 햇살을 다 만끽한 다음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전망대였다. 쏴아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파도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워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몰이 잘 보인다는 전망대 옆에는 작은 매점이 있었다. 지역 명물이라는 구운 오징어가 꼬치에 매달려 매대에서 대롱대롱 돌아가고 있었다. 갓 구운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마침 점심을 가볍게 넘긴 탓에 그 유혹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큼직큼직하게 썰린 구운 오징어 한 팩을 받아 들었다.
전망대 앞에 놓인 나무 벤치도 집 앞 해변에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앞에 앉자마자 그녀는 넋을 잃고 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였다. 먹먹함에 말문이 막힐 만큼. 이제 막 시작된 일몰이 수면 위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조각처럼 일렁이는 파도와 노을빛에 카오루는 멍하니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계속해서 눌렀다. 바다. 이것도 바다구나. 여름만 되면 그녀를 붙들었던 바다. 평생에 걸쳐 그녀를 부르는 바다. 언제고 돌아오는 도돌이표. 그녀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녀를 놔주지 않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료짱. 안나. 엄마 여기 오길 정말 잘했어. 정말로. 소짱 이것 봐. 너무 아름답지⋯⋯.
다음 날 그녀는 마을 내에 현상소를 들러 필름 카메라의 사진을 모두 인화했다. 필름 카메라는 처음 써 보는 거라 잘 됐을지 모르겠네요. 옛날에 캠코더는 써봤는데 그게 십 년도 더 전이라. 그녀가 주저하며 카메라를 내밀자 현상소 사장님은 인상 좋게 웃었다. 잘 됐을 겁니다. 그 시절에 캠코더를 써보셨으면 기계를 잘 다루시는 거 아닐까요.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가요. 말씀 감사합니다. 혹시 이 근처에 편지지를 파는 곳이 있을까요? 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쭉 가시다 보면 잡화점이 있습니다. 거기서 아마 팔 거예요. 사진 인화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사이에 다녀오시죠. 사진은 봉투에 담아두겠습니다.
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쭉. 동네가 원체 한적하고 작아서 상점가가 다 일직선 도로에 모여 있었다. 건물 벽은 물론이요 전봇대와 주유소 벽에까지 농구공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다시 봐도 낯설었다. 농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산왕을 거쳐 지금은 일본 농구의 대표 주자로 활약 중인 선수들의 이름이 마을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포스터도 잔뜩이었다. 료타도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면 저런 포스터가 생길까. 즐거운 상상 끝에 그녀는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새하얀 유니폼이 크기 별로 진열된 가운데 잡다한 문구류가 놓여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신문을 읽던 중에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카오루를 안경 너머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편지지도 팔까요. 너무⋯ 요란하지 않은 걸로 사고 싶은데요.
료짱.
시합 고생했어. 이번엔 서머 리그라고 했던가.
무리하지 않게 조심하렴. 언제나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엄마는 지금 아키타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좋은 곳이야. 조용하고. 오길 잘했다 싶어.
선물해 준 카메라는 잘 썼어. 덕분에 사진을 많이 남겼어. 예쁘게 잘 나온 게 있어서 너한테도 한 장 보내.
예전에 네가, 농구를 계속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랬었지.
어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라.
엄마도 고마워. 농구 그만두지 않아 줘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버텨줘서.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엄마한테도 가끔 버팀목이 돼.
언제나 그랬어.
스물네 살 생일, 축하해.
또 전화로 이야기하자.
p.s.
평소에 네가 지내는 풍경이 궁금한데, 혹시 엄마한테도 사진을 보내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