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장벽, 플랫폼을 배반하기

어떻게 하면 인터넷 플랫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주제에 대한 한국어 책을, 그것도 실천에 대한 책은 만나기가 참 어려운데 가뭄의 비처럼 이 책을 알게 돼서 재밌게 읽었다.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혼자 썼던 메모.

  • 코딩이라는 작업 자체가 일종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모든 코드 조각을 하나의 목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한다는 점에서.
  • 프로그래머와 코더를 구분짓는 것은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이다. 사람들은 정말로 그 둘이 구분된다고 믿는 걸까?
  • 인터랙션 디자인이라는 통제된 설정 → 이걸 부정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네이티브 앱 개발자여서 인터랙션 디자인을 너무 숨쉬듯이 당연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게, 사용자를 위한 편의라고는 하지만 이거 굉장한 통제구나. 나는 그간 인터랙션 디자인을 철저하게 맞추는 걸 나의 직무 능력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 나만의 소셜 네트워크 운영. 유저들에게 맞춤형 온보딩을 제공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와 저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결국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익명 대중 SNS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소규모 커뮤니티를 잘 굴리는 방법론을 동일하게 소셜 플랫폼에 적용하면 된다는 게 신기했다. 근데 그렇다면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닐 수 있는데..
  • 162페이지의 규모 확장에 대하여 파트가 진짜 웃겼다. 아.. 개발자는 그런 거 물어봐야 된다고 교육받은 사람이라구요. 어쩔 수가 없어.
  • 내가 SNS 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기능이 들어가길 바라는지. 어떤 구조이길 바라는지.

복안인

1월에 읽은 소설. 와요와요 섬이라는 가상의 원시 문명이 등장하고, 그 섬에서 나고자란 한 소년이 바다를 표류한 끝에 현대 문명의 대만에서 어느 여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원시 문명과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서정적이라 좋았는데 책의 약 8할 지점에서 생각지 못한 드리프트가 등장한다. 전체 감상을 해칠 정도는 아니나 서정적인 문장과 별개로 작가가 세워둔 목표는 따로 있었구나 싶었다.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보를 얻고서야 얼추 이해가 됐고,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상투적이라 실망했다는 평도 있던데 나는 딱히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현대 배경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을 처음 펼치는 사람이라면 우선 하루키 대신 『복안인』을 추천한다는 말이 내가 가장 동의할 수 있는 감상평이었다. 긴 글 중에선 이 블로그가 가장 도움이 됐다.

여담이지만 저 정도의 감상평을 쓰려면 얼마나 관록이 쌓여야 하는 걸까 내심 궁금해서 블로그 글을 이것저것 열어봤는데 앤 카슨의 『녹스』가 한국어로 출간될 때 희랍어와 라틴어 문구를 감수하셨다는 걸 보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일반인이 아니시네..

처음에는 신기한 채집품을 향한 호기심에 의지해 쇠잔해지는 마음을 붙잡았다. 하지만 오래도록 홀로인 사람은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이 해구만큼이나 넓고 깊어서 사람의 마음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유일하게 틈을 채울 수 있는 건 추억이다. 아트리에는 해파리가 될 순 없다는 의지로 피폐해진 몸을 지탱하며 살아남기 위해 구차하게 추억에 매달렸다. 섬을 떠나기 전날 밤의 추억으로 욕망을 풀고, 아버지와 노인들의 말을 돌이켜 바다를 이해했으며, 섬사람들의 노랫소리를 기억해 사랑을 이해했다.

앨리스는 집 안에 앉아 잿빛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바라보며 마치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의 몸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의 인생에서 지난 몇 년만큼 아름다운 시간은 없었다. 작은 요철조차 없는 매끈한 유리구슬처럼, 누런 잎 하나 없는 먼나무처럼 완벽했다. 어쩌면 너무 완벽하다는 사실이 그것이 존재해선 안 되는 유일한 이유가 됐는지도 모른다.

부락 노인들이 현지 조사차 온 이들에게 기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외로움에 겨워 추억에 파묻혀 살기 때문이지 거창한 문화 전승 따위가 아님을 하파이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열린 수도꼭지처럼 마르지 않고 이야기를 내어놓는 것은 전부 외로움 때문이었다. 하파이는 가끔 만약 자신이 논문을 쓴다면 외로움이 문화의 뿌리라는 결론을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허는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연약하고 위태로운 기억이 깨지거나, 제 비루한 기억력에 왜곡될까 두려워 감히 회상하지도 못할 만큼. 사무치게 그립지만 그 시절을 회상하다가 그 이후 기억까지 딸려 나올까 겁이 나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수도원의 비망록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를 재밌게 읽은 이후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몇 권 더 사뒀는데 그 중 하나. 한국에 번역된 건 2008년이지만 실제로 쓰인 건 1982년이라 주제 사라마구의 초기작에 속한다. 1800년대에 세워진 마프라의 수도원, 그 과정에 얽힌 여러 개인의 삶과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핵심인데 재밌게 읽은 것과 별개로 왜 이 책이 ‘주제 사라마구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린 작품’인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 왕가와 종교에 대한 풍자가 제법 신랄하긴 하다. 수도원의 설립 과정을 아주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고 있어 읽고 있으면 꼭 인부들의 지루한 노역을 내가 직접 겪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린 작품’에 이르려면 징검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걸 알려면 주제 사라마구를 연구한 논문을 읽어봐야 하는 걸까.

왕이 묻기를, 주교가 지금 나에게 한 말이 사실이냐? 내가 마프라에 수도원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하면 내 뒤를 이을 후계자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냐? 하자, 수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수도원은 반드시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종단에서 운영해야만 합니다. 그대는 어떻게 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 제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저 자신도 설명할 수가 없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폐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응답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수도원을 세우라. 그리하면 너는 곧 후손을 얻으리라. 만약 폐하께서 거절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날이 저물고 있다. 하늘에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빛이 바로 달이 뜨려는 첫 징후가 보인다. 내일이면 블리문다는 자신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눈먼 자를 위한 날이다.

지금 오는 거야? 그의 매형과 조카는 일찍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운이 좋았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떨고 있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앞으로 손을 내밀고 발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딱딱한 발바닥을 뜨거운 깜부기불에 올려서 그을리자, 뼈 속까지 스며있던 한기가 햇빛이 이슬 녹듯이 천천히 사라졌다. 만약 침대에 여자까지 누워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가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우리가 이제 블리문다를 보는 것처럼 그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은둔자가 동굴 입구로 나왔을 때, 왕비는 세 걸음을 앞으로 나서며 물었네. 한 여자가 왕비이고, 한 남자가 왕일 때, 그들이 왕비나 왕처럼 생각하지 않고 한 여자와 한 남자처럼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왕비가 은둔자에게 한 질문이었네. 은둔자는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 한 사람이 은둔자라면, 그가 은둔자처럼 생각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왕비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네. 왕비는 왕비이기를 그만두고, 왕은 왕이기를 그만두어야 하겠지. 은둔자도 동굴을 포기해야만 하겠지. 바로 그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야. 하지만 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해야겠다. 어떤 여자와 남자가 왕비도 은둔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이고 남자인가? 그들이 은둔자도 아니고 왕비도 아닌 단지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어떻게 해야 지금의 모습대로 있지 않을 수 있는가? 은둔자가 대답했네. 누구도 지금 이 순간처럼 있지 않으면서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지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 대한 거부감 뿐입니다.

황소를 모는 목동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마누엘 밀류가 대답했다. 몰라. 발타자르가 작은 돌 하나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날 수 있으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조르조 아감벤을 처음 읽어봤다. 가볍고 얇아서 아감벤 입문용으로 괜찮길 기대하며 구매했는데 마치 시리즈물에서 7권과 8권 사이에 부록으로 껴있는 7.5권을 읽은 느낌이었다. 책의 난이도가 높진 않으나 근본적으로 아감벤이 왜 이토록 바틀비에 천착하는지를 이 책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철학자들은 필경사 바틀비를 참 좋아하는 거 같다. 아니면 필경사 바틀비가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기 사상을 펼쳐보일 훌륭한 캔버스가 되어 주거나. 그게 내가 책을 읽고 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결론.

우리의 윤리적 전통은 잠재성 (능력) 문제를 자주 의지와 필연성의 용어로 환원해 회피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전통의 지배적 테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바틀비가 제 집으로 삼는 금욕적인 낙원에서는 모든 이유ratio에서 완전히 해방된 오히려 더piuttosto만 있다. 그것은 선호와 잠재성 같은 것으로서 더는 무에 대한 존재의 우위를 보증하는데 쓰이지 않고 존재와 무의 무차별 속에서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해하지 않음을 단순한 의지적 선택, 즉 저가 원한다면 (의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능력) 하지 않을 수 있음 (비능력)의 틀로 보는 게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능력은 의지에 종속되며 비 잠재성은 다시금 주체적 결단의 문제로 환원되어버릴 것이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제목에서 충분히 책의 결을 짐작할 수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급진적 선언문. 요즘 이런 책을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서점에서 우연히 펼쳐보고 책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좋아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책의 첫 장을 여는 글이 피터 싱어 비판인 것도 한몫했다. 내가 몰랐던 사유를 전해주는 책이 아니더라도 기운 북돋아주는 토템 용으로 이런 책 한 권 구비해 두는 거 나쁘지 않다.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젠더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하지만 대신, 장애를 가진 여성을 지워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도 페미니스트들과 대화할 때 많은 경우, 그들의 신체와 체현 개념에서는 장애가 고려 사항이 아니라고 느낀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해러웨이의 선언문은 사이보그를 메타포로,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주장한다.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는 픽션의 문제, 생사를 둘러싼 분투, 현대적 전쟁의 난잡성, 하나의 지도, 응축된 이미지, 젠더 없는 크리처다. 선언문은 사이보그 개념이 전제하는 장애인이라는 참조점을 지워버리면서 사이보그 정체성을 사용한다. 살아가기 위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는 장애인들이 사이보그다. 우리의 삶은 메타포가 아니다.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우분투북스에서 정기구독으로 보내주신 책. 마침 알라딘 추천 탭에도 한번 떴던 책이라 후루룩 읽었다. 막상 읽어보니 기대와는 조금 결이 달라서 (내가 기대한 것 : 실제로 낯선 사람과 소규모 커뮤니티를 만들 때 쓸 수 있는 이론과 실천 사이 지침서) 책의 포지션이 다소 애매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내용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종합선물세트처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나한텐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책이었지만.

우리가 현대 교육을 통해 익혀온 사고 습관은 비非안생적이다. 그것은 사고 대상을 객체화(물화)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추상적 연역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요구하며, ‘투명한’ 사고를 지향한다. 아렌트가 말했듯, 순수한 사유는 종종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며 결국 모든 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편집증적 이데올로기로 귀결되곤 한다. 안생적 사유 방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사고를 하나의 실천 과정으로 다루는 일일 것이다. 즉 사고가 관찰, 기억, 신체적 감각, 표현, 대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생활이 곧 창작이다”. 우리 창작자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 생활의 창작 속 자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활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죠. 그러고 나서 생활을 사고하되, 생활을 사고 대상으로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사고가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생활이 사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거치지 않은 생활은 살 만한 가치가 없고, 사고에 지나치게 몰두한 생활은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앞서 생활이 창작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젊은이들이 사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더 나은 사고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은 사실 매우 흥미로운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열린 상태로, 호기심을 통해 의식적으로 생활을 맛보는 것이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식의 대충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생활을 하나의 창작으로 삼으면 먹고 마시는 것에도 의미가 생깁니다.

메모의 순간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이미 단문으로 쓴 적이 있어서 갈음.

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과정에서의 원초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의 즐거움이란 유쾌, 쾌적, 위안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머릿속에 뿌옇게 떠다니는 다양한 상념을 종이로 옮기는 순간,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어떤 희미한 생각이 종이 위에 붙들리는 순간의 쾌감은 가장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괴로움 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 쓰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비록 그 쾌감이 일순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그 순간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쾌감은 스스로를 위한 글쓰기(일기, 메모)에도 존재하지만, 서간문 등 타인을 의식한 채로 쓰는 순간에도 존재한다.
스스로를 위한 글쓰기와 특정한 독자를 향한 글쓰기 사이에 아주 커다란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골짜기는 즐거움이 없는 글쓰기와 즐거움이 있는 글쓰기 사이에 존재한다.

지나치게 시의적인 글은 ‘책’에 담을 수 없다.
인용이 너무 길고 거기에 의존적이다.
‘남의 글’들이 너무 많다⋯⋯.
물론 자비출판으로 억지로 책 비슷하게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책이라는 형식에 끼워 맞추려다보면 원래 뉴스레터의 생동감과 글의 매력은 모두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다. 글의 시의성 및 인용문을 꼼꼼하게 옮겨 적은 필사, 피드백, 각주, 하이퍼링크까지도 포함해 나의 메모다. 그것들이 빠지면 집에서 어느 공간을 들어내는 꼴이다.

영혼의 집

동네에 있는 책방에서 독서모임으로 읽은 칠레 문학. (동네 서점 번창 기원!) 어쩌다 보니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을 1분기에만 세 권이나 읽었다. 단언컨대 1분기에 읽은 책 중 가장 술술 읽혔고, 1/2권으로 분권이 되어 있긴 하나 분량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임을 다녀와서 확실하게 깨달은 한 가지. 나는 더 이상 ‘여성 서사’나 ‘여성들의 연대’ 같은 키워드에 일말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게 된 거 같다. 오히려 재밌게 읽은 책도 그런 문구로 소개되면 급격하게 지루해진다. 감상을 발화할 수 있는 방식이 제한되는 거 같고.. 혼자만의 독서에 너무 갇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독서 모임을 열심히 다녔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우짜고 싶은 건지!

유일한 읽을거리였던 로맨스 소설의 영향으로, 로사는 에스테반을 밑창이 두툼한 장화를 신고 사막의 바람으로 피부가 검게 그을린 채, 해적들이 숨겨놓은 보물과 스페인 금화와 잉카의 보석을 찾아 땅을 파헤치는 모습으로 그려보는 걸 좋아했다. 니베아가 광산의 보물은 바윗돌 속에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소용없었다.

부인들은 의자가 둥글게 배치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여자들은 마음 놓고 울 수 있었으며, 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자신의 묵은 슬픔까지도 덜어낼 수 있었다.

다음 책

최근에 칼 슈미트의 『대화극』이라는 책을 샀다. (마차살 드리븐 독서다.) 아직 읽어보기 전이라 내용은 모르는데, 책 예쁘네~ 하고 휘휘 보다가 문득 이런 걸 번역하는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서 역자를 알라딘에 검색해 봤다. 독어독문학과로 학사 석사 박사까지 따고 지금은 문학평론가/번역가로 활동한다는 정보가 나왔다. 그렇구나. 그리고 이분이 2014년에 직접 쓴 책이 검색 결과에 나오길래 호기심으로 도서관에서 빌렸다. 이후에 알게 된 건데 현재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계신다고.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보는 것’, ‘보게 하는 것’,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하염없이 보는 것, 우리에게 재미와 도파민을 선사하는 것들이다. 드라마, 야구, 올림픽 중계, 뉴스, 유튜브와 OTT, 매일매일 먹어치우는데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컨텐츠. 반면 ‘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문학을 읽었던 시간이다. 무엇을 보게 하느냐? ‘보는 것’의 헛됨을 보게 한다. 유튜브 숏츠는 다 보고 나면 얼마나 공허하던가. 머리를 전기 자극으로 쉴새없이 지졌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 사랑이 그다지 깊지 않은 미숙하고 어린 자식이라 문학의 깊은 뜻을 자주 까먹는다. 마지막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문학의 유언이다. 관짝에 누워 있는 문학이 우리에게 유언을 남겼다. 엇을 보지 않을 수 없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사람은 살면서 평생 무언가를 보는데, 그렇게 ‘보는 것’과 ‘보는 행위’ 그 자체를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재미에 대한 완고한 저항, 재미 없는 고통을 우리는 문학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내용을 요약하기 어려워서 그냥 프롤로그 네 페이지 정도의 내용을 한 문단으로 써 봤고.. 알라딘에서 책 정보를 찾아보면서도 아리송했는데 다 읽고 나니 책소개를 왜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써놨는지 알 거 같다. 에세이로 홍보하자니 문장 생김새가 너무나 문예비평의 그것이고, 비평서 a.k.a 대중 학술서로 홍보하자니 그 정도로 뚜렷한 한 줄기의 주제가 있진 않고 또 단상을 늘어놓는 방식은 꽤나 에세이 같다.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관짝에 누워 있는 문학의 장례식장에 추모객으로 오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책 같고, 나는 일단 재밌게 읽었다. 솔직히 바울의 문헌학 파트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했지만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던 문장만 추리더라도 나에겐 좋은 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이다. 꽃을 던질 힘조차 없는 문학의 조문객들은 신문 독자들의 막강한 망각의 힘에 맞설 수 없다. 우리,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은 따라서 강렬하게 침잠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보는 행위’ 자체 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순간에만 존립한다. (25p)

경험적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현실을 멈춘다는 것.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이 세속의 땅이 실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곳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역설적으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기이하게도 절망이 곧 희망이 된 것이다. 절망과 희망이 같은 옷을 입은 한 몸이 되는 순간, 오로지 이곳에서만 ‘비인칭의 목소리’는 출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세계가 아우슈비츠로 바뀌어야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아우슈비츠의 잠재적 현존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니 그 두려움 때문에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더욱더 파괴적인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힘을 쏟는 인류의 이른바 ‘진보’야말로 최악의 아우슈비츠보다 더 나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42p)

삶이 죽음보다 더 어두운 것이라는 역설을 인식한 자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경험적 자기를 포기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적 자기를 포기한 자는 현실을 멈춰 세울 수 있다. 현실을 멈춘다는 것. 이것은 최악의 질병인 ‘조급함’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실을 멈춘다는 것, 이것은 매 순간이 그 말의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 ‘끝’이며, 따라서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태도는 반성 없는 허무주의나 교만한 냉소주의와는 전혀 반대라는 사실이다. 벤야민이 ‘세계정치로서의 허무주의’라 부른 이것은 어두운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가장 깊은 현실주의와 한 몸을 이룬 역설적인 허무주의이다. 그리고 우리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아닌 허무주의이다. (54p)

자본주의는 추측컨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이다. 이 점에서 이 종교 체제는 엄청난 운동의 추락 과정 속에 있다. 죄를 씻을 줄 모르는 엄청난 죄의식은 제의를 찾아 그 제의 속에서 그 죄를 씻기보다 오히려 죄를 보편화하려고 하며, 의식(意識)에 그 죄를 두들겨 박고 결국에는 무엇보다 신 자신을 이 죄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신 자신도 속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62p.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 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재인용)

파국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임파감에 대한 입장을 분류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세계의 끝을 생각하는 자들을 크게 다섯 개의 집합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광신주의자. 광신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끝장날 것이 이렇게 분명한데, 도대체 인간들은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종말에 대비해야 해!” 두번째, 냉소주의자. “세계가 끝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모든 시대마다 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했어. 우리라고 뭐가 다르겠어.” 세번째, 극단주의자. “세계의 악과 싸우고 더러운 쓰레기들을 치워야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뭉쳐야 해.” 네번째, 근본주의자. “신의 뜻에 따라 우리는 성스러운 전쟁을 치른다. 이렇게 싸우는 것은 저 높은 세계에서 크고 화려하게 보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니 몸과 목숨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이 네 가지 입장과 구분되는 다섯번째 입장, 철저주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적인 과오는 조급함. 방법론적인 것의 때 이른 중단. 가상적인 일에 가상적인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철저주의자는 ‘목이 잘린 후의 1초’에 다다를 때까지 결코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아직 목소리가 살아 있다면,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조급함과 싸우는 일이다. (129p)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지저귄다. 그러나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는 이 말만큼 공허한 말, 이 지저귐만큼 공허한 지저귐은 없다. 이제 이념 논쟁을 끝내라는 말은 이제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며,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념이라는 (과거의) 사실은 현재에도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념을 포기하라는 또 다른 이념을 강요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공식적인 상속자로, 어떤 ‘시대의식’의 총아이자 대표자로, 그렇게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렇듯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시대의식’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이미 이념적인 것이 아닌가? (130p.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 재인용)

정당성을 독점하는 정장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혹은 문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책’이다. 어째서일까? 책이 논리와 문법과 폭력을 전용할 수 있는 권리/권력의 원천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믿음 또한 거의 언제나 응답받는다. 그리고 이 성공은 다시 그들의 믿음의 연료가 된다. 즉 그들은 책을 열심히 읽고 책에서 말하는 대로 세상의 모든 ‘허튼소리’들을 착실히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정당성의 제국을 완성시켜 나간다. 모두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저 제국의 상징은 ‘법정’이다. 정당성이 인용/기각되는 장소가 법정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권리/권력을 부여하는 책이 법칙들로 채워져 있음을 뜻한다. 요컨대 법칙의 책들이 모든 것의 정당성 여부를 판결하는 것이다. (194p)

장난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것은 법정의 판결이며, 말장난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은 교과서의 문법이 하는 것이다. 하므로 참되고 성실한 저 목소리를 최대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결코 가벼운 웃음 속에 이 시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진지한 오독, 결정적인 오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오독만이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아니, 파도에 맞춰 춤추듯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육지와 달리 바다 위의 길들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발하고 성실한 ‘허튼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201p)

모든 것이 ‘법정화’된 세계를 향해 마치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돌진했던 카프카에 대해서, 그를 사랑한 방랑자 - 타는 해를 꺼뜨린 게오르크에 대해 이야기해준 바로 그 사람 -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원되기 위해서는 짐승들 속에 누워 있어야만 한다. 똑바로 서있다는 것(직립)은 동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권력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명백한 권력의 자세로 인하여 인간은 노출되고 눈에 띄며,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력은 동시에 죄이며, 또 우리는 짐승들과 함께 땅 위에 누워 있어야만 불안을 일으키는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별들을 바라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5p.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 재인용)

제국의 음모

『대화극』을 사면서 문학과지성사의 채석장 시리즈 전권을 한번 훑어봤는데 그중 신기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나한테 영화평론가로 각인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국의 음모』라니, 당연히 스타워즈 얘기일줄 알았다. 그런데 책 소개에 프랑스 제2제국 이야기라고 써 있어서 두 눈을 의심했다. 영화평론가가 그런 책을 왜 써..? 알고 보니 이분이 한국에선 영화평론가로 알려졌지만 문학 교수이기도 해서, 원래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유학도 다녀왔고 프랑스 철학 사상도 일본에 많이 전파하셨다고.

이 책은 주제가 정말 특이하다. 먼저 프랑스 제2제국이란? 나폴레옹 3세가 세워서 20년 정도 유지된 전제정 국가다. 나폴레옹 3세는 원래 공화정 체제에서 대통령으로 있다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어라? 기시감이 느껴지는 전개) 황제가 된 케이스인데 이 사람에게 드 모르니라는 이복형이 있다. 드 모르니는 나폴레옹 1세의 핏줄이긴 하나 사생아여서 가문 바깥에서 키워졌고 보나파트르 가문이 숙청 당할 때도 비껴나간 덕에 사교계에서 잘 나가는 멋쟁이 귀족1로 남았는데, 이복동생인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해서 공신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이 사건을 다루는 가장 유명한 책으로는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있다. 읽어봤다는 건 아니지만.

그럼 『제국의 음모』가 프랑스 제2제국의 쿠데타를 다루는 역사책이냐? 아니다. 이 책은 이복형 드 모르니가 쓴 두 개의 글을 함께 읽어본다. 첫 번째 글은 쿠데타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목적으로 작성된 포고문, 두 번째 글은 멋쟁이 귀족 드 모르니가 취미 삼아 가명으로 썼던 오페레타 『슈플뢰리 씨, 오늘 밤 집에 있습니다』의 극본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걸 왜 읽어봐야 되는데??? 하는 의문이 드는데 안타깝게도 이 의문은 책의 본문을 다 읽은 후에도 완전히 해소되진 않는다. 저자가 들고 온 두 개의 텍스트를 같이 읽는 것보다 맨 뒤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는 쪽이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1100페이지짜리 책이 있고, 이 책은 말하자면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의 스핀오프 격이다. 역자의 친절 가이드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은 빅토르 위고가 상징하는 ‘지의 민주화’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특권 계층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가로 활동하며 지식을 보급 및 확산시켰다. 이는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고전주의적 담론에서 ‘대변가적 예언자’가 여전히 기능하던 시대와 맞닿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이러한 특권적 담론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효과적으로 재편성했다.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낭만주의적 영웅들은 “그러한 제도화된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최후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배우들이었다.”

그에 반해, 루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 제2제정기는 ‘지의 민주화’가 더욱 확산된 시기로, 막심 뒤 캉을 비롯한 ‘범용한 예술가’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이들은 대변자적 예언자의 역할이 희미해진 시대 속에서 “낭만주의적 영웅들을 선망하고 질투하며” “모방과 반복의 담론”을 형성했다. 결국 이들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모방의 욕망에 의해 ‘예술가’가 된 아마추어 집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들은 결국 (그 정의에서부터) 범용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

라는데, 이걸 읽고 나니 오.. 하고 이해가 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다 읽고 중고로 팔았다.

현재진행형인 책

  • 김지음, 커먼즈은행 빈고 『자본의 바깥』
  • 칼 슈미트 『대화극』
  • 박유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