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읽던 두 권의 책을 후루룩 휘리릭 넘겨가며 다 읽었습니다. 저는 모든 페이지를 정독한 게 아니어도 아무튼 마지막 페이지까지 왔으면 다 읽었다고 칩니다. 그리고 새로운 책 하나를 개봉했습니다.

조효원 <다음 책>, 문학과지성사

이 책은 총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Just(막)의 시간. 2장. Once(막상)의 시간. 3장. Like(마치)의 시간. 지난번에 1장까지 다 읽고 2장을 보다가 현기증 와서 덮었는데, 오늘도 2장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더라구요. 바울의 문헌학?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피로의 종말론?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멀쩡한 한국어 단어 써놓고 그 옆에 굳이 독일어 단어를 병기해서 쓰는 건 어쩔 수 없는 독문학과 전공자의 강박일까? 이따가 친구한테 모르는 거 물어봐야지.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귀신 같이 마지막 장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구매할 확률은 또 높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이다. 꽃을 던질 힘조차 없는 문학의 조문객들은 신문 독자들의 막강한 망각의 힘에 맞설 수 없다. 우리,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은 따라서 강렬하게 침잠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보는 행위’ 자체 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순간에만 존립한다. (25p)

경험적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현실을 멈춘다는 것.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이 세속의 땅이 실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곳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역설적으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기이하게도 절망이 곧 희망이 된 것이다. 절망과 희망이 같은 옷을 입은 한 몸이 되는 순간, 오로지 이곳에서만 ‘비인칭의 목소리’는 출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세계가 아우슈비츠로 바뀌어야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아우슈비츠의 잠재적 현존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니 그 두려움 때문에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더욱더 파괴적인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힘을 쏟는 인류의 이른바 ‘진보’야말로 최악의 아우슈비츠보다 더 나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42p)

삶이 죽음보다 더 어두운 것이라는 역설을 인식한 자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경험적 자기를 포기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적 자기를 포기한 자는 현실을 멈춰 세울 수 있다. 현실을 멈춘다는 것. 이것은 최악의 질병인 ‘조급함’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실을 멈춘다는 것, 이것은 매 순간이 그 말의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 ‘끝’이며, 따라서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태도는 반성 없는 허무주의나 교만한 냉소주의와는 전혀 반대라는 사실이다. 벤야민이 ‘세계정치로서의 허무주의’라 부른 이것은 어두운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가장 깊은 현실주의와 한 몸을 이룬 역설적인 허무주의이다. 그리고 우리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아닌 허무주의이다. (54p)

자본주의는 추측컨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이다. 이 점에서 이 종교 체제는 엄청난 운동의 추락 과정 속에 있다. 죄를 씻을 줄 모르는 엄청난 죄의식은 제의를 찾아 그 제의 속에서 그 죄를 씻기보다 오히려 죄를 보편화하려고 하며, 의식(意識)에 그 죄를 두들겨 박고 결국에는 무엇보다 신 자신을 이 죄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신 자신도 속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62p.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 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재인용)

파국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임파감에 대한 입장을 분류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세계의 끝을 생각하는 자들을 크게 다섯 개의 집합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광신주의자. 광신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끝장날 것이 이렇게 분명한데, 도대체 인간들은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종말에 대비해야 해!” 두번째, 냉소주의자. “세계가 끝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모든 시대마다 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했어. 우리라고 뭐가 다르겠어.” 세번째, 극단주의자. “세계의 악과 싸우고 더러운 쓰레기들을 치워야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뭉쳐야 해.” 네번째, 근본주의자. “신의 뜻에 따라 우리는 성스러운 전쟁을 치른다. 이렇게 싸우는 것은 저 높은 세계에서 크고 화려하게 보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니 몸과 목숨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이 네 가지 입장과 구분되는 다섯번째 입장, 철저주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적인 과오는 조급함. 방법론적인 것의 때 이른 중단. 가상적인 일에 가상적인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철저주의자는 ‘목이 잘린 후의 1초’에 다다를 때까지 결코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아직 목소리가 살아 있다면,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조급함과 싸우는 일이다. (129p)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지저귄다. 그러나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는 이 말만큼 공허한 말, 이 지저귐만큼 공허한 지저귐은 없다. 이제 이념 논쟁을 끝내라는 말은 이제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며,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념이라는 (과거의) 사실은 현재에도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념을 포기하라는 또 다른 이념을 강요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공식적인 상속자로, 어떤 ‘시대의식’의 총아이자 대표자로, 그렇게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렇듯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시대의식’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이미 이념적인 것이 아닌가? (130p.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 재인용)

정당성을 독점하는 정장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혹은 문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책’이다. 어째서일까? 책이 논리와 문법과 폭력을 전용할 수 있는 권리/권력의 원천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믿음 또한 거의 언제나 응답받는다. 그리고 이 성공은 다시 그들의 믿음의 연료가 된다. 즉 그들은 책을 열심히 읽고 책에서 말하는 대로 세상의 모든 ‘허튼소리’들을 착실히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정당성의 제국을 완성시켜 나간다. 모두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저 제국의 상징은 ‘법정’이다. 정당성이 인용/기각되는 장소가 법정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권리/권력을 부여하는 책이 법칙들로 채워져 있음을 뜻한다. 요컨대 법칙의 책들이 모든 것의 정당성 여부를 판결하는 것이다. (194p)

장난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것은 법정의 판결이며, 말장난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은 교과서의 문법이 하는 것이다. 하므로 참되고 성실한 저 목소리를 최대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결코 가벼운 웃음 속에 이 시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진지한 오독, 결정적인 오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오독만이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아니, 파도에 맞춰 춤추듯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육지와 달리 바다 위의 길들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발하고 성실한 ‘허튼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201p)

모든 것이 ‘법정화’된 세계를 향해 마치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돌진했던 카프카에 대해서, 그를 사랑한 방랑자 - 타는 해를 꺼뜨린 게오르크에 대해 이야기해준 바로 그 사람 -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원되기 위해서는 짐승들 속에 누워 있어야만 한다. 똑바로 서있다는 것(직립)은 동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권력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명백한 권력의 자세로 인하여 인간은 노출되고 눈에 띄며,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력은 동시에 죄이며, 또 우리는 짐승들과 함께 땅 위에 누워 있어야만 불안을 일으키는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별들을 바라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5p.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 재인용)

하스미 시게히코 <제국의 음모>, 문학과지성사

저자가 들고 온 두 개의 텍스트를 같이 읽는 것보다 맨 뒤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는 쪽이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하기에 더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1100페이지짜리 책이 있고, 원래부터 ‘범용함’의 개념에 관심이 있던 분인데 이 책은 약간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의 스핀오프처럼 쓰인 거라네요. 역자의 친절 가이드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은 빅토르 위고가 상징하는 ‘지의 민주화’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특권 계층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가로 활동하며 지식을 보급 및 확산시켰다. 이는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고전주의적 담론에서 ‘대변가적 예언자’가 여전히 기능하던 시대와 맞닿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이러한 특권적 담론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효과적으로 재편성했다.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낭만주의적 영웅들은 “그러한 제도화된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최후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배우들이었다.”

그에 반해, 루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 제2제정기는 ‘지의 민주화’가 더욱 확산된 시기로, 막심 뒤 캉을 비롯한 ‘범용한 예술가’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이들은 대변자적 예언자의 역할이 희미해진 시대 속에서 “낭만주의적 영웅들을 선망하고 질투하며” “모방과 반복의 담론”을 형성했다. 결국 이들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모방의 욕망에 의해 ‘예술가’가 된 아마추어 집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들은 결국 (그 정의에서부터) 범용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

라는데, 이걸 읽고 나니 오.. 하고 이해가 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해결하고 완독 처리.

김지음, 빈고 <자본의 바깥>, 힐데와소피

논픽션 북페어에서 산 책입니다. 16년째 ‘빈고’라는 은행을 직접 만들고 친구들과 운영해 가고 있는 저자가 빈고를 만들게 된 과정을 공유해주는 거 같아요. 아직 초반이라서 ‘빈고’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독자와 미리 이해를 맞추고 가는 챕터를 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도 책이 알찰 거 같아서 기대가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