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술과 약에 쩌들어 살며 사람 열받게 하는 음모론자 아버지도 한번쯤은 찐으로 내 목숨을 구해줄지 모르니 평소에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마지막에 암구호 기억 못했으면 아버지도 죽여 버리려던 거 아니냐며.
  • 혁명하던 사람들이 나이 든 얘기라고 미리 듣고 가서 그런가 줄거리에 집중해서 봤는데 안 그러는 편이 좋았을 거 같다. 오히려 코미디적 요소나 긴장을 줬다 풀었다 줬다 풀었다 하는 감각, 블록버스터적 재미가 더 컸다. 마지막에 꼬불꼬불 차도에서 나오는 추격씬이 진짜 좋았다. 화려한 카레이싱을 보여주는 게 아닌데 그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씨너스

  • 웃기게도 <씨너스>에게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타이틀을 주고 싶다. 음악 영화이기도 하고 사회 영화이기도 했지만 통기타를 뚱땅뚱땅 두들기면 과거와 미래의 영혼들이 소환된다니 이거 <영혼의 집>에 나와도 손색없는 설정 아닌지.
  • 아일랜드 뱀파이어 무리와 흑인 블루스 소작농들은 서로를 전혀 아군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서 이 영화를 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는 둘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둘은 공통적으로 소외된 자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마냥 선하진 않고 내집단 갈등이나 약간 정신나간 구석도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연대할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가 고구려백제신라를 삼국으로 묶어서 불러도 그건 우리 입장이지 정작 그 시대 고구려 사람에게 백제와 신라는 전혀 한팀이 아니었을 것처럼 흑인 블루스 소작농들은 아일랜드 뱀파이어를 씹새끼들이라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씹새끼 맞기도 하고.
  • 하지만 두 집단의 땅은 같은 강을 끼고 있다. 자본이라는 이름의 강을.. 아일랜드 뱀파이어도 사람을 회유할 땐 금을 쓰고 스모크스택 형제도 돈을 벌기 위해 주점을 연다. 만약 흑인 칭구들의 경제 사정이 보다 풍족했다면 두 집단은 애초에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처음엔 거절했다. ‘우리는 연대할 사람을 찾고 있긴 하지만 니네처럼 수상쩍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열어줄 문은 없어 그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하지만 돈이 부족했고 그들은 낯선 이를 들일 수밖에 없었지.
  • 아일랜드 뱀파이어는 KKK도 아군으로 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거기서부터 갈등은 예정되어 있다. 뭐 일단 들어오고 나면 이전에 갖고 있던 정치적 신념 따위는 싹 씻겨나가는 거 같지만.
  • 마차살 생각이 안날 수 없다. 뭔가 이상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미친 집단이 찾으러 오는 주인공은 처음 보는 거 아니니까 그렇다쳐도 뱀파이어가 되면 인식 체계가 하나가 된다던가 (루카스의 이마 맞대기와 테르미누스 유카이리아의 보급형 현자 약물을 사이좋게 반반씩 섞어놓은 느낌이 난다) 양쪽 다 종교적 뿌리가 있다는 거나 (기독교와 부두교, 그리고 반-기독교까지) 뻑하면 피 흘리고 담배 피는 것이 영락없는 차살이었다. 총만 완드로 바꿔주면 된다. 사실 후반부에 스모크가 담배종이 돌돌 말아서 하얀 가루 꺼내는 장면이랑 마지막에 KKK 아재한테 담배 한 대 빌려서 피다가 픽 쓰러지는 장면 보면서 저 세계관의 담배에도 약물 처리가 되어 있나 잠시 생각했다. 영화가 하도 잡탕찌개라 뭘 더 섞을지 모르겠더라고..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씨너스>를 봐서 그런지 뱀파이어가 자꾸 극단적 성향의 정치집단처럼 느껴졌다. ‘우리 연대하자 저새끼를 끌어내리자’는 거대 목표에는 양집단이 모두 동의하는데 그 목표를 위해 경유하는 가치관이 너무 다른 것이다. 일단 뱀파이어의 동지 모집 방식은 엄청나게 폭력적이다. 하다못해 구원에 관심 있냐고 물어보는 과정이라도 좀 거쳐라.. 본인 의사가 있든 없든 일단 동지로 강제 전환시키는 건 또 마차살의 플레로마랑 닮았다. 하지만 흑인 집단의 동지 모집 방식이 비폭력적이라고 말하긴 좀 이상하다. 이쪽은 아예 핏줄로 결정되는 거니까. 여튼 뱀파이어의 방식이 야만적이라고 비난하기 좋아서 그렇지 어딘가엔 ‘더 빠르고 급진적인 결과를 위해선 이 정도 잡음은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스모크스택 형제 같은 튼튼하고 섹시한 보디가드를 둔 건 아닐 테니까. 맨 마지막에 에필로그 씬을 보면서 이 생각이 더 강해졌다. 주인공은 더 이상 뱀파이어 집단을 씹새끼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그리워한 거죽을 그 뱀파이어가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인공은 말년에 만난 두 사람을 진짜 그 지인이라고 생각하며 대한다. 경계하지.. 않네? 이거 굉장히 ‘과거에는 정치적 숙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같이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지’ 바이브 아닌가. 즐거웠잖아 한잔해~
  • 식상하지만 ‘악마적 재능’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게 결국 기타를 너무 잘 뚜들긴 탓에 얼떨결에 대형사고가 터진 청소년이 부랴부랴 사고 수습을 하는 이야기인데 이 대형사고를 봐놓고도 기타를 그만두지 않는 기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 재능이 진짜로 악마를 불러온다 해도 저는 기타를 쳐야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빅토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빅토리>에서 필선이가 옥상에서 춤추는 씬. 필선이는 재능 추구 a.k.a 악마 쫓기를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았지만 <씨너스>는 결국 죄인이 되는 엔딩이니까. 하지만 즐거웠잖아 한잔해~
  • 그렇지만 이걸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다른 영화를 대라면 역시 <미드소마>다. 아따 강강수월래 잘하드라. 솔직히 너무 즐거워보여서 나도 끼워달라고 하고 싶드라. 싱어롱 회차가 있다면 나는 소신껏 아일랜드 민요에 땐쓰를 춰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