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살 드리븐 독서가 독일문학까지 확장된 지도 어언 몇 달, 독일문학에 대한 내 감상은 여전히 ‘재미없다’에 머물러 있다. 이 책도 초반 100페이지 정도를 읽고 메모장에 쓴 첫마디가 ‘역시 독일문학은 재미가 없다’였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도 재미가 없었고 『호모 파버』도 재미가 없었다. (엄선해서 골라주신 사장님께 죄송할 따름..) 아주 얄팍한 감상이지만 독일문학은 사변적이다.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서 소설이 전개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이 끊임없이 뭘 생각한다. 생각하고 서술하고 생각하고 서술하고. 『폭풍의 언덕』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화끈한 재미, 소설 속의 격동이 나까지 휩쓸어버리는 재미는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독일문학은 나를 소설 속 세계관에 집어넣는 대신 소설 속 등장인물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사실 이 독서의 출발점이었던 『마차살』도 거기서 거리가 아주 멀진 않다. 『문송안함』과는 그 점이 참 다르다. 『문송안함』은 작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세카이를 보여주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독자로 하여금 그 세계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하지만 『마차살』은 현재 779화까지 왔는데도 이 텍스트만으로 소설 속의 19세기 독일 세계관을 다 알게 되진 않는다. 독일은 공기 중에 분포되어 있고, 독자가 들여다보는 건 그 독일을 바라보는 화자의 머릿속이다.

『마차살』 때문에 독일문학까지 읽어보게 됐지만, 일단 독일문학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다. ‘재미가 없다.’

『여인과 군상』은 심지어 쓸데없는 부연 설명도 많다. 라고 쓰는 동시에 나는 즉시 나 자신을 반박하고 싶어진다. 여기서 ‘쓸데 있다’와 ‘쓸데없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독자가 줄거리 세 줄 요약할 때 필요한 정보만 쓸 데 있고 나머진 전부 쓸데없나? 이 챕터 이 문단은 30페이지 뒤에 나올 저 문단을 암시하는 복선이었군, 같은 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가? 스스로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그 부연 설명이 몇 페이지의 면적을 차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물리적인 감각이 분명 있다. 이 책의 시대적 분위기는 이 정도의 쓸모와 이 정도의 무쓸모로 구성된 거구나 하는. 물론 이런 애매모호한 말 말고 누가 잘 정리된 문장으로 적확하게 말해주면 좋겠긴 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의 148~150페이지의 갑작스런 백과사전 탐방은 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하인리히 뵐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고 『여인과 군상』에 대해서도 출판사가 기본 제공한 정보 외엔 아는 게 없는 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는 ‘자본주의 사회를 등지고 필요한 만큼만 벌며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인데, 사실 읽는 동안 이 문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왜냐면 저 문구를 읽고 내가 연상한 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전전후문학이다. 주인공 레니가 큰 욕심 없이 필요한 만큼만 버는 사람은 맞지만, 소설 내에 분명 그런 내용이 등장하지만 그게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680페이지짜리 소설을 한줄 요약하는 문장으로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 물론 전전후문학으로 홍보했으면 독자 유인이 더 줄었겠지만⋯. (전후문학은 어쩐지 이미 많이 나왔고 많이 읽었던 내용의 반복이란 인상을 준다. 베트남전처럼 아직 문학의 형태로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전쟁이면 모를까. 비록 곰곰이 떠올려 보면 전후문학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지금도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작품은 기껏해야 『안네의 일기』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책의 마지막 80페이지에서 언급되는 레니의 아들 레프의 인물상은 확실히 ‘반자본주의’로 표현될 만하다. 다만 이미 다양한 반자본주의 이야기를 접해본 2025년의 독자에게 아주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어서 여기에 얼마나 방점을 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지점은 전혀 다른 건데, 내가 원래도 이런 지점에 골몰하는 사람이란 점을 미리 밝히고 싶다. 책에 대한 감상을 쓰면서 오롯이 그 책에 대해서만 말하기란 어렵다. 난 훈련 받은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감상을 쓰고 나서 5년쯤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그 글에서 알게 되는 건 책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책을 읽었던 당시 나의 정보다. 페미니즘에 딥 다이브해 있는 시기에는 무슨 책과 영화를 접해도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없는 얘기를 지어내진 않겠지만 필터가 좀 강하게 작용한다.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감안해 주면 좋겠다.

내게 인상 깊었던 점 1. 두 겹의 액자 구조가 있다. 이 책을 실제로 쓴 작가 하인리히 뵐이 존재하고 이 책 내부의 서술자로 등장하는 ‘저자’가 존재한다. 지금부터 이 ‘저자’는 매번 따옴표로 기술하자. ‘저자’는 마치 레니 파이퍼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사람처럼 레니 파이퍼에 대해 서술한다. 레니 주변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가끔 인터뷰이의 서술 중간에 줄표를 써서 끼어든 다음 자신의 사견을 밝힌다. 때로는 인터뷰이의 동의를 받지 못해 그의 이름을 밝힐 수 없다며 대단히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레니 파이퍼도, ‘저자’가 만나는 인터뷰이도 모두 하인리히 뵐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니와 이 ‘저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저자의 이름은 뭐며 왜 레니에 대한 책을 쓰게 됐는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등장인물이라기엔 레니의 삶에서 약간 떨어져 있고, 작가의 페르소나라기엔 허구의 인물인 레니를 너무 가까이서 관찰하고 있다. 마치 픽션을 쓰는 동시에 자기가 쓰는 내용을 픽션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레멘티나 수녀가 여기에 한 겹을 더한다. 클레멘티나 수녀는 ‘저자’와 약간의 감정적 관계를 맺는다. 솔직히 맥락은 잘 모르겠다. ‘저자’가 라엘 수녀를 조사하다 만나게 되는 인물인데 대화 중간에 외모가 매혹적이라는 묘사가 나오더니 헤어질 때쯤엔 서로 뺨 키스를 주고받는다. 이때까지 나왔던 다른 인터뷰이를 대하며 ‘저자’가 연민을 표하거나 불편해하는 등의 감정 표현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쌍방의 썸띵을 주고받는 건 클레멘티나가 처음이라, 이 인물의 등장은 ‘저자’를 한층 더 진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근데 그런 클레멘티나조차 레니와 직접적으로 소통하진 않는다. 레니를 계기로 만나게 된 인물이니 ‘저자’와 레니 사이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할 법도 한데 그녀는 시종일관 미묘한 위치를 지킨다. ‘저자’와 레니가 앉아 있는 자리에 동석은 하지만 ‘저자’가 모르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레니와 인물 대 인물로서 교류하진 않고, 등장인물이라고 부르기 다소 애매한 상태로 지면을 떠돌더니 책의 최후반부에서는 아예 관찰자로 자리매김하며 ‘레니를 관찰하는 클레멘티나를 관찰하는 저자’의 구도가 등장한다. 이..이게 뭐지.

하인리히 뵐이 픽션을 쓰는 동시에 이것을 픽션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다른 곳에서도 온다. 인상 깊었던 점 2. 인물에 대한 설명이 단계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레니 파이퍼에 대한 680페이지 짜리 책을 읽었는데 레니 파이퍼라는 인물조차 아주 선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의 이해에 초점을 맞춰 레니를 설명하진 않는다. 레니는 좀처럼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고 대신 주변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서술되는데, 레니에 대한 새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이 정보가 레니를 파악하기에 중요한지 아닌지 혹시 진술자의 관점에 따른 왜곡은 아닌지 이게 왜 이 시점에 밝혀지는지는 독자가 직접 헤쳐가는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정보가 차례차례 주어지지 않고 전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 못한 사람의 진술로서 폭로로서 등장하는가? 다른 수많은 등장인물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다. 이들의 선악은 불분명하게 남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호이저 노인과 그 손자들을 비난하긴 쉽다. 최후반부의 그들은 확실히 밉상이다. 그러나 그 직전에는 발터 펠처가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자본가와 나치 돌격대 중 어느 쪽이 더 끔찍한 타이틀인가? 정말 박빙의 대결이다.) 일제 크레머는 좋은 사람이었나? 빌헬름 파이퍼의 절뚝거리는 다리는 어떤가? 작중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불륜은 어떻고? 유일하게 이 사람은 선하다 단언할 수 있는 인물은 하인리히 그루이텐과 에르하르트 슈바이게르트 뿐이다. 왜냐면 두 사람은 책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제목에 걸맞게 한 여인과 군상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여인의 삶에 대해 680페이지를 서술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된 이야기이기보다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시선의 해석을 핀셋으로 집어온 것에 가깝다. (정확히는 그렇게 쓰인 픽션이라고 해야 옳을 텐데 책을 읽다 보면 혹시 이 인물만큼은 실존인물이 아닐까 싶어 자꾸 검색을 해보게 된다..) 그렇게 핀셋으로 집은 기록조차 대단히 신중한 위치에서, 관찰에 관찰만을 거듭하며 이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의 판단은 전부 독자에게 맡긴다. 마치 작가 자신은 세계대전 전후를 오롯이 픽션으로도 오롯이 자기서사로도 말할 수 없다는 듯이.

하인리히 뵐의 작품 세계를 알면 더 연결지어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을 거 같은데, 한국어로는 검색해도 나오는 정보가 많지 않고 영어나 독일어로 알아보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감상은 이쯤에서 끝!

발췌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배우게 하고 대학 공부를 시키죠. 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딸은 고고학자인데 현재 튀르키예에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부모의 환경을 경멸하는 겁니다. 신흥 부자, 늙은 나치, 전쟁 중에 돈을 번 사람, 기회주의자. 내가 듣고 있는 모든 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딸은 나에게 제3세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가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내 딸은 제1세계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297)

그러곤 모든 형의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독일 탈영병, 숨어 있던 러시아인, 유고슬라비인, 폴란드인, 러시아 여자 노동자, 도망친 강제노동 수용소 죄수, 그리고 숨어 있던 유대인 두셋, 누가 부역했고 누가 부역하지 않았는지 또는 누가 어느 수용소에 있었는지 미군들이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그들은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치인지 나치가 아닌지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그것은 미국인들이 아이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427)

오늘날까지도 그를 깨끗하게 해 준 게 옳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나는 19살 때부터 42살이 될 때까지 쫓기는 몸이었습니다. 에기디엔베르크 전투 이래로 미군이 진격 할 때까지 22년 동안 추적당했습니다. 원하신다면 말씀드리지만, 정치적으로 인종적으로 쫓겼습니다. 나는 펠처를 의식적으로 찾아다녔습니다. 나치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패하고 범죄적인 나치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447)

이탈리아에서는 선거 때가 되면 여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최근에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는 수도원 정원들에서 온천이 솟아났고, 수녀들이 매장된 곳에서 장미가 피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알리려고 했던 것은 수녀들이 동프로이센의 점령 시절에 무력에 짓밟혔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이 일은 공산주의자들의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수녀들을 무력으로 짓밟는 것 외에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