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블챌 마감과 쓸 게 없는 현실… 그래서 남기는 마차살 드리븐 독서 근황.

마차살은 소설 내부에서 가져다쓰는 레퍼런스 범위가 꽤 넓어서 “이거 한 권만 읽으면 차살에 나오는 온갖 어려운 단락 다 이해 가능”을 보장하는 책이 딱히 없다. 심지어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이루는 많은 부분 중 구체적으로 뭘 더 알고 싶은 건지 키값조차 찾지 못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 소설을 독해하는 지인들이 이미 있지만 그들의 키값을 참조-복사-붙여넣기 한다고 그게 곧 내 키값이 되는 건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유의지를 남에게 위탁한 채 안락을 찾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성하라는 게 이 소설에서 이만팔천번쯤 반복하는 메시지여서 느리더라도 내 키값은 내가 찾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손에 잡힌 키워드부터 시작했다. 먼저 지인의 영업으로 알게 된 키워드가 플로티누스. 신플라톤주의를 정립한 고대 후기 철학자인데 신플라톤주의가 뭐냐면 아직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내 앎이 정리되진 못했다. 신플라톤주의를 알려면 먼저 플라톤을 알아야 하는데 플라톤을 설명하려면 소크라테스가 필요하고, 이렇게 고대 철학사의 중요한 이름들을 고구마 줄기처럼 뽑아낼 수 있을 텐데 나는 이 유명한 사람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양 철학사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간 이전에 그랬듯 탈레스의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에서 눈물을 흘리다 끽해야 아리스토텔레스쯤 가고 나가떨어졌을 테니 그것도 정답은 아니다. 오로지 플로티누스만 다루는 책은 또 선택지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고른 게 『신 앞에 선 인간』.

신 앞에 선 인간

중세 종교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다섯을 소개해 주는데 그 중 플로티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책은 꽤 괜찮았다. 단순한 감상을 남기자면 1. 생각보다 굉장히 잘 읽히고 2. 줄 간격이 넓고 3. 서양 철학 안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다소 덜한 탓에 좋은 입문서를 찾기 어려운 중세 철학에 괜찮은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이 책만 읽고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전부 아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책을 읽고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다음엔 어떤 키워드를 잡고 검색하면 될지는 알 수 있다. 내 경우 ‘일자’라는 용어가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읽은 의미가 있었다.

플로티누스의 유출설. 존재의 거대한 연쇄 안에서 더 높은 단계는 바로 밑 단계의 원인이 된다. 존재의 등급 최정상에는 1. 일자(to hen). 만물의 최종 원리. 선 그 자체, 신 2. 정신(nous). 일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 최초의 존재. 신의 아들. 인식 주체이자 인식 대상. 이데아를 인식. 3. 세계 영혼 (psyche) 이렇게 세 가지 신적 존재가 있다.

이데아가 바로 개별 사물들을 각각 무엇이게끔 해주는 불멸의 원형이기 때문에 다수의 이데아가 존재하게 된다. 이 이데아들을 자신 안에 지닌 정신은 유출을 계속해 나갈 사명을 띠게 된다.

신을 닮아가야 한다. 일자와의 합일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 덕 없이 외치는 신은 빈말에 불과하다. 오로지 덕을 통해야 한다.

플로티누스는 신을 닮아가기 위한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세계영혼뿐만 아니라 세계 내 생명체들을 살아 있게 해주는 개별적 영혼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영혼은 지성계와 감각계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것이다.

영혼은 그 자체가 항상 전체적인 것이므로 일자를 닮아 있고, 또 다른 편으로는 이미 여러 부분에 관계하고 있기에 많은 것을 닮았으므로, 이로써 이 두 가지 영역에 다 다리를 놓아준다.

명상록 수업

그리고 동시에 관심을 가졌던 키워드가 『명상록』. 『명상록』은 마차살 화자가 한때 구명줄처럼 붙잡고 살았던 책으로 언급되는데, 그건 아마 『명상록』이 세상에 영원히 회자되는 일은 없고 사람은 누구나 잊혀진다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살 화자는 익명 대중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그거 외에 『명상록』에 큰 의미가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원전을 읽어볼 필요는 딱히 못 느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계발서의 원형’이라는 인상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명상록』의 어떤 페이지를 펼쳐서 읽은들 음, 명언집. 그쵸 맞는 말이죠, 에서 생각이 더 나아가지 않을 거 같았다. 오히려 『명상록』이 왜 의미있는 책인지 알려주는 해설집이 조금 더 의미 있겠다고 느꼈고, 그 결과 고른 것이 피에르 아도의 『명상록 수업』.

참고로 이 책은 두껍다. 그리고 하드커버라 무겁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부터 그가 영향을 받은 당대 철학, 『명상록』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기 때문에 『명상록』을 이해하기 위한 주변 배경 설명은 이 책 한 권으로 다 채울 수 있을 거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정보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저자인 피에르 아도의 입담이 꽤 괜찮고 (강의 재밌게 할 줄 아는 교수님 바이브) 챕터 구분도 잘 되어 있어서 꼭 다 읽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볼 만하다.

아, 이 책 덕분에 추가로 알 수 있는 한 가지. 프론토는 적어도 『명상록』에서 드러나기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렇게까지 의미있는 스승이 아니다. 마차살의 EC1을 읽은 사람의 기대만큼은 더더욱 아니다. 『명상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 스승은 따로 있고, 차살에서 프론토가 언급된 건 단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텍스트가 몇 되지 않는데 그 중 하나가 프론토와 주고받았던 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철학자는 우리 시대 철학자와 완전히 달랐다. 지금은 독창적이기에 이해하기 어렵고 인위적인 ‘새로운 담론’,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을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철학은 일반적으로 어떤 전통 안에 있었고 어떤 학파와 닿아 있었다. 에픽테토스는 스토아학파였다. 이 말은 그의 가르침이 스토아학파의 기초가 된 텍스트, 즉 제논과 크리시포스를 설명했다는 뜻이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스토아학파에 고유한 삶의 양식을 스스로 실천하고 자기 제자들에게도 실천하게 했다는 뜻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인간의 본질은 반드시 올바른 이성에 있지만, 인간의 구체적 삶이 반드시 이성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반면 에픽테토스는 스토아주의자답게 인간의 본질이 자유의 규율로서 이성, 선택할 수 있는 힘에 있다고 본다. 선택할 수 있기에 반드시 올바르기보다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토아주의자는 인간의 절대 가치를 믿는다. 아무리 여러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너무 쉽게 잊는 바, 근대적 ‘인권’ 개념의 기원에 스토아주의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해 세네카의 명문장을 인용했다. “인간은 인간에게 신성한 존재다.” 하지만 에픽테토스가 서투른 노예를 어떻게 참아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했던 대답을 어떻게 빼놓을 수 있겠는가.

너 자신이 노예다! 신을 아버지로 두고 너와 같은 씨에서 태어나 너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려온 네 형제도 못 참아주는가? 내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지 기억 못하느냐? 타고나기로는 너의 친족, 너의 형제이자 신의 아들이다.

하지만 나는 돈을 주고 사들였으니 그들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반면, 그들은 나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네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땅밖에, 이 죽음의 구렁밖에 보지 않는구나. 너는 비참한 법, 곧 죽은 자들의 법만 아는구나. 신의 법은 보지 못하느냐?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의 입담이 좋길래 『명상록 수업』 다음으로 같은 저자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도 빌렸다. 이 책은 아예 1부 2부는 건너뛰고 내가 궁금했던 3부, 특히 ‘계시 철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챕터에 집중해서 읽었다. 앞에서 다른 책을 읽을 때도 이 부분이 참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접점이 생기나? 현대인의 인식으로 생각했을 땐 철학자야말로 종교를 멀리 했을 거 같은데 - 현대인에게 철학자란 날카롭고 신선한 사유를 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유를 하는 사람이 믿습니다 아-멘 을 한다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으므로 - 왜 중세에는 종교와 철학이 한몸처럼 움직이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간극이 어디서 생기는 지가 좀처럼 채워지지 않다가 피에르 아도의 설명을 통해 맥락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는 대중들을 전향시켜 지성적인 것들에서 정신적인 것들로 돌아서게 하지 못했으나 그리스도가 나타난 이후 온갖 다양한 조건에 처했던 이들이 이 삶의 양식을 채택하고 인간성의 진정한 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에서 아주 부차적이었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부 가치들이 고대 철학의 영향 덕분에 가장 중요한 것들로 부상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이 통치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복음서의 관념은 금욕과 정관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신과의 합일 혹은 신격화로 대치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이란 한 인간의 삶이라기보다는 한 영혼의 삶이었다. 이는 곧 세속 철학자들의 삶처럼 이성에 따르는 삶, 심지어 플라톤주의 특유의 <정신에 따르는 삶>이 되었다.

<참여적인> 철학자에게는 정치적 감정과 증오에 휩쓸릴 위험이 언제나 수반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때문에 프리드만은 인간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제한된 집단에, 심지어 개인들에게만>, <정신적 노력에(제한된 소수의 변화에)> 집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언젠가는 전달되고 확산될 것이라 생각했다. 철학자는 의식 없는 두 상태 - 배금주의가 낳은 상태와 수억 명의 인류가 겪는 비참과 고통에서 기인한 상태 - 사이에서 분열된 세계에서 고독과 무능을 통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철학자는 현자의 절대적 평정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함은 이 같은 고립과 무능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고대 철학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지혜의 관념이라는 규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이 닥치든지, 설령 우리 행위가 지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p.s.

  • 강철왕국 프로이센 : 이 책은 지금 1/3 정도 읽고 멈춰 있다. 기다려봐 읽을 게 많아서 그래..
  • 고백록 : 플로티누스를 알려준 지인이 성염 역주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영업도 잠깐 하셨다. 근데 이 책이 가격도 가격이고, 무엇보다 제가 구판을 도서관에서 잠깐 읽어봤는데 제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거 같던데요. 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