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앎
사숨쟝 라이브 방송에서 추천 받았던 책. 요즘은 좀 선언하듯이 말하는 책이 끌린다며 사슴언니가 추천한 게 『폭풍 다음에 불』이었고, 혹시 다른 분들도 비슷한 느낌의 책을 아신다면 추천해 달라는 말이 나왔을 때 누군가가 채팅으로 언급한 게 『시작의 앎』이었다. 마침 알라딘에 검색해 보니 오키나와 역사를 다루는 책이라는 소개글이 있었다. 다들 어디서 이런 책을 디깅해 오는 걸까? 알라딘에 단순히 ‘오키나와’를 검색해선 절대 이 책을 찾을 수 없을 거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오키나와의 역사라면 관심 분야 중 하나였고, 더더욱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전후 오키나와의 역사를 프란츠 파농의 사상을 바탕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오키나와와 파농 사이의 연관은 순전히 저자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의외로 이 프랑스 출신 철학자의 사고는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오키나와를 설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저자가 보고자 하는 건 “약자를 위해 말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강자의 언어를 놓지 못하는” 아주 미세한 틈에 갇힌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운동(movement)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은 이 교묘한 위치를 아주 잘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르티니크 섬 출신으로, 마르티니크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른 책(『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감상에 썼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마르티니크는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으로, 한때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지금은 프랑스의 해외도로 지정되어 있다. 식민 지배 당시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흑인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와 그곳에 정착시켰기 때문에 지금의 마르티니크 주민은 대부분 흑인이다. 하지만 마르티니크 주민들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자신들은 흑인들과는 다르다는 계급 의식을 갖고 있고, 그와 동시에 이 곳은 프랑스의 원조 없이는 사회 유지가 불가능할만큼 가난한 지역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마르티니크의 상황에 처해 있어서 이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촉구하고자 한다면, 그때 가장 해서는 안 될 말은 ‘우린 저 흑인들과 다르다’일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저’ 흑인들과 프랑스 국적을 가진 ‘우리’들은 다르다는 식의 선긋기. 그런 선언이 위험한 이유는 첫째로 그 말이 나오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당장 길을 지나는데 누가 너 이새끼 흑인이네 하며 시비를 건다면, 그런데 그 시비를 ‘나 여기서 태어난 프랑스인이거든? 어우 지겨워’로 한방에 퇴치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쓰지 않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타협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후 오키나와가 겹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 본토에서도 ‘너 이새끼 조선인이지?’ 하는 불심 검문은 자주 있었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때마다 ‘나는 오키나와 사람이다. 우리 오키나와는 일본을 아주 성실하게 도왔다. 당신은 나를 이렇게 대접하면 안 된다’ 등의 대응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선긋기 발언이 위험한 두번째 이유는 결국 이 발언이 ‘이런 취급을 당해도 좋은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오키나와 사람이 순사에게 ‘나는 조선인이 아니다’고 답할 때, 그 말은 조선인은 이런 심문을 당해도 된다는 뜻을 내포해 버린다. 우린 저 흑인들과 다르다는 항변은 그러니 저 흑인들을 더 혐오하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게 닥치는 공격이 무서워 선을 그어버릴 때, 그 공격은 더 큰 스노우볼이 되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데굴데굴 굴러가버린다.
이 책은 오키나와/마르티니크 사람이 당해야 했던 길거리 심문에서 출발해, 그러한 심문이 만들어내는 폭력적인 상황에 ‘신문공간’이라는 말을 붙인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신문공간은 당하는 사람이 자기변호에 게을렀거나 심문하는 사람의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너 OO 아니야? 라고 질문을 받는 그 순간에 비로소 폭력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그 직전, ‘언제든’ 길에서 그런 질문을 받을 수 있고 질문에 원하는 답을 하지 못하면 곤경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상시’ 지속되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가 인지하는 바로 그 시점에, 폭력은 이미 행해졌다.
나머지는 읽으면서 썼던 메모.
가계부
- 모르는 사람의 가계부를 읽는다고 할 때 진짜 의미를 가지는 건 사실 숫자 사이사이 공백의 언어. 그 가계부에는 드러나지 않은 언어. 쓰인 내용이 아니라 쓴다는 행위 자체가, 결코 세계에 일체화되지 않는 (자본주의로 따지면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다.
- 말이란 언제 생겨나는가? 분명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인데도 거기서는 아무리 해도 있을 곳을 찾을 수 없을 때. 안이한 전달을 거부하는 고독을 받치는 말이, 우선은 입을 꾹 닫음으로서 획득된다. 가계부에서 보이는 말은 이런 고독 속에서 풀어져 나오는 말. 이 책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남겨진 말들에서 시작하는 소생술 같은 것. 말은 어떠한 형태이든 “절대적으로 타인에 대해 존재하는 것”
- 미래를 만들어갈 가능성은 중단된 가계부가 끌어안고 있는, 있을 곳이 없는 사람들이 연루하는 과정에서 찾아야만 한다.
신문공간
- 말을 하고 있는데도 하고 있다고 간주되지 않는 상황.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이 팽창하며 말이 정지하는 상황. 이때 말의 정지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정지를 계속 회피하는 번드르르한 말의 나열이라고 볼 수도 있다. ex) 군명을 큰 소리로 복창할 것을 요구하는 군사 교련. 어떤 발언은 학문이 아니라고 잘라내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학자들의 세계.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ㅇㅇ가 아니라는 항변이 ㅇㅇ에 대한 문답무용의 단언을 추인한다는 점. “ㅇㅇ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ㅇㅇ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를 전제로 둔 뒤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두르며 회피 → 이는 결국 폭력의 타자화. 이때 타자는 말 바깥에 남겨진다.
오인된다는 것
나는 종종 아랍인으로 오인되어 대낮에 경관의 신문을 받았다. 내 출신을 알면 그들은 황급히 변명하곤 했다. “마르티니크인과 아랍인이 다르다는 건 우리도 잘 알지요”라고. 나는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랍인을 모르는구먼.”
- 이때 중요한 점
- 경차관의 “잘 알지요”라는 말은 신문한 뒤의 변명이다. 신문은 이미 작동하고 난 뒤이다.
- 파농이 말한 ‘내 출신’ 인 마르티니크섬은, 역사가 복잡하지만 지금도 해외 영토로 프랑스 공화국에 속한다. 즉 경관이 “잘 알지요”라고 말한 것은 근대 주권과 그 바깥에 놓인 식민지 알제리라는, 주권과 관련된 사실 확인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단순한 편견은 아니다.
- 근대 주권과 관련된 제도를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오인하는 데에서 파농은 경관의 변명에 수긍하지 않는다. “아랍인을 모르는구먼.” 이라는 변명에 담긴 신문의 근거는, 오인을 시인한 처음의 변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 오인해도 상관없는 신문은 국가에 의해 행사된다. 마르티니크섬이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 내에 위치하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적인 나라”는 파농을 신문한다. 국가는 언제나 오인한다.
- 경찰이 늘어놓는 설명은 신문이 일어난 뒤에 사후적으로 등장하며 신문은 이미 작동했다
- ‘만일 ㅇㅇ라면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은 ㅇㅇ가 아니다’
- 여기서 다음 단계로 가면 ‘ㅇㅇ로 오인되지 않도록 하라’가 등장
- 수많은 ㅇㅇ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공동성이 부단히 확인되고 추인된다. 여기에는 늘 문답무용의 폭력이 대기 중이다.
자경단: 조선인이지?
히가 슌초: 아니다.
자경단: 말씨가 좀 다른데.
히가 슌초: 당연하지. 나는 오키나와 사람이니까 자네들의 도쿄 사투리와는 다르지 않겠나.
친구: 무슨 소리야?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오키나와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취급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여기서 히가와 친구의 설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거나 승인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의미 내용의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라 자경단이 “아니다”라는 히가의 발화를 말이라고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체검사 속에서 신체는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문답무용의 폭력이 작동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오키나와와 조선의 차이와 관련된 사실 확인의 결여가 아니다. 경계를 오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경계를 오인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작동한 것이 아니라, 말이 말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임계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히가나 친구가 신체검사를 받는 시점에서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학살을 피하지만, 이는 사실을 오인한 것이 확인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신체 거동이 된 발화를 히가와 친구가 필사적으로 말의 영역으로 되돌리려고 한 결과다. 바꿔 말하면 신문공간에서는 발화 내용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발화 자체가 허용되느냐 여부가 문제고, 문답무용의 폭력은 누구를 말해도 되는 주체로 인정하는가라는 발화 자체의 전제와 관련된다.
“아니다”라는 히가의 발화 내용 자체가 죽여도 되는 존재를 보여주는 거동이 되는 지점에서 폭력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 “아니다”라는 사실을 오인했기 때문에 폭력이 잘못 행사된 것이 아니다.
이하 후유가 기술하는 오키나와 역사
- 처음에는 ‘개성’을 축으로 놓으려고 했다. 이 개성은 일본이 아니지만 일본 제국의 일부이기도 한 것. 왜냐면 청일전쟁과 타이완 영유, 일본군의 타이완 무력 진압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우리는 일본과 다르다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하의 ‘개성’은 신문공간 안에 있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회피는 끝난다. 『고류큐』를 간행하고 13년이 지난 1924년 이하는 “개성을 표현할 자기 자신의 언어”가 없는 사태에 이른다.
- 이때의 새로운 움직임 : ‘남도인’과 ‘임금 노예’
- ‘남도인’. 이하는 그전까지 아마미를 류큐의 주변부로만 다루었는데 ‘남도인’이라는 말로 오키나와와 아마미가 근대 속에서 함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공동성을 발견한다. 이 섬들은 영토로 이야기되는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니라 신문공간 내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의 기점. 이러한 모색은 오인에 휘말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역사로서 떠안는다.
- ‘임금 노예’. 이하는 류큐처분에서 시작되는 근대를 ‘일종의 노예 해방’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개성을 표현할 자기 자신의 언어’가 없다는 지점에 이르고서 이하는 오키나와에서 나가 하와이에서 거주하는 오키나와인을 보고 ‘임금 노예’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노예.
버틀러의 사전배제 논의
동성애에 관한 군대 내 검열 문제를 다루면서 검열이 “발화가 아니라 거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 주목해서 두 가지 맥락을 본다.
- 발화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검열 제도. 법에 근거한 심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검열.
- 발화 주체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검열. 발화 주체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검열.
후자는 전자의 전제가 됨. 발화로 인정받지 못하는 발화 → 문답무용의 추방 → 신문공간
이때 중요한 점
- 배제는 법 제도 내부냐 외부냐를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과정이다. 여기서의 검열은 형성적인 권력(formative power)이고, 이 권력은 “어떤 종류의 시민을 생존 가능하게 하고 다른 시민을 생존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기능함으로써 법 자체를 생산한다”
- 폭력은 제도적 구분에 따라 동작하지 않는다. 이러한 폭력에서 오인되어 폭력에 노출되는 사람과 진짜 표적이라는 법 제도적 구분은 언제나 무효화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법에 대해 생산적이다.
- 하지만 버틀러는 ‘사전배제’가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절단선을 움직이기 힘든 구조로서가 아니라 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즉 이를 계속적인 역학으로 생각해야 하며, 이때 배제는 “주체가 살아가는 내내 계속해서 주체를 구조화”하며, “게다가 이 구조화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말의 소재를 확보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확보될 말은 기존 언어 질서로의 회귀라는 문제도 끌어안게 될 것이다.
거기서 사전에 배제된 사람들은 “의식 속에 들어올 수도 없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얼굴 혹은 목소리를 갖고 신문공간에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공간은 실로 “권력의 생산 형태”이지만 그와 동시에 기존 주체들은 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성적인 목소리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물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산리즈카의 여름』 명사에서 동사로의 전개, 움직임 이전의 움직임 = 방어태세. 무기를 들 용기와 올바른 정치를 해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방어태세를 취하기는 어렵다. 신문공간 속에서 생기는 타자와의 만남과 거기서 생기는 풍요로운 말의 소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무기와 해설 사이. 무기의 문제로 함몰되는 것과 올바른 해설이 사회를 만든다고 전제하는 것은 공범 관계다.
휘말리다/떠맡다/타자와의 만남
- 아직 등장하진 않았지만 대기 중인 폭력을 미리 예감하고 뿌리치기. 지배의 반작용으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상황을 앞질러서 구성해나가는 능동적인 전개, 지각이자 현실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아는 일. 이 지각은 말을 낳는다. 그리고 말은 신문공간에서 타자와의 만남을 낳는다.
- 인간이기. 사물에서 인간이 된다는 선언. 말은 여기서 재개된다. 파농은 인간이기라는 선언을 개인의 자립이 아니라 ‘노예가 되고 린치에 희생된’ 이들의 연결을 ‘내 몸에 떠맡는’ 것으로 그린다. 마르티니크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을 회피하겠다는 불가능한 희망을 품지 않고, 신문에 노출되어 있는 복수의 신체들과의 연결을 떠맡는다.
-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안다는 행위는 분석자가 사는 세계와 알아야 할 대상의 세계를 구분하여 자신이 휘말릴 일 없는 대상을 구성한다 → 아무리 양심적으로 오키나와의 피해를 이야기하더라도 거기서는 오키나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숨은 메시지가 들려온다. 그러나 옆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다. 대상을 안다는 행위는 그 대상에 휘말리는 일이기도 하다.
떠맡는 것의 어려움: 사후성이라는 문제
- ‘옆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폭력이 일어난 뒤다. 폭력이 남긴 흔적은 트라우마, 회피, 개인의 증상으로 이해된다. 오키나와 전투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체험자는 말할 수 없다기보다는 “정해진 노선을 달리는 열차처럼” 명확히 말한다. 여기서 명확히 이야기된 사실만을 안다는 것은 ‘회피’를 사실로 추인하는 일이다. 혹은 거기에 숨어 있는 상처를 사실로서 드러내고 언어화하는 것이 안다는 행위라면, 그것은 파농이 말한 고문의 재판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신문공간에 대한 무의식적인 추인이 된다.
- 휘말리고 떠맡는다는 것은 고문의 재판을 야기하는 신문의 폭력성에 대한 해설도 아니거니와 진실을 위해서는 약간의 폭력성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되레 뻔뻔하게 나가는 것도 아니며 환자로서 치료하는 것만도 아니다.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휘말려 그것을 “이미 남의 일이 아닌” 것으로 떠맡으려면 신문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닌 곳에 안다는 행위를 확보해야 한다.
다초점적 확장주의
- 정신병이 체현하는 금지 영역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난로)로 바꾸는 운동. 초점이라는 말에는 금지와 난로라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다. 배제나 폭력을 당하는 수동성, 자발적으로 난로에 모여드는 능동성이 모두 초점에 섞여 있다. 동시에 난로라는 장소가 그 장소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금지 영역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면, 그러한 금지 또한 난로로 바꾸어나가게 된다.
- 기존 세계는 중얼거림을 금지하고 방어태세를 취한 사람들을 병자로 처리하거나 범죄자로 조치한다. 난로는 금지된 영역이 되며 거기서 생겨나는 말들은 신문공간 속에서 거동이 되고 증상이 된다. 하지만 휘말리고 떠맡으면서 방어태세를 취한 사람들은 난로에 모여들어 말하기 시작하고, 말함으로써 계속해서 방어태세를 취한다.
정체불명의 흐물흐물한 원념. 말로 표현할 재주가 없음 - 흐물흐물한 원념을 표현하고 전달하려면 흐물흐물한 채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표현은 질서를 뒤흔들고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산다. (163p)
광기를 윤리적인 올바름이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환원하지 않기. 운동의 확대를 단지 명확한 주장에 찬동하는 동아리로 축소시키지 않고, 올바름을 주장하는 개인을 낭만화하지도 않기 (174p)
나는 왜 광인인가. 나 같은 광인이 오키나와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나를 광인이라고 부르는 지식인은 왜 오키나와 인민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가. 정상적인 인간은 지능이 낮은 나 같은 인간이 이론적으로 오키나와 인민의 권리를 호소할 수 없으므로 칼을 들고 표현한 것을 단순한 광인이란 말로 정리해도 되는가 / 정상적인 인간이여, 제대로 좀 하십시오. (1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