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독서 2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너무 논픽션만 편독하는 거 같아서 일부러 소설 비중을 맞춰보려고 하지만, 결국 내가 고른 논픽션만 재밌고 소설은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 이 슬픈 현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엔 전혀 잘못이 없었는데 마지막까지도 흡인력 있게 읽지는 못했다. 물론 후베르트와 에바, 주인공이 형성한 가족 아닌 가족 같은 분위기는 내내 좋은 느낌을 줬지만.
스카팽의 간계
몰리에르 희극을 처음 읽어보았다는데 의의를 둔다. 첫 장에 있는 “1671년 5월 24일 파리 팔레루아얄 극장에서 프랑스와 나바르의 주군이신 국왕 폐하의 극단이 초연하다.” 문구가 멋졌고, 줄거리는 사실 깔깔 코미디 그 자체라서 연극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크게 할 이야기는 없다 ㅎㅎ 몰랐는데 작년에 국립극단에서 극 『스카팽』을 올리기도 했던 모양.
다클리
고딕 문학에 대한 비평서일줄 알고 샀는데 그것보다는 흑인인 저자가 고딕 문화와 교차하며 겪었던 횡단이 주 내용이었다. “흑인성”이 메인 키워드이기 때문에 퀴어 서적의 느낌도 조금 나고, 생각지 못한 좋은 문장도 많아서 재밌게 읽었지만 학술서나 비평서의 문법을 기대하고 사면 실망할 것.
제자리에 있다는 것
이직을 앞둔 지금 읽어보면 재밌을 거 같은 제목이라 집었는데 애매~했다. 참으로 애매. 책은 전혀 잘못이 없었고 취향에 맞는 사람이 읽으면 아주 좋아할 구성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초반 1/3 쯤을 지나는 지점부터 서서히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다. 어딘가 미묘하게 내 취향에서 벗어나 있다. 철학자가 쓴 에세이집이 갖는 그 미묘한 위치 때문일까? 그러니까 나는 철학 자체를 떠먹여주고 목표 지점을 향해가는 이론서를 좋아하지, 철학자가 에세이스트 자아를 장착하고 쓴 문학적 사유에는 관심을 못 갖는 거 같기도…
하지만 취향 스트라이크 존에 100% 맞지 않았던 내게도 확실하게 발휘된 장점이 있었으니, 이 책이 조르주 페렉을 소개해준다.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와 『공간의 종류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는 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이 책의 최고 매력.
오랫동안 나를 정의해 왔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예전 모습대로의 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왔던 모습대로의 나를 배반한다는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 어쩌면 그것은 표류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기꺼이 스스로 방향을 잃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항상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목적지의 부재는 해방의 첫 단계일 수 있다. (13p)
나는 목록에서 내 이름을 찾는다. 드디어 내 이름이 보인다. 나는 내가 목록에 있고, 목록 중 일부이며, 새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일원일 수 있어서 안도한다. 그러나 거기 기입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왜곡이 필요했을까? 어떠한 가식, 부자연스러운 연기, 책략이 필요했을까? 차라리 “목록에 올릴 수 없는” 존재가 되길 꿈꾸는 게 낫지 않았을까? (31p)
누군가가 우리를 예전의 자리로 영원히 되돌려놓으려 한다면, 우리의 출발을 일종의 배신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출발을 동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인하는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좁은 시야 너머의 가능성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을, 소도시, 지역을 떠나기. 대도시로 출발하고, 서울에 “올라가고”, 외국에 살기. 이러한 자리옮김을 통해 우리는 자리가 바뀔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며, 자신이 제자리에 있다는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불안을 자극한다. (46p)
불손함은 그러므로 제자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자리를 얻고자 하는 야망이자 갈망, 욕망이고, 우리와 어울리는 자리, 우리를 나타내고 표현하는 자리를 직접 창조하겠다는 각오다. 우리의 치수에 맞는 자리, 야망과 장점, 능력의 크기에 맞는 자리를 말이다. (75p)
가스등
아무튼 희곡은 배신하지 않는다. 희곡은 어지간해서 재미가 없을 수 없다. 특히 2025년 기준으로 너무 남용된 나머지 틈만 나면 오용되는 단어 리스트를 꼽자면 TOP 10 안에는 들 거 같은 단어 ‘가스라이팅’의 기원이 되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으면 이러나 저러나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표제작인 『가스등』만 읽었고 나머지는 못 읽었지만, 언제든 손만 대면 단숨에 읽어나가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디아스포라 기행
올해 초에 알라딘에서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책” 기획이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하는 106명의 사람들에게 21세기 최고의 책을 꼽아달라고 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목록을 한 페이지에 담았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이삭 줍기하듯이 ‘나도 이거 읽어야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내가 뽑은 한 권이 서경식 선생님의 『디아스포라 기행』이었다. 물론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고 한참을 냅뒀던 이 책을 실제로 사게 된 건 서점에서 우연히 펼쳐봤을 때 오스나브뤼크라는 키워드를 봤기 때문이었다. 마차살 독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먼트여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샀다.
8월에 동해 여행 가면서 갖고 갔던 책 중 가장 만족도가 높았고 재밌게 읽었다. 뭐… 다른 말은 크게 보탤 게 없다.
동료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조선인인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41p)
여행지에서는 즐거움보다 우울과 고통을 느끼는 때가 많은데 그건 젊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43p)
거짓말 같지만 그로부터 18년이 흘렀다. 그날 찬바람에 떨며, 나는 세상을 바꾸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52p)
일본을 떠나기 전에 “영국에 가는데 묵는 호텔이 미국 대사관 부근”이라고 했더니 “자폭 공격의 표적이 되니까 테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가까이 가지 말라”며 정색을 하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불운을 한탄하지 않을 자신은 없고, 공격한 자를 증오하지 않을 자신도 없지만, 그 운명을 끔찍하게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는 충분히 그와 같은 죽음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폭 공격이라는 행위가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한, 내가 거기에 말려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나는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살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기득권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종사하면서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개척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무력함 때문이다. (65p)
인간은 또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귀족과 노예, 지주와 소작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구도로 인류사회학을 이해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 해방을 지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서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노예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왜 검은 피부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났는가? 근대 이후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생의 우연성’과 연관되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81p)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한가. 아무리 해도 더 자연스럽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 원인이 나 자신이 외골수여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자의식이 너무 강한 것 같은 나 자신을 애처로워하고 미워했다. (132p)
조양규는 북조선을 ‘지상의 낙원’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곳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애개 ‘공중에 매달린 상태’일 뿐이었다. 예술가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진정한 인간적 삶을 찾아 그는 도약했던 것이다. (1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