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예찬

주제 하나를 잡고 길게 파고드는 책이 아니라 여러 주제에 대한 저자의 단상을 모은 책이라 집중력도 주제 따라 같이 왔다갔다하며 읽었다. 저자가 신경생물학자인지라 모든 주제를 신경생물학에 엮어서 말하는 게 인상적이고, 원저가 1976년에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내용도 현대적이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책 제목인 ‘도피 예찬’과 실제 책의 텍스트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있지 않나… 일단 저는 이걸 예상하진 못했어요.

때로는 가족의 개인주의가 집단의 집산주의보다 매력적인 다형성을 지닌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기가 좀 더 쉬운 이유는 아버지가 집단의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87p)

인간이 자유라는 개념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우선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안정감을 얻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을 좋아한다. 사실 우리는 책임을 진 대가로 공부를 인정받고, 그에 따라 사회 구조가 부여한 지배력으로 더욱 탄탄한 사회 구조를 만드는데 이바지한다. (107p)

우리가 자유라는 개념을 버리면 즉시 아무런 노력이나 언어적 속임수, 인간주의적 권고, 자기 초월 없이도 관용이라는 아주 단순한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110p)

타임 셸터

치매 환자들이 말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그들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과거를 재현해주는 기술에서 출발하는 SF 소설. 소설 안에서 다뤄지는 유럽 현대사가 확실히 어려웠고 나중엔 조금 설렁설렁 넘기면서 읽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 과거를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 나머지 아예 국가 단위로 과거 회귀를 하는 전개에선 좀 아득했다. 실제로 이들을 먹여살리고 있는 1차 산업 노동자나 이주민들, 모두가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는 듯 보이는 그 ‘과거’에 제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하지만 최근 사회 돌아가는 걸 보면 꼭 대단한 기술 없이도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걸로 보인다. 이미 돌아가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진 사회적 합의가 됐지, 생각했던 차별과 응징이 다시 살아나고 있고 이만하면 기본적인 민주주의는 다 일군 줄 알았는데 매일 나오는 뉴스 속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도 브렉시트 사태를 보고서 시계추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선.. 더할 나위 없이 시의적이었던 SF.

홈리스를 보면 가우스틴은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사랑과 두려움,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었고 항상 그 두 감정의 조합이었다. 누구나 자신이 이미 되어 보았거나 앞으로 될 것 같은 것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듯이 그는 홈리스를 사랑하고 두려워했다. (17p)

미르차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만을 기억했다. 그는 사회주의도, 공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끝없는 당 집회나 만찬이나 행진, 추운 창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그의 정신이 아직 작동하던 시기에 다 지워버렸다. 기억 비우기가 시작되면서 젊은 시절에 동경하던 (달리 말할 여지가 없는 정확한 표현이다) 것들만 남았다. (69p)

때로는 홈리스도 찾아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복장을 합니까? 나는 반짝 흥미가 솟아 물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따뜻하고 깨끗한 특정 시대의 복장을 드립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옷을 갈아입고 싶어하지 않아요. 자기 모습 그대로 있기를 원하니까요. 그분들도 말씀하시죠. 언제든 부랑자는 있었잖아요. 우리가 어느 시대에 필요한가요? 물론 맞는 말이지. 나는 나중에 생각한다. 홈리스에겐 역사가 없다.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역사 밖 존재, 소속 없는 존재다. (123p)

민족-국가가 우리에게 뭘 주죠? 내가 누군지 안다는,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 칸 아스파루흐부터 즐랏나에센 쿠키의 맛까지 - 같은 기억을 간직한, 나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안심을 주겠죠.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다른 것에 대한 망각을 공유하기도 해요. 민족이란 같은 것을 공동으로 기억하고 있기로 합의 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에르네스트 르낭, 19세기에 그렇게 말했지. 내가 전에 수업에서 가르쳤잖아. K가 재빨리 대답한다. (249p)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인 ‘나’가 책 후반부에서 치매를 앓기 시작하며 점차 기억을 잃고 서술의 흐름도 같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기이하게 매력적이었다. 요즘 이런 소설의 구조에 관심이 있어서, 정신 또렷한 주인공이 기승전결을 매끄럽게 잇는 게 아니라 그 사이 틈새에서 재미를 느끼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그걸 위해 언젠가 읽어보고 싶은 책이 『담화의 놀이들』.

전문가들의 사회

이반 일리치를 추천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재밌었다. 이 내용으로 500페이지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독자로서의 나는 물론이고 어느 분야에선 전문가로 호명될 나에게도 필요한 내용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다른 책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

나는 사회 비판의 주된 방향이 또 다른 전문가주의나 더 철저한 전문가주의를 지지하는 데서 벗어나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하고 계도하는 태도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술 전체주의로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가령 테크놀로지를 환경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한다면 불평으로만 그치지 말고 엔지니어들로 하여금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의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을 탐욕스러운 의사나 부주의한 간호사에게만 지운다면 환자가 입원을 통해 과연 이익을 얻는가 하는 원론적 문제는 결코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17p)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고 처방할 권한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좋은 것을 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를 실제로 선포하기까지 한다. 고소득이나 오랜 훈련기간,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직무는 전문가의 표식이 아니며 사회적 지위 역시 표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고객으로 정리하고 그 사람의 필요를 결정하며 그 사람에 대해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야말로 전문가의 표식이다.

어떤 권위주의 체제라 해도 노동자는 특정 사항에 대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남북 전쟁 이전에 남부에서조차 노예들은 일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제한적 통제가 가능했다.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 허울과 권위주의의 통제가 경쟁할 경우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로 한정되고 만다. 직무 충실화로 인해 작업 현장이 보강되고 민주적 요소들이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그 목적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조직을 더 관리하기 쉽게 만들려는 것이지 조직을 기초부터 민주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166p)

낭만적 거짓과 소실적 진실

사슴님의 유튜브 라이브에서 추천받았던 책. 욕망은 원래 삼각형이잖아요 하면서 이 책을 언급하셨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직 다 읽진 못했는데 그래도 쓰긴 해야 할 거 같아서.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처음 만든 게 이 책의 저자인 르네 지라르로, 개념은 단순하다. 현대 사회에서 A(주체)가 B(대상)를 욕망하는 마음은 A의 내면에서 자연발생하는 일이 잘 없고 반드시 중개자 C를 거친다는 것이다. 별로 갖고 싶었던 물건이 아닌데 친구가 자랑하거나 SNS에서 바이럴이 되면 나도 모르게 혹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쉽다. 책에서는 이 욕망의 삼각형 개념을 먼저 제시한 다음 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프루스트, 도스트예프스키의 작품을 일렬로 나열해 이들의 작품에서 욕망의 삼각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 땐 어떻게 되고 멀 땐 어떻게 되는지 등등을 설명한다. 책 제목이 정말 강렬한데 ‘낭만적’과 ‘소설적’은 각각 ‘실존주의적’과 ‘사실주의적’으로 치환해서 보는 게 의도한 의미에 좀 더 가까울 듯하다.

읽다 보면 소설 속 음식 묘사를 사랑했던 나날이 생각난다. 왜 그런 묘사는 실제 음식의 맛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질까. 정작 묘사에 혹해 음식을 먹었을 때 기대한 만큼 맛있지 않아도 묘사보다 내 경험을 부정하게 된다. 이 비슷한 얘기를 책에서도 다루는 게 재밌다. 또 어릴 땐 『마담 보바리』가 정말 별 거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플로베르가 현대 소설론에서 이렇게 중요한 사람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내팽겨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지금 와서 다시 읽기엔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서…

인쇄된 텍스트는 암시의 마술적 효력을 지니고 있는데, 소설가는 우리에게 그 예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어머니가 화자를 샹젤리제로 보냈을 때, 그는 처음에는 이 산책을 매우 따분하게 여긴다. 어떤 중개자도 그에게 샹젤리제를 지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베르고트가 그의 책 가운데 하나에서라도 샹젤리제를 묘사했더라면, 당시 사람들이 내 상상력 속에다 그 복사본을 넣기 시작했던 모든 것처럼 나는 아마도 샹젤리제를 알고자 하는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끝부분에서 공쿠르 형제의 『일기』를 읽게 되고 나서 베르뒤랭 살롱이 나중에 변형된다. 베르뒤랭 살롱은 이전에 어떤 예술가도 그것을 묘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자의 머릿속에 매력적인 존재로 비친 적이 없었다. (77p)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속물만이 특별히 우리의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답변을 강요받는다면, 속물의 모방의 자의성이 우리의 비위를 거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애의 모방은 그것이 실재하는 열등함에 근거하기 때문에 눈감아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이는 어른이 지니는 물리적 힘도, 경험도, 수단도 지니고 있지 않다. 반면 속물에게서 우리는 이렇다 할 아무런 열등함도 발견하지 못한다. 속물은 비천한 자가 아니지만 스스로를 비천하게 만든다. 모든 개인이 ‘법적으로 자유롭게 평등한’ 사회에서 속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서만 속물이 존재할 수 있다. (125p)

사실 욕망에서는 성스러움에 대한 거대한 굶주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허위이고 연극적이며 인위적이다. (138p)

쥘리앵은 자신이 가진 만큼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 가치는 초기에 거둔 성공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를 출세하게 만드는 당사자들에게는 정작 그에 대한 진정한 관심도 진실된 애정도 없다. 그들은 이 젊은이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해줄 수 있는지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쥘리앵에게 급료를 인상해주고 장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그들의 경쟁심이다. 그를 라 몰 저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이 경쟁심이다. 실제의 쥘리앵과 베리에르의 두 명사가 놓칠세라 서로 경쟁하는 쥘리앵 사이에는 이발대야와 맘브리노의 투구 사이에 존재하는 만큼 큰 차이가 있지만, 그 성격은 다르다. 환상은 돈키호테의 환상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상이 신빙성을 얻게 된다. 진짜 부르주아는 기분에 거슬리는 시시한 말들만 믿는다. 심지어는 그런 말들을 모든 진실의 기준으로 삼기까지 한다. 이중 간접화에서는 대상을 욕망한다기보다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갈까봐 두려워한다. 부르주아가 아주 긍정적이기를 희망하는 세계의 다른 요소들처럼, 욕망하는 대상의 변모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1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