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4분기 애니메이션 결산
엘리멘탈
엘리멘탈이 2023년 영화였다는 걸 까먹을 뻔했다. 사실 나한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볼 때는 어쨌건 역동적인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들의 귀여움에 빠져서 재밌게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트친들과는 감상의 온도 차이가 극심했는데,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역시 아시안 가부장제 가정에서 아버지 의견을 여지 없이 한방에 꺾으려면 동네 일대에 홍수 정돈 나야 한다는 거였다. 주인공들이 합심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면모를 보여 주기에 그 홍수는 적절한 소재였지만, 실제 K-딸내미들이 겪는 수난은 그렇게 극적인 사건 하나와 ‘너를 잃을 뻔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 같은 극적인 이해의 선물 세트로 구성되지 않는데.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웨이드가 결국은 엠버의 아버지에게서 승인을 받는 장면도 글쎄,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인계해 주는 연출과 뭐가 다른가 하는 삐뚤어진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굳이 아버지로부터 승인 받지 않아도 엠버는 본인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나. 결국은 가부장제 정상 가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끝나는 영화라 그게 아쉬웠다. 물론 처음부터 나 같은 관객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웨이드 캐릭터가 너무 귀엽다. 이 영화의 가장 치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한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누가 옆에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라고 외치면 냅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만 치고 싶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냐구요? 그건 이거랑 비슷한 영화 몇 편 더 주시면 그거까지 보고 생각해 볼게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할아버지. 저는 다시 생각해도 주인공의 판타지 여행기보다 2차 대전이라는 시대 배경, 주인공이 떠나 온 으리으리한 저택과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쪽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 왜가리 포스터도 거진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블루 자이언트
재즈가 너무 뜨겁다. 농놀 열정이 조금만 덜했어도 아마 내 다음 덕질은 블루 자이언트였을 것이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초반부 내용에 약간의 각색을 더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참고로 원작 만화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나온 전권을 사뒀는데 역시나 농놀이 바빠서 한 장도 읽지 못했다. 그냥 적당히 내 취향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다 읽고 음, 정말 재밌었어 하고 덮을 텐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어서 시작에 큰 각오가 필요하다. 읽고 나면 아마 최소 두 달은 재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겠지.
젊음, 열정, 노력과 패기 등등을 다루는 청춘물이라는 점에선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동류인데 퍼슬덩보다는 세계가 좀 더 냉혹하다. 영화관에서 세 번 봤는데 아직도 ‘그’ 장면에서는 눈을 돌리게 된다. 처음 관람할 때는 줄거리를 아예 모르고 갔으니까 오로지 감으로 짐작했다. 이거 왠지 불안하다, 자꾸 저 장소 저런 장면을 보여주는 게 나 왠지 이 다음을 알 거 같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지. 그런데 원작 만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말하길 그 장면은 원작이 한 수 위란다. 어떻게 영상보다 한 수 위일 수 있지. 대체 뭘 보여주길래…
이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웃는 포인트는 3D 애니메이션. 나도 처음엔 풍선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다 빠져서 춤을 썩 신명나게 추지는 못하는 주유소 풍선 인형. 하지만 그 흐느적거림에 웃는 건 잠깐이고 모든 걸 불살라 버리는 재즈의 기개에 눈물 주룩주룩 흘리며 보는 시간이 훨씬 길다. 저도 처음 두 번은 유키코 씨 울 때 같이 울었습니다. 이 모든 건 역시 우에하라 히로미의 OST 덕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