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히 남은 인상은 유리의 퀴어 정체성이었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찐이었다! ‘저는 일반이구요 얘는 이반이에요’ 가 그냥 나온 대사일리가 없지. ‘언니, 가고 싶어요?’ 라니 세상에 마상에. 캐롤이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동성애를 금단의-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운-영역으로 다루는 영화들만 보다가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평범하게 솔직한 대사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 같이 간 친구들 앞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같이 본 친구들 중 한 명이 ‘그걸 굳이 퀴어로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다 양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 사춘기 시절에 지나가는 감정이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내 감상은 내 안에만 간직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 먹었다.

  • 은희는 너무 평범하다. 사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평범하고 사실적인 캐릭터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애들은 몰라도 돼’ 하면서 쉬쉬해도 이미 다 눈치챈 가족의 균열, 지금은 흑역사 취급이지만 당시엔 분명 진지했을 연애, 왔었는지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감정,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애매한 다툼, 어느 날 갑자기 맨몸으로 맞이하는 폭풍우 같은 사건. 요즘 유행은 이세계와 각성, 히어로와 빌런이건만 은희는 어느 한 장면에서도 선명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은데 지완이의 태도는 미지근하기 짝이 없고, 먼저 저돌적으로 다가와준 유리에게 겨우 마음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칼같이 거절당했고, 부모와 오빠가 휘두르는 폭력은 은희의 반항으로 잠깐 멈칫했을 뿐 거기서 종료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너무나 무력한 재난마저 찾아온다.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사건으로 인해 친구를 잃은 언니 수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 일은 여태 영화 안에서 계속 등장했던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의 끝판왕 상징과도 같다.

  • 친구들은 왜 은희네 오빠나 아빠가 우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난 거기에 대해서도 입장을 표명하지 않기로 했다. 이 영화의 눈물씬은 나를 무력하게 하고 동시에 화나게 했다. 정작 이 일로 울어야 하는 당사자들은 (큰 수술을 해야 하는 은희, 친구를 잃은 수희) 울지 않는다. 이미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파도를 수없이 맞아서 대응할 힘을 잃은 거라고 볼 수도 있고, 그간 닥쳐왔던 수많은 파도 중 굳이 이 파도에만 울어야 할 이유를 못 찾은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사자들은 이 일이 울어야 하는 일이라는 감각 자체가 없다. 그런데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옆에 앉아있던 아빠가 엉엉 울고, 오빠가 눈물을 흘린다. 누구보다 힘든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 함부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도 없는 걸까. 그런 예의범절보다 자신의 감정, 자기연민, ‘나의 생은 왜 이리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일까’ 하는 심미적 성찰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나도 사실은 약자야’를 어필하고 싶었던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다. 지금 당신들 앞에, 옆에 앉아있는 것은 당신들이 권력과 폭력을 성실히 휘둘렀던 피해자들이다.

  • 영지 쌤에 대해. 나는 영지 쌤의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저런 선생님이 어딨어. 저런 선생님이 내 인생에도 있었더라면 지금보단 더 올바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구요. 그리고 한편으로 은희와 영지쌤의 관계도 찐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포커스가 그 쪽이 아니어서 그렇지 이거 누가 봐도 새드엔딩 첫사랑 스토리 아니냐구요.. 암튼. 영지 쌤은 은희에게 날갯짓을 가르쳐준다. 가족이 너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당하고만 있으면 안 돼.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은희도 당연히 폭력은 나쁘고 오빠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한 발 나아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 한 발을 딛을 수 있도록 은희를 지지해 준 것은 영지 쌤의 차분함과 단단함이다. 은희에겐 아주 커 보이는 일을 작게 받아들일 줄 아는, 언제나 은희가 찾아올 수 있도록 차를 달이며 기다려주는 어른의 존재. (그런데 영지 쌤 나랑 나이 비슷한 거 아닌가..? 역시 판타지야)

  • 후반에 은희가 ‘나 성격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다고!’ 를 외치는 장면이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오늘 상담센터 가서 상담 받으면서 알게 된 건데 나는 나를 상당히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탓에 어긋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나도 모르게 무던히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와서 상담 내용을 곱씹어 보다가, 어쩌면 나도 그 때 당시에 ‘나 성격 안 이상하다’를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않아서, 날갯짓을 포기해 버려서 그 때부터 무기력해졌고 그게 지금의 나를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히고 있는 게 아닐까. ‘벌새’의 날갯짓이 그런 의미인가.

  •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