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터 색채가 너무 화려해서 영화도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 지레짐작했는데 내 예상은 와장창 무너졌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너무 마음아파서 모른척 눈을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잔뜩인 영화였다.

  • 자기 팀으로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한 명씩 데려가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는 선이. 선이에 대한 설명은 이 장면 하나로 충분하다. 공격적인 따돌림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친구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학급에 한 명도 없는 선이. 머리 모양도 유행보다는 부모님이 생각한 단정한 스타일에 가깝고, 특출나게 불행하진 않지만 흔히 ‘어린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법한 순진하고 행복한 이미지와도 거리가 있는 선이.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너무 어린 선이. 등장하고 몇 장면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익숙하고 쉽게 이입돼서 마음 아픈 선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 학기가 끝나는 날 전학생 지아가 등장한다. 선이는 단지 운과 타이밍이 따라주지 못해 친구가 없었을 뿐 성격은 모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아와 쉽게 친구가 된다. 비록 지아가 문구사에서 색연필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면 안되지!’ 라고 말하는 장면은 좀 아찔했지만. 나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쁜 짓 같이 하면서 친해지는 게 수순인 건 여전하구나 싶었고, 색연필을 훔친 지아가 잘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이가 화를 낸 탓에 둘이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지? 가 걱정되어서 슬펐다. 게다가 결국 이 훔친 색연필은 후반부에 둘의 사이가 틀어지자 갈등의 소재로 사용된다. 훔쳐서 선물로 준 색연필이었는데, ‘빌려준 거였는데 왜 안 돌려줘’ 가 됐다가 ‘너 사실 그거 훔친 거잖아’가 됐다가.. 너무 숨막히고 너무 내 얘기다.

  • 선이가 사실 학교에서 왕따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건 알자마자 지아는 선이에게서 등을 돌리고 가해자가 된다. 선이가 베풀었던 수많은 선의에서 미처 채우지 못했던 틈을 전부 끌고 와 사과를 요구하고 화를 낸다. 선이는 지아가 왜 이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아와 친해지면 좋겠다고 바라는 선이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이라서, 교실 안의 교우관계라는 거대한 틀을 제 힘으론 벗어날 수 없는 선이가 너무 안쓰럽게 느껴진다.

  • 하지만 그 다음 장면에서 선이는 옛날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지아가 계속 선이를 괴롭히다가 결국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순간 (부모는 건드리는 거 아니랬는데!) 선이는 분노하고 화를 낸다. 그 결과 둘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고, 이제는 지아가 제일 밑바닥의 왕따가 된다. 이 장면에서 난 내가 선이가 아니라 선이가 되지 못한 지아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고,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화를 낼 수 있었던 선이의 올곧음이 너무 부러워졌다. 이유 없는 괴롭힘에 함몰되지 않고, 가해자들을 불필요하게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선이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선이의 가족에게 도달하게 된다. 부족함 속에서도 선이를 모른 척 하지 않는 가족들,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는 동생, 조건 없이 받을 수 있는 애정. 또 지아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그런 류의 애정이다. 할머니가 쏟는 애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기에 (사실 할머니는 영화 내내 지아에게 학원 가라는 소리만 계속 해서 확실치도 않고) 엄마가 외국에 있고 자기도 외국에 가봤다는, 친구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경험담이 아니면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를 찾아 한참을 비틀대던 지아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다시 선이와 눈을 마주하게 된다.

  • 나는 과거의 나를 극복한 것일까를 혼자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나는 예전보다 더 지혜로워 진 걸까,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때 그 문제들을 좀 더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내 궁금증에 이 영화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나는 결국 선이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다시 초등학생이 되어 저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또 똑같이 지아가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선이를 만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또 모두에게 선을 긋고 혼자 책을 읽겠지. 시간이 흐르면 다 잊혀지고 해결된다는 말은 대체로 거짓말이다.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고 그 자리의 나는 지금의 나로 곧장 이어진다. 난 아마 선이가 되려고 부던히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저 올곧음 근처에도 못 가볼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