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브르 사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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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개봉했던 흑백 영화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재개봉했다. 고다르 감독도 누벨바그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보러 갔다. 혹여나 이 영화를 보고 얕게나마 이런 게 누벨바그구나 알게 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기대 정도. 물론 결과적으론 공부를 쉽게 하고자 했던 내 나태함을 다시금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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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주인공 나나의 이야기를 열두 챕터로 나누어 보여준다. 그리고 각 챕터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단절되어 있다. 챕터 1과 챕터 2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공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영화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기억을 떠올릴 때 인상 깊게 남아있는 몇 순간을 기억할 뿐 그 사이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나나가 떠올리는 자기 자신의 기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각 챕터가 하나하나 분리된 이야기로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나나의 서사에 몰입하기 보다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나나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처음엔 함부로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같다는 생각도 했으나, 나나의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인 것은 물론이요 이 영화에 나나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나나가 관객과 분리된, 영화 속에 등장하는 타인이라는 점을 마지막까지 상기시키고, 이는 곧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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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서 챕터 1의 연출도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는 의도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챕터 1에서 우리는 나나와 그녀의 남편 폴의 대화를 보게 되는데, 카메라는 딱 두 가지 구도만을 고집한다. 나나의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폴의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나나가 말을 하고 있을 때는 나나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폴이 말을 하고 있을 때는 폴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두 인물의 대사가 겹친다는 것이다. 한 인물의 대사가 끝나고 다른 인물의 뒷모습으로 화면이 바뀌면, 그 직전에 했던 대사를 한 번 더 들려준다. 가령
나나: 대사1
나나: 대사2
폴: 대사3
폴: 대사4 ...
가 원래 대화라면, 영화는
(나나의 뒷모습을 화면에 보여주고)
나나: 대사1
나나: 대사2
(폴의 뒷모습으로 화면을 전환하고)
나나: 대사2 (를 한 번 더 들려주고)
폴: 대사3
폴: 대사4
로 구성해서 보여준다. 챕터 1 전체가 그렇다. 나는 이 구성을 보면서 나나와 폴의 대화가 마치 종이를 겹쳐 포개듯 쌓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어떤 대화든 그 안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의도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결과물과 그에 대한 상대방의 리액션 뿐이기에, 우리의 의도가 정말로 잘 전달된 것인지, 또 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명확히 캐치한 것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운 좋게 전달에 성공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모든 대화를 벽 보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또 대화의 참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대화의 이면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챕터 1은 그것을 영화의 연출로 표현해 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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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1에서 나나가 어느 중년 남자와 만나 나누는 대화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대화 자체가 철학적이고 어려워서 사실 내용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영화를 제대로 볼려면 그 정도 기억력은 갖춰야 하는 걸까?) 완전히 성매매 산업 종사자로 전락해 버려 이젠 배우의 꿈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던 나나가 여전히 복잡한 생각과 어지러운 심경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고 둘의 문답은 꽤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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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는..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 다시 만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