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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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철저하게 제목에 충실한 영화다. 러브리스(loveless), 사랑이 사라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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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지금 시점에 사랑과 소통이 상실된 시대에 대해 말하는 건 약간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두번 들었어야 말이지. 요즘 점점 더 정과 대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걸. 그래서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러브리스’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자 한다면 나는 5점 만점에 5점은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5점은 줄 수 없었다. 물론 이건 개인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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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부부는 영화 내내 자신의 배우자를 끔찍하고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아직 이혼을 하기 전인데도 각자 애인이 있고 남편의 경우 애인과 아이까지 생긴 상태. 이 둘은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알로샤를 누가 데리고 갈 것인가를 가지고 싸우는데,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남편의 비겁함에는 나도 좀 울컥했다. 어쨌든 이 둘의 대화에 알로샤 본인의 의지나 마음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알로샤의 목소리는 이 영화 안에서 몇 번 등장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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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알로샤가 실종된다. 부부는 애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알로샤의 실종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둘은 민간 수색 단체를 동원해서 산속과 공터를 돌아다니며 알로샤를 찾아대지만, 솔직히 이 둘보다 수색 단원들이 더 열심히 찾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나 부모로서의 책임감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아들을 찾으려 시도하는 게 사회인으로서의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에, 해야 하기 때문에 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부부는 알로샤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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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고 부부는 결국 알로샤를 찾지 못했다. 아니, 알로샤가 존재했던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옅어진다. 빛바랜채 전봇대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실종 아동 전단지에만 그 이름이 있을 뿐 부부는 알로샤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애인(이었던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 애인과의 관계도 빛이 바래 있다. 남편은 애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아내 역시 애인과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 초반에 둘 다 자기 애인에게 당신만이 내 진정한 사랑이라며, 그 전의 결혼은 어렸을 때 멋 모르고 했던 실수고 너와의 관계가 내 인생의 종착점이라고 속삭이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결국 둘은 이번에도 ‘진정한 사랑’을 찾는데 실패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 걸까? 애초에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것에 실체가 있기는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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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떠오르는 영화였다. 책을 읽은 지가 오래되어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자는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찾아서 곧바로 완성시킬 수 있는 ‘발견’의 영역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뤄나가야 하는 ‘기술’의 영역이라고 말했었다. 부부에게는 이미 알로샤라고 하는,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사랑의 형태가 있었다. 그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건 부부가 어리석고 무책임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잃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채 사랑을 잃었고, 과거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새로운 애인만을 찾아 떠남으로서 완벽하게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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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동네와 산속과 폐건물을 헤집으며 알로샤를 찾는 장면이 이렇게나 길게 나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수색 절차에 따라 장소의 이동만 있을 뿐 스토리가 진행되지도 않고, 영화 전개상 결국 알로샤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결말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인데 (차라리 알로샤를 찾았으나 돌아온 아이를 아무도 반기지 않는 전개였다면 더 신선했을까?) 수색 단원이 알로샤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치는 장면을 왜 계속 봐야 하는지. 겨울의 산과 폐건물을 통해 공허하고 씁쓸한 감성을 표현하고자 했을 거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겐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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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잘 만들었지만, 나 자신의 인상에 남는 점은 없었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