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일행,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지도층, 바깥 세상을 동경했는데 알고 보니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로 이 곳에 ‘갇힌’ 것이었다는 서사 전개까지 이 작품의 초반 전개는 ‘진격의 거인’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전후 일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좁고 폐쇄적인 공간 - 일본 섬,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 - 전쟁으로 연결해 보면 굉장히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진격의 거인’과 이 작품이 전후 일본에 대한 비유라고 단정지어선 안 되지만,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정치적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주인공을 비판의 여지가 가득한 안티 히어로로 설정한 ‘진격의 거인’과 다르게 이 작품은 세계관의 상당 부분을 얼버무리고 넘어갔다는 점에서 더더욱 무언가에 대한 비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남긴다.

  • 이 작품이 전후 일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졌다면 그 비유 방식은 대단히 흥미롭다. 주인공 일행이 살고 있는 ‘모래 언덕’은 아주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장소로 묘사되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착하며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를 때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기도를 한다. 이렇게 폐쇄적인 곳에서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수렵 사회인지 농경 사회인지 등등은 거의 묘사되지 않고 대신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한 자연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모래 언덕의 사회에는 장로회와 수장이 있는데 수장은 사실상 아무 권한이 없는 상징적 존재이며 (어 이거 천황..?) 차기 수장으로 등장했다가 후반에 결국 수장이 되는 스오우는 선한 본성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다. 등장하는 모든 장면마다 아이들을 챙겨주고 있으며 무력을 행사하는 적 앞에 맨몸으로 나타나 장로를 감싸고 평화적인 해결법을 주장한다. 즉 모래 언덕 자체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낙원으로 그려지는데, 여기에 모래 언덕 사람들이 사용하는 ‘알 수 없는’ 초능력에 대한 묘사까지 합쳐지니 상당히 셀프-오리엔탈리즘 적으로 보이게 된다.

  • 또다른 위화감은 ‘오우니’에게서 온다. 오우니와 그의 친구들은 모래 언덕에서 사회의 질서를 밥먹듯이 어겨서 감옥에 갇히는 일이 비일비재한 불량패거리라는 설정인데, 이렇게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지 않나? 그런데 그 오우니 패거리가 정확히 어떻게 사회의 질서를 어겼다는 것인지, 그러니까 사람을 때린 것인지 물건을 훔친 것인지 마을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오우니 일행이 감옥에 갇혀 있는 장면만 등장했을 뿐 법 체계나 시스템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즉 약간의 굴곡을 만들기 위해 오우니와 그 친구들을 적당히 반항적인 캐릭터로 설정하기만 했을 뿐, 그들이 모래 언덕 사회의 어떠한 면을 상징하며 어떻게 대해지는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 스키로스 전함의 등장. 한번도 초능력을 싸우기 위해 써 본 적이 없는 모래 언덕 사람들은 스키로스 병사들의 이유 모를 공격에 처참히 당하기만 한다. 그 사이, 자신의 선조들이 사실 죄인이며 스키로스가 그 죄값을 물으러 왔다는 진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장로회는 수장인 스오우를 불러다 사람들을 집단 자살하도록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말을 들은 스오우의 표정이 생각보다 충격 안 받은 것 같아서 보는 내가 충격이었다. 선한 본성을 가진 만큼 더 충격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죄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죄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한 듯한 느낌. 그래 뭐 집단 자살도 참 일본스러운 거긴 하지..

  • 스키로스의 1차 학살을 겪은 후 모래 언덕 사람들은 변화한다. 여태 한번도 초능력을 전투용으로 써 본 적 없는 모래 언덕 사람들은 일주일 뒤로 예정된 다음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하는데, 그 모습이 꽤나 아이러니하다. 사람 죽이는 데 도가 튼 스키로스 병사들을 상대하기에 택도 없어 보인다는 점은 둘째 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가진 초능력은 20대 중반이 되면 약해지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주요 전력인데, 아이들이 적을 물리치겠다고 나무막대기를 들고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 아이들은 아주 성실히 최선을 다해, 마치 봉사활동에 참여한 듯한 선한 마음으로 살인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수장 스오우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연설 내용을 들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우린 슬프고 끔찍한 일을 겪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하늘과 모래 바다로 우리 모두의 마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닿았던 모든 삶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할 겁니다!” 사람들은 이 연설이 아주 훌륭했다며 박수를 치고 칭찬을 하는데, 내 귀엔 아무리 들어도 전체주의와 세뇌의 결과물로밖에…

  • 그렇기에 장로회 멤버인 라샤와 수장 스오우의 대화는 인상 깊다. 내일 있을 공격에 대해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스오우에게 라샤는 말한다. ‘이것만큼은 기억해라. 내일 저 아이들은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할 거야. 네 결정에 따라서 말이야.’ 그러자 다른 인물이 ‘너희 장로회는 집단 자살이라는 답밖에 내놓지 못했잖아!’ 라고 반박하고 스오우는 ‘이대로 모두에게 죽으라고 할 수는 없어요. 뭐라도 해야만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이대로 다 죽을 순 없고, 스오우는 수장으로서 뭐라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착하고 순수한 동화의 세계에서 살인을 납득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화는 무지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전장으로 내몰면서 목숨의 무게조차 인지하지 못한 과거 쇼와 시대 육군과 일본의 지도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정말 놀랍게도 모래 언덕 사람들은 승리한다. 친구의 죽음으로 각성한 오우니가 혼자서 무쌍을 찍었고, 일주일간 열심히 훈련한 아이들이 열심히 적군을 죽였기 때문이다. (일부러 강한 단어를 택한 게 아니라 정말로 이런 느낌이다. 중상을 입고 기어가는 적군 ‘료다리’를 보자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화살을 던진다.) 그래도 이 승리가 굉장히 비현실적이라는 걸 생각은 했는지, 중간에 모래 언덕 사람들의 초능력이 유난히 더 강력하다는 설정이 슬쩍 언급되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어보인다. 그리고 이 전투로 인한 상처가 극복될 즈음,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연합왕국이 등장한다. 항해 중에 조난을 당했다는 연합왕국의 귀족 ‘로하리토’가 등장하는데 그는 모래 언덕을 무척 신기해하며 세계 지도도 보여주고 자기 나라 문화도 알려주고 우리 나라에 가자고 먼저 제안하는 등 상당한 호의를 베푼다. 이 인물은 첫 등장에서의 의상도 굉장히 서구스럽고 하는 행동도 꼭 신문물을 전도하는 서구 국가의 느낌이 강한데… 이 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다. 처음에 모래 언덕이 전후 일본에 대한 비유로 시작했는데, 왜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서 서양 문물 전도가 나오는 걸까? 또 모래 언덕이 전후 일본이었다면 스키로스는 무엇인가?

  • 스키로스 (제국) 이야기. 제국은 감정을 죄악으로 여기고 억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고, 이 감정 통제를 거부한 죄인들이 유폐된 곳이 바로 모래 언덕이라는 진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그래서 제국에서 나고 자란 병사들은 모래 언덕을 ‘감정을 주체 못하는 죄인들이 수감되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곳’이라 배웠지만, 정작 묘사되는 걸 보면 제국이야말로 사이코패스 천지에 모래 언덕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매우 선하고 착한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제국이 왜 그런 정책을 펴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일말의 언급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명 수준은 훨씬 높지만 정과 소통이 상실된 시대라는 점에서 제국은 극단적으로 표현된 현대에 가깝고 모래 언덕은 전근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제국의 사람들의 언행에는 이해의 여지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작품 내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국인인 료다리는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워서, 이렇게 극단적인 감정과잉의 캐릭터가 왜 등장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모래 언덕이 한없이 낙원으로만 묘사된다면 제국은 그에 대비되는 지옥으로만 묘사된다.

  • 이건 순수히 내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뭐 물론 이 글 전체가 내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전쟁 이후의 일본을 상징하는 듯 했던 모래 언덕이 갑자기 제국과의 전쟁을 거쳐 서구를 상징하는 듯한 연합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이 서사는 어쩌면 모든 게 돌고 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냥 선해 보였던 모래 언덕은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고 - 잘 조명되지 않았을 뿐 오우니 일행 같은 뒷면이 있었고 - 또 아이들에게 살인을 가르치면서도 그 무게를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세 나라 중 가장 선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제국은 엄청나게 나쁘게만 보였지만 사실 그 역사나 뒷배경은 전혀 설명된 바가 없고, 알고 보면 모래 언덕 같이 아무 것도 몰랐던 사회가 때 타고 세월이 흘러 제국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연합왕국은 모래 언덕에 순수한 선의를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동정인지, 혹시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는 부딪쳐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 그런데 정말 이런 의도라면 이게 전범국이 언급하기에 적절한 메세지인지는 잘…

  • 역시 내가 과잉 해석을 한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