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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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멜로 영화 보면서 감성을 충전해볼까 하고 갔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영화였다. 보고 나서 마음이 얼얼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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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성장한 것 같은 착각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예전에 소년만화를 보면서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다. 약해 보이지만 실은 현명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주인공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다 보면 괜히 내가 벅차서, 나도 저 주인공처럼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도 그렇다. 하나하나 다 맞는 말 같고 설득이 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거기까지다. 내 개인의 성장은 전혀 다른 곳에서 꺼내와야 하는데, 지금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해 ‘성장한 것 같은 착각’에 취하는 걸로 대신해 버린다. 내가 착각에 취해있다는 걸 처음부터 자각이라도 하면 다행인데, 어떨 땐 길 한 복판에서 뺨을 맞듯이 깨달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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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사코의 그런 착각이 인상적이었다. 아사코가 두 팔을 열심히 흔드는 장면은 꽤나 만화 같았는데, 정말로 예전 기억을 극복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었다면 그런 제스처는 사실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별을 하기 위해 이별 여행을 간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 제스처를 통해 좀 더 편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내지는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드러났을 뿐, 정면으로 부딪쳐서 극복할 용기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제스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정면 승부를 걸만큼 사람은 강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속여가며 극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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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잔잔한 멜로 영화처럼 흘러오던 영화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결국 아사코는 자신이 단 한 걸음도 성장하지 못했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만다. ‘지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실은,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인 것 같아. 난 이제 눈을 떴는데,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 는 대사는 그래서 아프다. 자신을 타자화한 다음 이만하면 괜찮은 결말일 것이라 생각하여 두 팔을 열심히 흔들었겠지만, 우리 삶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결이기에 ‘결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이란 현재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를 해석하는 방법론 중 하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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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사코에게 감정이입해서 영화를 봤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는 시점에서 내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상대방에게 상처 주고 악의 없이 무너뜨리는 일을 내가 해봤기 때문에 공감이 됐던 거니까. 하지만 난 서로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뒤집어 버리는 것도 사랑의 한 과정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연인의 결말이 꼭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와 ‘결국 둘은 헤어졌다’ 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에 이 영화가 의미 있었다. 특히 요즘 인스타로 친구들의 달달한 연애 사진을 보면서 막연히 예뻐 보인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 친구들도 다 저마다의 굴곡이 있겠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는 계기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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寝ても覚めても 라는 원제를 좀 더 잘 살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Tofubeats 의 River 와 연관되는 부분도 있고, 그 의미도 상당히 중의적인 것 같은데 한국 제목은 왜 주인공 이름만 내세우고 끝난 걸까.. 하다못해 영어 제목처럼 I & II 라도 붙여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