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뭐 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서, 이참에 정리해볼까 하고 쓰는 글.

쿠베라

네이버 웹툰에서 가장 애정하는 작품 중 하나지만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애정할 만한 캐릭터들은 죄다 사망하며, 한때 좋아했던 캐릭터는 수습 불가능한 악역으로 밝혀지고 주인공은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하기 때문. 막판엔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독자들이 아직 있는 것 같지만 난 진작에 기대를 버렸다 ㅎㅎ.

이 만화의 세계관에선 신이 존재하는데 신과 인류의 관계가 좀 독특하다. 신들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인류를 돌보는 게 아니라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인류를 이용하고, 신들끼리도 인류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며 자기 목적을 위해선 수라와 손을 잡기도 하기 때문. (수라는 작품 안에서 신과 대척하는 존재) 그래서 갈수록 동료에 대한 믿음도, 신에 대한 믿음도 점점 사라지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주인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만화의 단점은 설정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본편에서 설명되는 설정도 많지만 단행본에 따로 추가되는 설정도 많고, 작가님 블로그에만 있는 설정도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무난하진 못한 작품.

가담항설

설 연휴 전날, 같은 팀 팀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추천을 받아서 보게 됐다. 이 만화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다 그 나름의 역사와 악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어서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또 문장을 잘 이해하는 독해력이 곧 능력치로 이어진다는 참신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데, 이 세계관에 대한 서술이나 여기에 연결되는 주인공들의 대사가 하나하나 걸작이다. 주인공의 대사와 철학이 훌륭한 만화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이 제격이다.

개인적으로 효과툰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님이 하는 생각이 든다. 효과툰의 피처 하나하나를 자신의 연출 의도에 알맞게 써먹는단 느낌이라 너무 대단.. 앞으로 작가님을 위해서라도 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을 죽이는 방법

만화의 세계관보다 대학원생이란 설정의 주인공이 저렇게나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게 비현실적인 만화. 대체 연구실에서 뭘 배운 거지.

신의 이름만 알면 신을 죽일 수 있는 세계관. 주인공은 고고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인데, 고고학이 더 이상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지도교수님이 잘리면서 (ㅠㅠ) 주인공도 함께 무직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신을 죽이는 이 집단에 고액 연봉 받고 합류하는 걸로 시작한다. 이 세계관에선 사람들의 믿음이 깊을수록 신의 힘도 강해지는데, 사람들이 점점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신의 힘은 가면 갈수록 약해지고 있고 도리어 신에 의한 골칫거리만 늘어나서 결국 신을 죽인다는 스토리를 택하고 있다.

이 만화 역시 신과 인류 사이의 관계성이 독특하다. 신은 신대로 ‘내가 그간 너희를 얼마나 보살펴 줬는데!’ 하고 인류는 ‘우리가 정말로 너희를 필요로 할 땐 안 도와줬잖아! 다 니네 잇속대로 행동하는 거면서!’를 반복한다. 신을 죽이는 방법과 목적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를 한 것도 아니고, 아직 연재분이 많지 않아 다 밝혀지진 않았지만 군사/정치와도 꽤 엮여있는 듯 하다. 애초에 전세계에 지부가 있는데 이 돈은 다 어디서 나온 건지 매우 의문..

신에 대한 지식이나 고증도 훌륭하고, 신과 인류 간의 분쟁도 흥미로운 작품. 주인공이 이 어마무시한 집단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판타지 세계에서 사는 법

개인적으로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판타지 웹툰 중 부동의 1위라고 생각한다.

이 만화의 장르는 정통 판타지이다. RPG 게임하면 흔히 떠오르는 법사, 검사, 성기사, 도적, 엘프 등이 존재하며 길드도 있고 퀘스트도 있다. 그런데 마법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만 판타지 요소가 있고 세계관의 나머지 부분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소수 민족에 대한 박해, 지역 차별, 길드를 꾸려나가는 재정 문제, 왕가가 교체되고 새로 세워지는 과정에서의 싸움 등등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을 굉장히 잘 꾸며 넣었다. 각 캐릭터의 목적과 속셈이 서로 충돌하며 사건이 전개되는 걸 보고 있자면 마치 가상의 세계의 역사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 정치적인 요소를 좋아한다면 분명 마음에 들어할 작품.

이 만화의 또다른 강점 중 하나는 액션신이다. 기술 이름을 열심히 외치며 이펙트를 쏴대는, 요즘 유행하는 만화들의 트렌드와 다르게 이 만화의 액션신은 디테일이 굉장히 잘 살아있다. 캐릭터가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갖는 것처럼 전투에도 제각기 스타일이 있다는 걸 이 만화로 알게 되었다. 작가님 제발 단행본 좀 내주세요 신용카드 쥐고 대기 중이에요…

신령

네이버 웹툰에서 전설의 7통수를 남긴 작품. 덕분에 이혜 작가님 작품엔 늘 “이 분 만화는 뒤통수 잘 닦아야 한다”는 댓글이 꼭 달리게 됐다.

근사한 철학이나 메세지 없이도, 오로지 서사와 반전만으로도 이렇게 재밌는 만화가 나올 수 있다. 나오는 반전 하나하나가 다 걸작이라 캐릭터 자체를 뒤집어 놓으며 지루할 틈이 없다. 신령이라는 컨셉 자체는 사실 그저 그랬고 (사역마 소재는 이미 너무 봐와서..) 인간 캐릭터들끼리의 갈등과 서사가 꽤 재밌었다.

소개한 만화들 중에서 몇 안 되는 동양풍 판타지답게 의상이나 소품 퀄리티가 훌륭하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캐릭터, 대사, 분위기 등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추천할 작품. ‘약해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롭고 영민한’ 주인공 기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추천. 주인공 홍령이 한 나라의 왕으로서 보여주는 행보가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

바람이 머무는 난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했었고, 계약기간이 완료된 건지 지금은 카카오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덕분에 기다리면무료로 하나씩 다시 보고 있다 아 감질나..

주인공 레아나의 성장이 너무나 눈부신 작품. 초반엔 너무나 착하고 지나치게 이타적인 이 주인공의 행동을 독자마저 답답해 했는데, 나중에 가면 이 주인공의 이타심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하며 스토리 전체를 꿰뚫는 테마였는지가 나오게 된다. 다른 캐릭터들을 감화시켜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 물론이고 스토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걸 여기서 말하면 너무 중대한 스포일러라;

나는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판타지 장르면 장르답게 판타지만 제대로 하던지 아님 캐릭터의 성장+서사 요소로 제대로 끼워넣길 바라는데 이 작품은 완벽한 후자다. 시즌 1과 시즌 2에서 엮이는 남자캐릭터가 달라지는데 이 두 번의 로맨스의 양상이 상당히 다를 뿐더러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주위의 조연들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

단점이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주인공의 고구마 답답한 행동들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과 세계관 설정이 조금 복잡하다는 거? 하지만 성장과 로맨스의 밸런스가 훌륭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원하는 사람에겐 추천.

네로의 실험실

판타지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사람들의 마음에 중점을 둔 묵직한 치유물.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고, 메인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크게 중요친 않다. 주인공 네로와 비올렛타가 결국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다면 극후반부 회차를 보면 되지만 이 만화의 핵심은 매화 네로를 찾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서사에 있다. 그림체나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좀 음침하지만 스릴러 요소는 일절 없고 오히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일침을 남기는 결말이 많은 편. 이런저런 생각을 남기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추천.

그 외에도 재밌게 봤던 작품들

  • 키스우드
  •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 로베스의 완전감각
  • 죽은 마법사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