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보고 싶은 명작 영화 목록에도 있었고, 마침 재개봉도 했길래 아트하우스 모모까지 가서 봤다. 우리 집에서 이대까지 가려면 넉넉하게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올 때 두 시간 갈 때 두 시간 이니 정말 피곤한 하루가 되겠구나 하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어마무시한 영화일 줄은..

  • 안톤 쉬거가 진짜 어마어마했다. 보는 내내 이 영화의 철학이나 메세지를 이해하고자 시도해 볼 틈도 없이 안톤 쉬거의 기에 눌려서 숨도 못 쉬고 영화를 본 거 같다. 차라리 쾌락살인마면 살인을 하고 난 뒤의 기쁜 표정을 보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테고 어떤 신조가 있어서 그 신조대로 살인을 하는 거라면 그것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에게 살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서 거리낌도 감상도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 마지막에 안톤 쉬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았다. 작중 내내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며 네 목숨을 여기에 걸라고 말하던 미친 살인마도 진짜 우연은 피해갈 수 없구나. 나는 그가 동전 던지기에 집착하는 것이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세상 모든 일은 다 우연이라는 게 그의 가치관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엄연히 의지가 들어가는 행동인데 그걸 동전으로 정한다는 건 결국 그가 동전 던지기 라는 ‘우연의 결과’에 뭔가 의미를 둬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게다가 그는 작중 최강을 자랑하는 살상 능력을 동원해서 그 누구보다 우연한 요소가 적은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필연을 없애고 싶은 건지 만들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런 안톤 쉬거가 마지막에 진짜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진한 충격을 선사했다. 여러모로 좋은 장면이었다.

  • 네이버 영화에 “제목만 보고 노인 복지에 대한 영화인 줄 알았다”는 평이 있길래 웃었었는데 의외로 노인 얘기를 제대로 하는 영화였다. 주인공과 살인마는 둘 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으며 스릴러를 찍고 있는데 경찰 할아버지는 이 이야기에 끼어들어오질 못한다. 노인의 경험과 연륜을 살려 최선을 다하지만 제대로 된 성과는 커녕 주인공이나 안톤 쉬거와 한 번 만나지조차 못했으며 마지막엔 은퇴하고 집에서 쉬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중 가장 현명했고 잘못된 길로 들지도 않았고, 결국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물론 이걸 행복하지만 빛나진 못했다고 할지, 빛나진 못했으나 행복했다고 할지는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