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참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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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카우보이 비밥 정주행을 한번 해서, 이참에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 작품을 봐볼까 싶었다. 이미 봤던 잔향의 테러(ㅠㅠ)와 도저히 취향이 아닐 듯한 스페이스 댄디를 제외하고 보니 사무라이 참프루와 언덕길의 아폴론이 남았다. 그래서 이 작품으로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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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미디어 안에서 캐릭터들의 관계성은 보통 있거나/없거나 둘 중 한 쪽으로 정의된다. 팀워크를 지닌 동료로서든 서로 앙숙으로 대치하는 적으로서든 끈끈한 관계성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실제 우리 삶에서야 “적당히 친한 친구” 같은 관계가 셀 수 없이 많지만, 미디어는 생략하고 축약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이야기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 애매모호한 관계성을 넣을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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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카우보이 비밥과 이 작품은 신기하다. 세 주인공이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긴 한데, 이들은 여차하면 서로를 버리고 돈을 갖고 튀었다가 자연스럽게 돌아온다. 덕분에 한 쪽은 목숨이 왔다갔다 했는데도 뭐 크게 싸우지도 않고, 싸우지 않았으니 화해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서로에 대해 아무 애정이 없다고 하기엔 어쨌든 여행을 같이 다니고 있고 거의 매 화 목숨을 구해주고 있으니 참 기묘하다. 안 그래도 힙합 음악에 사무라이 액션을 더해서 힙하기 이를 데가 없는 작품에 이런 기묘한 관계성을 붙여놓으니 그자체만으로도 세련된 분위기가 생긴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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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과의 또다른 공통점. 주인공들이 크게 열의가 없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열의를 잃었다가 나중에 각성하는 캐릭터는 흔하지만 이 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앞으로도 계속 열의가 없다. 뚜렷한 정의감도 없고 불타는 복수심도 없다. 사는 것에 미련도 없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땐 의지를 불태우며 칼을 휘두르는데 정작 진짜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땐 ‘난 어차피 죽은 거나 다름없었어..’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근데 또 작중 내내 염세적이고 담담한 어른의 모습만 보여주는 건 아니고, 개그 칠 땐 신나게 개그도 치고 가볍게 행동하는 게… “이 캐릭터는 이렇구나” “얘네는 이런 관계구나” 라는 정의를 쉽게 내릴 수가 없다. 그동안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봐 왔던 클리셰를 조합해서 설명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아닌 것 같다. 쉽게 결론내리지 않도록 감독이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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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곡인 ‘사계의 노래’에 꽂혀서 멜론에서 종종 들었는데, 이 곡은 사무라이 참프루의 엔딩곡으로서 엔딩 영상과 함께 나올 때 가장 매력적이고 좋은 노래인 것 같다. 막상 음원으로만 들으니 별 감흥이 없어서 당황스러웠고, 또 그만큼 작품의 한 구성요소로서 잘 기능한다는 걸까 싶어서 괜히 감탄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