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여러 소수자와 그 부모들의 이야기를 실은 책인데, 장애인을 대할 때 적절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 부분이 있었다. 요즘의 트렌드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죠?’ 로 대하는 것인데 과연 이 태도가 옳기만 한가. 장애는 분명히 불편한 부분이고,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그들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장애인들을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서만 대한다면 그 역시 차별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평등은 생각보다 복잡한 영역에 있다.

  • 퀴어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든 젠더 퀴어든 모두 이 사회를 살아가는 소수자로서 어려운 부분이 있고, 이는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소수자를 모두 “커밍아웃에 어려움을 겪는 약자”로만 대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예쁜 사랑 응원합니다” 라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희화화할 때 (이성애자 남자 둘을 엮으며 놀릴 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고, 어쩐지 게이를 ‘응원받아야 할’ 존재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아서 그렇다. 축구 경기도 아니고 사랑이 왜 응원받아야 하는가. 사랑은 그저 피어나는 것인데.

  • 이 영화는 정말이지 황홀하다. 치명적일 정도로 쨍한 날씨와 달콤한 열매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들. 걱정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여름 휴가.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정갈한 식사와 다함께 즐기는 강가 수영. 그 풍경 안에서 피어나는 첫사랑이라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퀴어를 퀴어로 다루지 않는 영화’라고 말했었는데, 그 말의 취지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다수의 사랑에 상반되는 퀴어의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첫사랑을 보여주되 주인공이 동성애자일 뿐인 영화다. 여태 봤던 모든 매체를 통틀어 이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 첫사랑을 보여준다.

  • 엘리오와 올리버가 동성애자일까 양성애자일까 하는 의문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솔직히 전혀 중요하지 않다. 퀴어가 자신을 정체화하는 것은 남에게 이런 나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언어로 정의된 정체성 팻말이 있어야 남에게 나를 설명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언젠가 모든 퀴어가 자신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정체성 팻말의 중요성은 많이 낮아지지 않을까? 이성을 좋아하건 동성을 좋아하건 둘 다 좋아하건 무슨 상관인가. 젠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건 ‘없는 젠더’가 존재하건, 남성/여성이 섞인 젠더를 갖고 있건 무슨 의미인가. 중요한 건 이게 나라는 사실과 상대방을 향한 감정 뿐이다. 우리에게 팻말을 세워놓고 싶어하는 건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 뿐이다.

  • 가인의 ‘피어나’가 생각나는 영화였다. 여성이 성애를 접하며 주체적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도 성애를 접하며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그들의 사랑은 우리의 응원 없이도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