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혁명 우테나
칼 뽑는 장면마다 생각하는 건데 안시 진짜 유연하다. 허리 안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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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만 참고 보면 진짜 명작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40화 가까이 되는 분량과 단조로운 스토리 패턴 (학생회 멤버에게 사건이 생김 > 고민 끝에 우테나에게 결투 신청 > 우테나가 디오스 버프 받아서 승리)도 한몫 했지만 동성애, 페도필리아, 근친상간 등의 아슬아슬한 소재가 잔뜩이라 더더욱 그랬다. 거기다 작중에서 잘생겼다고 묘사되지만 내 눈엔 전혀 잘생기지 않은 남자 캐릭터들이 자꾸만 웃통을 벗고 아스트랄한 개그 센스를 남발하며 그 와중에 골고루들 안시의 뺨을 후려갈기니 정말이지 정줄 잡고 보기가 힘들었는데.. 겨우겨우 결말까지 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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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테나는 어렸을 적 만났던 왕자님에 대한 동경으로 왕자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 남자 교복을 입고 다니고 꽤나 왕자님처럼 행동한다. 가령 친구인 와카바가 부학생회장인 사이온지에게 모멸을 당하자 그에게 찾아가 결투를 신청하는데, 이걸 결투로 해결하겠다는 사고 방식은 다분히 남성적일 뿐더러 친구 대 친구 보다는 왕자님 대 공주님의 관계에서 나올 법한 선택지에 가깝다. 안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안시와 우테나는 무난하게 잘 지내는 친구일 뿐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허물 없이 마음을 터놓은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테나가 안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이상할 정도로 확고하다. 안시를 노리고 결투를 신청해 오는 듀얼리스트 들에게 “안시를 네 마음대로 할 생각이지!” 라고 화를 내지만 우테나 역시 안시를 마음대로 (공주님처럼) 대하고 있다. (물론 화낼만한 상황이 대부분이긴 하다. 작중에서 우테나의 의도가 그나마 가장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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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중반부를 넘어갈 때 쯤 우테나는 어렸을 적 만났던 왕자님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어렸을 적보다 훨씬 더 타락하여 성별/연령/윤리를 가리지 않는 막장 플레이보이로 거듭난 이 왕자님은 아주 손쉽게 우테나를 유혹한다. 거기다 애초에 왕자님에 대한 동경으로 여기까지 나아왔던 우테나에게 있어 그와의 조우는 ‘이상의 종착점’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의 공주님이 된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을 뿐 우테나에게도 “공주님이 되고 싶은 마음” 즉 여성성이 늘 존재해 왔으며 그게 왕자님을 만남으로써 발현된 것이다. 물론 안시에게는 열 받는 상황이다.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구해주겠다고 얘기할 땐 언제고 이젠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 싶다니. 더군다나 안시는 절대 앉을 수 없었던 공주님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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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부수고 나가야 한다는 데미안의 구절이 끊임없이 인용된다. 우테나는 어렸을 적 왕자님을 만나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가 왕자님을 만나서 겪은 일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왕자님이 되고 싶다고 결심한 계기도 동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어릴 적 생각했던 최종 목표는 ‘왕자님이 되는 것’도, ‘왕자님을 나중에 또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화에서 모든 걸 기억해 낸 우테나는 비로소 왕자님 대 공주님이라는 틀을 부수고 안시를 진정으로 구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세계의 개혁은 이뤄낼 수 없었지만 우테나 덕분에 안시는 ‘공주님으로서’가 아닌 진짜 자신을 되찾고 막장 왕자님의 세상 바깥으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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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작품에 대해서 감상문 쓰려니 머리 터지겠네. 다음엔 좀 더 쉬운 거 볼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