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에 괜찮은 영화 한 편 보고 싶었고, 이동진 평론가가 별 네 개를 줬길래 기본 퀄리티는 보장되겠구나 싶어서 고른 영화였다.

  • 로맨스 영화라고 알고 보았으나 정작 주인공 둘의 사랑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물론 정서적 끌림 없이 로맨틱 끌림이나 성적 끌림만으로도 사랑은 충분히 형성될 수 있다. 애초에 사랑의 주체인 두 사람이 둘의 관계를 사랑이라 생각한다면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엘라이자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계기라던가, ‘그’가 엘라이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보다 섬세한 묘사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보는 내내, 로맨스 영화라고 하기엔 로맨스 이외의 부분에 쏟는 시간이 상당히 길어 당황스러웠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은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주된 흐름일 뿐이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라고 하기는 힘들다. Her 처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도 않고, 인간과 이종 간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해서 묘사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그저 주류라고 인정받는 사람들(백인, 군인, 남자)의 이야기와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흑인, 성 소수자, 장애인,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 뮤지컬 장면은 좀 당황스러웠다. 엘라이자가 실은 농아인 자신에게 한계를 느껴서 말을 하고 싶어했다던가, 아님 영화를 보면서 아름답게 노래하는 배우들을 동경했다거나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이 느닷없는 노래는 뭐지.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던 감독의 마음은 알겠지만 연출이 붕 뜬다는 느낌을 받았다.

  • 19금인 건 알고 봤지만 생각보다 잔인하고 성적인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면 몰라도 실사로 이런 장면들은 좀 힘든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 좋다! 라고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 별 거 아닐 지 모르지만 난 이 장면을 보고 영화가 여주인공을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직도 국산 영화에선 장애인이라는 설정을 ‘더 불쌍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관객을 더 울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써먹는 일이 많은데, 지구 반대편 유럽에선 장애인 여성을 ‘출근 전에 욕조에서 자위를 하는’,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성인 여성으로 대하고 있는 게 참 감동적이었다.

  •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째서 이 인간 아닌 생명체는 ‘그’로 다뤄지는 걸까. 사실 ‘그녀’일수도 있지 않은가? 생식기 모양이 수컷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주인공 엘라이자가 이 생명체를 ‘그’로 규정지어버린 건 아닐지?

  • 우리가 인간이 아닌 생명체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이성애건 동성애건 별 의미가 없게 되는 거 아닐까? 우리는 언제쯤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통칭해서 부를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