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nando Pessoa, the book of disquiet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것은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내가 여행객들의 책에 적은 글을 언젠가 다른 이들이 읽고 나처럼 경치에 감상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약 아무도 읽지 않거나 읽었으나 누구 하나 즐거워 하지 않는다 해도 무방하다.
정부 발주사업을 많이 맡아 잘나가는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는 지난번에 내 벌이가 시원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말했다. “소아르스, 자네는 착취당하고 있어!” 내가 착취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착취당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바스케스 사장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허영과 명예, 울분과 질투, 또는 불가능한 꿈에 착취당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신’에게 착취당하는 이도 있지 않은가. 이 허망한 세상의 예언자들과 성자들처럼.
그래서 집을 찾아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나는 내 집은 아니지만 도라도레스 거리의 널찍한 사무실로 돌아온다. 인생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성채라도 되는 양 내 자리에 정좌한다. 회계장부와 낡은 잉크병 받침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서 송장을 작성하는 동료 세르지우의 굽은 등을 보면 눈물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친밀감을 느낀다. 그들을 사랑하노라. 그들 말고는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원래 인간 영혼의 사랑에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별들의 광대한 무심함에 기울이는 사랑이든 내 잉크병 받침대의 한 귀퉁이에 대한 사랑이든 별 차이는 없다.
누군가의 고백이 가치 있거나 쓸모가 있을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 내가 느낀 것을 글로 쓰는 이유는 느낌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고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느낌에 따라 풍경화를 그린다. 내 감각들로 휴식을 얻는다. 슬픈 심정으로 수를 놓는 여자들, 삶이 거기 있기에 하염없이 바느질을 하는 여자들을 이해한다. 나이 많은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은 기나긴 밤에 혼자 카드점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기 내 느낌의 고백은 나의 카드점이다. 카드에서 운명을 읽는 나는 해석하지 않고 뜻을 캐묻지도 않는다. 카드점에서 카드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형형색색의 실타래를 풀듯이 나를 풀어내거나, 아이들이 손가락에 실을 걸치고 주고받는 실뜨기놀이를 하듯 나 자신의 형상을 만든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언제나 내 영혼에 달라붙어다닌다. 나는 내 생각 속에서조차 구부정하고 허약한 나일 뿐 다른 모습이 될 수 없다. 나의 모든 것은 오래전에 죽은 어린아이의 해묵은 앨범 표지에 붙어 있는 광택 나는 왕자 그림 같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언젠가 미래 끝자락에서 누군가 나에 대해 시 한 편을 쓸 테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한 소절의 음악이나 한 자락의 꿈, 뭐라도 좋으니 내가 느끼게 해줬으면. 내가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해줬으면.
(추가)
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적 상태와 지적 수준이 원시적이거나 형편없이 낮지 않은 한, 사랑할 때 낭만적인 사랑을 한다. 낭만적인 사랑은 기독교의 영향이 여러 세기 지속된 결과 발생한 극단적인 형태다.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의 본질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자면, 낭만적 사랑이란 영혼과 상상력이 만든 옷이며 우연히 나타난 사람에게 입혀놓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옷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옷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우리가 만든 이상적인 의상이 해어지고, 그 아래로 우리가 옷을 입힌 사람의 진짜 육신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낭만적인 사랑이란 환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처음부터 환멸을 인정하고, 이상형을 끊임없이 변경해가며, 영혼의 공작소에서 새 옷을 계속 지어내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바꿔갈 뿐이다.
우리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불가사의한 것이 되도록 꾸려가기.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와 가까이 있는, 우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우리를 더 모르게 하기. 나는 그렇게 내 인생의 형상을 만들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러기 위해 지나치게 본능적인 예술을 따른 결과, 나 자신에게조차도 온전히 선명하고 확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콩디야크는 그의 유명한 책 서문에서 “우리는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아무리 낮은 곳에 떨어져도, 결코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민감한 상상력을 동원해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지 않는 한 타인의 존재에 닿을 수 없다. 진정한 풍경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한 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 존재하는 대로, 즉 창조된 모습대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일곱 구역 중 내게 흥미롭고 내가 진정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내가 여행하는 곳은 여덟번째 구역이고, 그것은 내 안에 있다.
우리 둘은 서로를 알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상대방 없이 혼자 갈을 가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의 동행은 각자 품었던 일종의 꿈이었다. 같은 음으로 합쳐진 발소리는 옆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고 각자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롯 도와줬다. 혼자 걷는 발소리였다면 생각을 방해했을 것이다. 숲은 온통 가짜 빈터 천지였고, 그래서 마치 숲 자체가 가짜이거나 숲이 끝난 것 같았지만, 숲도 거짓도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았다. 같은 음을 내는 우리의 발걸음은 한없이 계속됐다. 우주 자체인 숲. 모든 것이 되어버린 숲에 나뭇잎이 아주 부드럽게 떨어지는 소리가, 우리가 밟고 있는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 주위에서 들렸다. 우리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둘이었을까, 아니면 한 사람의 두 가지 형태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타인이여,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적 있는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들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우리 청력의 실수이고, 우리 이해력의 난파일 뿐이다. 타인의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생한 관능을 표현한 말에서 우리는 죽음을 듣는다. 다른 이들이 심오한 뜻은 조금도 담지 않고 입술에서 떨어지게 놔둔 말에서 관능과 삶을 읽는다.
내 안의 모든 애정은 표면적으로만 발생하지만, 그래도 진실하다. 나는 언제나 배우였지만 정직하게 연기했다. 내가 사랑했을 때마다 정말로 사랑하는 척 꾸몄고, 나 자신에게도 정말 그런 척 했다.
나는 꿈꾸는 사람인지라 꿈을 꾸지만 꿈을 개인의 공연장 이상으로 간주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건 내가 포도주를 즐겨 마시기는 해도 삶의 필수품이나 영양공급원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정이란 저급한 것이다. 무엇보다 열정의 표출은 진실하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 진실한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번도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오늘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대한다 하더라도 내일 정반대되는 대상에 진심을 쏟을 수도 있다. 나는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항상 감상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감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까닭은 정말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느낀다고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