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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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영화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 있는 새로운 장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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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연출 방식이 특이하다. 가령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장면들 간의 인과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직접 알아채게 만든다. 이런 부분은 연극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무대 세트가 바뀐 것만으로 장소가 바뀐 것을 알아채야 하는 것처럼, 인물과 장면을 예민하게 따라가며 직접 눈치를 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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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방식도 특이하다. 이 영화에 과연 줄거리라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사람 다음에 이 사람이.. 하는 식으로 나열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흐름이지, 줄거리는 아닌 것 같다. 원제는 마조리 프라임이지만, 이 영화는 마조리의 일생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의 인생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영화의 “정해진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의 시선은 바깥에서 모두를 나란히 바라보고 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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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쌓여가면서 색깔이 바래고 덧입혀지는 과정.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에게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아닌 “카사블랑카”를 본 것으로 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월터 프라임은 “카사블랑카”를 보고 난 후 근사한 야외에서 청혼을 한 것으로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목욕을 하던 마조리가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떠올린 건, 어둡고 난잡한 객실에서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보며 뒹굴거리다가 청혼을 받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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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는 프라임을 보면서 “거울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지만, 그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게 자신은 외동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아니야. 저건 그 이상의 무언가야”라고 말했던 존은 훗날 테스 프라임을 보며 허무함과 공허감을 감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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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들은 언제나 같은 말을 한다. “나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봐”. 처음엔 이 말을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인공지능의 순수한 호기심의 증거라고 들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 대사를 들으면 들을수록 숨이 막혀온다. 프라임은 결국 진짜 그 사람이 아니다. 부정확하고 희미하기 짝이 없는 내 기억을 거름 삼아 만들어진 혼잣말하는 인형에 불과하다. 그 앞에 위로를 받겠다고 앉아있는 심정은 얼마나 비참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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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든 부정적으로 생각했든, 모두 “프라임을 만나지 않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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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은 아득하면서 섬뜩하다. 왜곡된 채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 바스러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걸 억지로 막아두니 이렇게나 이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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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