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잠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잠을 다시 읽었다. ‘잠’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로 인해 큰 인기를 얻은 후(이 장편이 해변의 카프카였는지 상실의 시대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둘 다 읽어봤는데, 상실의 시대가 좀 더 어두침침하고 뻑뻑한 느낌이라면 해변의 카프카는 흥미진진한데 다 읽고 나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단 느낌을 받는다.) 슬럼프를 겪다가 다시 ‘번아웃’하여 쓴 아주 짧은 소설이다. 꽤 예전에 쓰인 소설이고, 지금 도서관이나 서점에 있는 ‘잠’은 원작 소설을 약간 고치고 일러스트를 추가하여 새로 낸 것이다.
오늘이 어제같고 내일이 오늘과 다를 게 없던 삶을 살던 여자가, 잠을 자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전혀 무리가 없는 상태를 열흘넘게 겪게 되면서 삶에 생기는 변화와 내적 갈등을 표현한 소설인데 사실 읽으면서 공감이 됐었다. 나 또한 요즘 몸만 여기에 존재하고 영혼은 저 우주 어딘가에서 혼자 방황하는 듯한 상태를 많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가면 갈수록 잘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과제 양은 늘어가고 수업 내용은 어려워진다. 내가 하루동안 접하는 것 중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난 아침 아홉시에 근로를 가야 하고, 열시에 밥을 먹고, 열시 반부터 수업을 듣다가 네시에 운동을 가고 저녁엔 연습반을 가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 내 몸은 도서관에서 서가 정리를 하고 있어도 거의 가수면 상태에 가깝고, 수업을 듣고 있어도 교수님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고요한 소음에 불과하다.
이런 나에게도 주인공 여자처럼 며칠동안 잠을 안 자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며칠의 시간을 준다면, 지금 내가 왜 이공부를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도 좀 해보고, 사놓고 손도 못 대고 있는 책도 좀 읽어보고.. 그러고 싶은데. 현실은, 지금도 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