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평소에 블로그에 쓰던 방식을 벗어나 다른 형태의 완성된 글을 써 보고 싶어서 글쓰기 모임을 신청했는데 1주차 주제가 ‘올해의 책’이라니 함정에 걸린 기분이다. 이럴 수가. 내가 뭘 잘못했지? 어차피 9월이 끝나면 3분기 독서 결산 글을 쓸 텐데. 작년 말에 직장을 옮기며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해의 책을 논할 만한 시기가 됐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글감으로 글쓰기를 하면서 그 글감의 사전적 정의, 글감 자체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출발하는 패턴 굉장히 진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만큼은 거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답하자면 별로 좋아하는 단어 조합이 아니다. ‘올해의 책’. 교묘하게 짜여진 질문이 그 자체로 대답의 형식을 옭아매 버리듯 ‘올해의 책’을 꼽아달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평가자로써의 자아를 버리기가 어렵다. 음… 이건 재미없었어. 음… 이건 재미있었지. 마치 책이 객체고 내가 주체적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언제든 책에 5점 만점 별점을 매길 수 있는 마냥. 그건 내가 책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최대 취미인 독서에 대해, 정확하고 진솔한 표현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고 얼렁뚱땅 관성적으로 대답해 버리는 나를 내가 용납할 수 없다. 뭘 그렇게까지? 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이 비슷한 얘기를 친한 친구들에게 해도 그들 역시 음 그래 그렇구나… 하는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본다. 그냥 내 고집이다. 단어 자체가 마케터의 언어에 가깝고 소비주의적이기 쉬워서 싫은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나를 위한 단어가 아니라고 느낀다.
책을 읽는 여러 가지의 내가 있다. 도파민과 욕망의 맛을 찾아 웹소설 서브컬처의 세계로 떠난 내가 있고, 직업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업무 관련 서적을 집는 내가 있다. 언제부터 왜 이 주제를 읽기 시작했는지 슬슬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관성처럼 읽어나가는 내가 있고, 시험 공부하듯이 꾸역꾸역 그러나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며 읽는 내가 있다. 아무튼 내내 무언가를 읽고 있는데 이렇게 쌓이는 독서는 전혀 선형적이지 않다. 비유하자면 음식과 비슷하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당 떨어져서 먹는 과자와 주말에 친구와 먹는 딤섬과 저녁에 결연한 마음으로 우적우적 씹는 샐러드와 먹는다는 자각도 없이 매일 먹고 있는 평일 점심 식후 커피 한 잔을 한 줄로 세워놓고 별점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걸 한바구니에 쏟아넣은 다음 올해의 맛집을 선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신 나는 식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오늘 식사 어땠어. 그 말은 꼭 음식에 대한 평가, 식당에 대한 평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같이 밥을 먹은 상대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그건 나와의 시간을 어떻게 즐겼느냐는 질문이 된다. 오늘 네 상태는 괜찮은지. 기분은 괜찮은지. 우울해서 빵을 사 먹었다면 덕분에 기분은 나아졌는지. 빵이 차갑고 딱딱해서 더 슬펐는지. 뭐 그런 것들. 누군가의 최고가 궁금하다면 최고였던 책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최고라고 느꼈던 그 사람의 순간이 궁금하다. BGM으로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순간>이 좋겠다. 왜 하필 이 책 이 구절인지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하고 경이롭다고 느꼈던 순간. 아니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벌써 그립게 느껴지는 순간. 때로는 남들이 말하는 맛집 다 필요없고 엄마표 계란말이나 외할머니표 LA갈비가 눈물나게 맛있을 때도 있으니까.
레비나스가 말하길 ‘사랑하는 감정과 대상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서만 존립한다.’ 타인이 간직한 최고의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해 있는지 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따라했을 때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사랑은 끝까지 타인의 사랑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다만 사랑이 교차하는 현장이 즐겁다. 서점, 도서관, 북페어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책 읽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반갑다. 그게 도스트예프스키여도 반갑고 <부의 추월차선>이어도 잠깐 웃음은 나지만 반갑다.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뿐 내가 모르는 관계가 저 안에선 탄생하고 있을 테니까.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책에 열중해 있는데 책 제목은 안 보일 때 무슨 책인지 궁금해서 티 안 나게 곁눈질한 경험이 나만 있는 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책보다는 순간에 대해 말하고픈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누가 나한테 재밌는 책을 추천해 줄 때 나는 동등하게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나만 인성이 이 꼬라지일까? 미안합니다.) 추천해 주는 사람을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알 때만, 잘 아는 만큼만 귀 기울여 듣는다. 그 책이 재밌는지 몰라서 안 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 초엔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재밌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재밌겠지. 류츠신의 <삼체>가 재밌다는 추천은 더 많이 들었다. 재밌겠죠. 근데 이미 나의 읽을거리 목록은 가득 차 있고, 거기 쌓인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다른 작품, 그 책에서 언급된 다른 책, 참고문헌, 기타 등등 알라딘 장바구니에 또 열 권씩 쌓여 있을 텐데. 혹시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라는 책을 아십니까? 그거 읽고 나면 알라딘 장바구니에 SF만 40권 쌓여 있어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아 재밌는 거 나도 안다고. 근데 내 하루가 48시간이 아니고 난 백수가 아닌데 어떡해.
모든 걸 읽을 시간이 없다. 쓰기까지 하려면 더더욱 다 읽을 시간이 없다. 애초에 왜 우리는 시간 들여 책을 읽는가? 최근에 독서 모임으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고 있는데, 사실 <마의 산>이 어떤 소설인지는 굳이 읽어서 알 필요가 없다. 제미나이 켜서 등장인물과 토마스 만의 생애와 이 소설의 의의에 대해 레포트 뽑아달라고 하면 기가 막히게 뽑아줄 거다. <마의 산>은 출간된지 그렇게 오래 지나지도 않았고, 여전히 연구가 활발하며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만큼 유명한 소설이니까 AI가 참고할 레퍼런스도 많다. 그렇다면 나는 이걸 왜 읽는가? 문장 하나하나를 직접 읽어내다보면 AI가 미처 뽑아내지 못한 정수를 내가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인간도 여전히 책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자기위안을 얻기 위해? 아니아니.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책과 나의 관계다. 그건 책에 직접 부딪쳐가며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리는 독서 그래프에서 이 책은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다음은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가 볼 것인가? 무엇을 완성하고 싶은가? 최종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니 내가 타인에게서 알고 싶은 것 역시 같다. 당신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당신의 그래프에서 그 책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러니 점과 선과 면으로 된 그림 속에서 최고의 점 하나만을 꼽아달라는 말에는 침묵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