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회사에 AI에 관심이 많은 분이 계시다. 매일매일 새로운 AI를 써 보고 자기 업무에 붙여보고 각각의 장단점을 찾아보기를 좋아하시는데, 나는 그분이 AI 얘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그 옆에서 ‘아 진짜요’ ‘아 정말요’ 밖에 할말을 찾지 못한다. 더 나은 반응을 하고 싶어도 떠오르는 리액션이 없다. 굳이 문장으로 만든다면 ‘행복해 보이셔서 보고 있는 저도 기분이 좋네요’ 정도가 되겠다.
AI가 기후 변화를 부추기고 저작권을 침해하고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대화를 아예 끝장내버리는 말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AI에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혹시 AI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권리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AI 툴의 상업 라이센스를 결제해 주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저는 개인적 취향으로 AI를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 굳이 비교를 하자면 어느 지역의 원주민이 신문물이며 대도시며 난 모르겠고 니들 발전은 니들 하고픈대로 하고 나는 평생 내가 살던 형태로 살겠다 주장하는 것과 비슷할 텐데, 역사 대대로 그런 주장은 성공했던 적이 잘 없으니 어려운 문제다.
다른 사람이 AI를 어떻게 활용하든 거기에는 조금도 유감이 없고 솔직히 내가 개씨잘데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그런데 그런 고집이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회사에서 그걸 다시 한번 배웠다. 문득 옛날 옛적 좋아했던 신유진 씨의 열다섯 번의 밤이 생각난다.
너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는 아집이 없어서, 담백한 사람이어서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너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또 잘 모르겠다. 너를 보지 않은 지도 십 년이 지났으니까. 나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나 역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가 가진 10 중에 7이 변했고, 그것은 나의 인생을 통째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나의 3은 그대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적어도 스물다섯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좋으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말했듯이 여전히 3이 남았다.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그 3은 이 세계와 나 사이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려 흔들릴지언정 절대 뽑히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3을 가진 내가 싫다. 다만 싫은 것을 데리고 사는 법을 배워간다. 그러나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3을 버리는 나를 꿈꾼다. 너는 나의 3을 미워하지 않고, 3을 버리고 싶어 하는 나를 응원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함부로 손을 뻗지 않겠다. 우리가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이미 써 버렸다는 사실을 나만큼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건 3이다. 내 의지로는 좀처럼 버려지지 않는 3. 나의 3에는 내가 뿌리내린 장소에 무의식적으로 품어 때로는 이성마저 이기는 애정이 있고, 또 내가 내 글에 갖게 되는 별 의미없는 까다로움도 있다. “오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A지역으로 넘어갔다.”는 여행기의 문장을 쓸 때 나는 일정을 “마무리하고” 라고 쓸지 “마무리짓고” 라고 쓸지 “마치고” 라고 쓸지 “끝내고” 라고 쓸지를 제법 오래 진지하게 고민한다. 남들도 이런 고민을 시간 들여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알려주세요. 제게 무척 큰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글에서 중요한 문장도 아니고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어디 투고를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그런데 정말 싫은 건 언제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 한참 전 과거의 내 글을 읽을 때조차 단어 판독기는 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이 단어 썼었네 다른 단어가 더 어울리는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고칠까 하는 망령이 하염없이 쫓아온다. 도대체 왜? 누가 안다고? 근데 내가 안다. 바로 나! 돌아버리겠네. 내 블로그 글의 제1독자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단골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개씨잘데기없는 싸움을 이어나간다.
AI가 이 까다로움을 쫓아올 수 있을 리 없다. 니가 뭘 알아.
남에게 보이고픈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야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을 때 달리는 좋아요는 설령 스팸 계정이어도 따숩고 귀하지만, 또 2차 창작하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독자의 리액션이란 사람을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땐쓰도 추게 하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다. 2차 창작 대선배님들이 말씀하셨다. 이거 왜 하는지 아세요? 아무도 나를 위한 장을 안 담가주니까 내가 직접 담그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맛있는 걸 만들어주기는 해. 근데 내가 너무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맛이 있는데 아무도 그 맛으로는 안 만들어주는 거야. 그걸 견디지 못하면 사람이 눈물 흘리며 직접 장을 담그게 됩니다. 시행착오가 오백만번일지어도 무수히 깨질지어도. 나는 블로그 글에도 그 말이 얼추 들어맞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의 독서 기록은 아무도 안 써주니까 내가 직접. 이런 느낌의 유럽 여행기는 아무도 안 써주니까 내가 직접. 내 입맛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궁극의 필살기 요리를 언젠가 완성하기 위해.
만일 AI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발전해서 나조차 몰랐던 내 입맛을 100% 충족시킬 만큼 맛있는 요리를 내가 죽기 전에 해낸다면, 나는 더더욱 펑펑 울면서 니가 뭘 알아! 니가 뭘 아는데! 하고 컴퓨터를 부숴버릴 것이다.
AI를 이곳저곳에 활용하는 분들을 보며 그걸 느낀다. 나는 참 답이 없는 고집쟁이고 여기엔 어떠한 의미도 없지만 -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없을걸? - 그게 돌고돌아 나를 규정한다.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나.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이런 개씨잘데기없는 고집을 부려가며 살고 싶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사치다. “저집 할머니는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의 할머니를 맡고 싶다.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니들이 알아야 혀? 고오얀 것들. 성질나게 하는 말들은 아직 할머니가 되기까지 한참 남은 지금도 발에 무수히 채인다. 서울 살면 무조건 아파트를 사야지 왜 빌라를 샀어요? 아깝다. 잘 안 오를 텐데. 그 학교 나와서 그 회사 다녔는데 지금은 왜 이런 일해요? 아깝다. 그걸 왜 일일이 손으로 해요? 이거 앱 깔고 무슨무슨 툴 쓰면 바로 돼요. 그러면 차분한 나는 대답한다. 네 눈에 불편한 거지 나는 불편하지 않다. 누군가는 일부러 이걸 택할 수도 있다. 무지를. 불능을. 더딘 속도와 보잘것없는 결과를. 때로는 역행을. 그러나 일이 빨리 해결되길 바라는 또다른 나는 속으로 말하는 것이다. 꺼져!
고오얀 것들. 꼬장꼬장 할머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