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귀국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리스본 → 인천 직항을 구하지 못해서 암스테르담 경유로 돌아왔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 올 땐 비행기가 남아 돌았는데 왜 리스본에서 인천 돌아가는 비행기는 이코노미가 이렇게나 빨리 매진돼서 대한항공 비즈니스석 700만원이라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가격을 보여주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나보다 유럽을 훨씬 많이 가봤고 발도 넓은 친구가 나중에 알려주었다. 요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행지로 아주 핫해서 자기 주변에도 다섯 명이나 리스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고.

어쩐지. 그 말을 듣고 많은 게 이해됐다. 리스본은 정말 기이할 정도로 한국 사람이 많았다. 독일에서 일주일간 스쳐지난 아시안이 삼십 명쯤 되고 그중 다섯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리스본은 하루동안 스쳐지난 아시안이 삼십 명쯤 되고 그중 스물아홉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중 스물다섯 명이 젊은 커플이었다. 나는 내가 트루먼 쇼에 들어와 있는줄 알았다. 아니 드레스 코드가 있는 파티였으면 저한테도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니에요?? 어쩐지 이상하더라는 말을 하자 친구가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줬다. 지인이 최근에 리스본으로 신행을 갔는데 신랑이 자기 해산물 못 먹는다고 여행 내내 둘이 한식당에서 김치찌개만 먹다 돌아왔다는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격분했다. 김찌는 잘못이 없지만, 만일 독일에 일주일 넘게 있던 나를 누가 포르투갈에 떨군 다음 넌 오늘부터 김찌만 먹어야 해 했으면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프라이팬으로 그를 한 대 후렸을 것이다..

1. 기내 독서 준비

아즈마 히로키 - 관광객의 철학. 여행 내내 읽던 철학사 책을 잠시 내려놓고 새 책을 골랐다. 리시올 출판사도 원래 알던 곳이고 (리시올의 최고 명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모두 읽어주세요.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읽은 뒤에 올해의 책으로 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도 원래 알던 사람이고, 그래서 『관광객의 철학』 역시 한참 전부터 to-read 목록에 있었지만 정작 손은 대지 않다가 문득 이 책을 관광객으로서 읽는 의미가 있을 거 같아 전날 밤 충동적으로 전자책을 결제했다.

실은 리스본에 머무는 내내 ‘관광’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뭐랄까, 한때 페소아를 좋아했던 마음을 동무 삼아 리스본에 왔는데 페소아의 초상화가 거의 캐리커쳐 수준으로 변형되어 에코백과 머그컵 등 각종 굿즈에 찍힌 채 ‘느낌 좋은’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것에서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던 거 같다. 이게 정확히 무슨 감정인가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보자면.

  • 페소아를 소개하는 한국어 문서에선 대체로 그를 포르투갈 국민시인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국민시인/국민작가가 대체 무엇인가? 그런 호칭은 그저 우리가 그 나라도 그 작가도 잘 모른다는 표현에 불과하다. 한 나라를 고작 작가 한 명의 이미지로 압축해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고. ‘페소아가 포르투갈 국민시인이래. 모두가 페소아를 알고 있을 나라에 가보고 싶어.’는 처음부터 허상과 허상이 연결된 꿈이었을지도.
  • 내가 한때 애정했던 대상이 자본주의에 분쇄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아마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분쇄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그 조건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닐 수 있다. 포르투갈은 현재 유럽 전체 대비 잘사는 국가가 아닌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 산업 사회로 넘어가야 했던 중요한 시기에 살라자르 독재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보다 몇 세기 전엔 멀쩡한 건물을 죄다 부숴버린 리스본 대지진이 있었다. 2025년의 내가 관광객으로서 토로하는 아쉬움은 사실 너무 얄팍하다.
  • 그리고 말을 조금 바꿔보자면, 내가 한때 애정했던 대상이 쌈마이로 팔려나가지 않고 문학/예술의 고고한 위상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은 사실 수치스러운 것이다. 이런 젠장할. 그렇게 욕했던 유럽 부르주아 판타지가 아직 내 안에도 남아 있다. 고급과 저급의 선을 그어 나는 고오급 문화를 즐기며 자성할 줄 아는 계몽된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지긋지긋한 모더니즘.
  • 페소아는 관광이 무의미한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유인즉슨 어떤 기대치를 갖고 대상을 바라보면 그 기대치에 부합하는 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A를 기대하고 어느 지역에 가면 정확히 그 A 위주로 보일 테니 나는 원래 알던 A 이상의 것을 접할 수 없고 결국 우리의 눈이 향해야 하는 건 우리의 내면이라고. 이제는 납득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런 주장이 별로 취향이 아니지만 유럽 여행을 2주씩 다녀보니 그 말이 다시 생각나긴 했다. 관광은 애초에 왜 하는 걸까? 여행은 결국 제국주의적 개척심이 동반된 행위일 수밖에 없을까?

그런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하다가 번뜩 『관광객의 철학』이 생각나 구매했다는 이야기.

2. 기내 독서

원작을 소중히 하려면 한번은 2차 창작을 거쳐야 한다.

근데 반전이 있다. 책의 기조가 예상과 좀 다르다 ㅋㅋㅋ 이 책 뭔가 희한한 길로 간다는 걸 처음 확신한 게 이 문장. 암스테르담 가는 비행기 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읽다가 2장 제목 “2차 창작”에서 잠깐 눈을 뜨고 “원작을 소중히 하려면 한번은 2차 창작을 거쳐야 한다.” 에서 으어엉?? 하면서 일어났다.

이 책의 문맥에서 말하면 2차 창작은 ‘관광’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특정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원작자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그것도 원작자의 허락 없이 ‘경박하게’ 창작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이는 관광객이 관광지를 방문해 주민이 기대한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일방적으로 만족해 돌아가는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내가 갖는 의문은 이렇다. 이런 계몽이 만능은 아니기에 관광지화를 제안할 필요가 있었던 것 아닌가?

이 책은 관광이 2차 창작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원작자의 허락 없이 멋대로 이미지를 창작해 소비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원작자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생태계는 이미 존재하며 이걸 무시하고선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어딜 가나 원작 우선주의를 외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2차 창작/관광으로 생성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건 결국 원작/지역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고. 거기에 저자는 말한다. ‘그래, 원작 존중 좋지. 근데 일단 2차로 유입시켜서 원작을 보게 해도 괜찮지 않아? 원작을 존중해야 한다는 계몽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이 책은 관광객을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다. 관광객이 정말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깔아주는 책이 아니고, 좋든 싫든 관광객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인데 그 안에서 나름의 긍정성을 모색하려면 어떤 철학/사상을 끌고 올 수 있을까요? 에 대한 답을 스케치처럼 쓴 책이다. 저자 안에서도 아직 확실한 결론은 나 있지 않은지 하나의 결론을 향해 탑을 쌓는 구조가 아니라 이런저런 단상과 가능성을 쭉 나열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오히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이는 앞으로 다룰 이른바 헤겔주의의 문제, 내셔널리즘의 문제다. 그 결과 19세기 이후 사회성이 있는 인간과 사회성이 없는 인간, 공공성이 있는 인간과 공공성이 없는 인간, 공적인 인간과 사적인 인간, 정치인과 문인, 앞 장에서 사용한 말로 하면 ‘진지한’ 인간과 ‘경박한’ 인간을 구분하게 되었다.

최근에 일본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편리한 구호로 쓰이는 경향이 있어 이렇게 쓰면 ‘민주주의적인 사회 말인가?’라고 해석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칸트는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쓴 것이 아니다. 공화주의(통치 방법과 관련)와 민주주의(통치자의 수와 관련)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지만(통치자의 수는 적지만) 공화주의적인(행정권과 입법권이 분리된) 사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칸트가 중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공화주의며, 오히려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제 1~2조항이 주장하는 영원한 평화의 길은 사실 지극히 단선적이다. 성숙한 시민이 모여 성숙한 국가(공화제)를 만들고 성숙한 국가들이 모여 성숙한 국제 질서(국가 연합)를 만들면 그 결과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성숙의 연쇄 스토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스토리는 미성숙한 국가(공화적이지 않은 국가)는 국제 질서에서 배제해도 될 뿐 아니라 나아가 배제해야 마땅하다는 발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인문학은 대중 사회의 실현과 동물적 소비자의 출현을 ‘인간이 아닌 것’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거부가 글로벌리즘이 진행된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인문학의 영향력은 이번 세기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바탕에 있는 위기 의식이다.

이건 그냥 공공성이 있는 인간과 없는 인간, 진지한 인간과 경박한 인간, 성숙한 국가와 미성숙한 국가의 구분짓기에서 『마차살』의 화자가 생각나서 메모.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별개로 호명하는 것 역시 『마차살』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말이 편리한 구호로 쓰이는 경향은 한국도 비슷하게 느껴지고, 인문학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과감해서 놀랍기도 했다.

한마디로 다중은 반체제 운동이나 시민 운동을 가리킨다. 단 과거의 운동과는 달리 지구 규모로 확장된 자본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한다. 예를 들면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집이나 동원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기업이나 미디어 등과도 연계한다. 그리고 체제 내부에서 변혁을 꾀한다.

여기서는 이 이상 자세히 다루지 않겠으나 『존재론적, 우편적』에서는 ‘부정신학적’이라는 말을 부정을 매개로 한 존재 증명의 논리, 예를 들면 ‘타자는 부재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외부는 부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식의 논리를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급진 민주주의의 논리는 이런 점에서 바로 부정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통된 이데올로기(공산주의)가 없는, 따라서 원래는 존재할 수가 없는 연대를 다름아닌 연대 불가능성을 매개로 구축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정신학이? 이제 부정신학 키워드만 들어도 플로티노스 생각이 난다. 거의 매일매일 신학과 철학과 플로티노스 얘기를 하는 트친이 있어서 책 읽다가 관련 키워드를 발견하면 이거 사진 찍어다가 트친을 멘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업은 그렇게 하는 건가봐. 24시간동안 같은 얘기를 하는 친구를 두면 내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머리에 뭐가 계속 쌓이긴 한다. 저 문단도 친구 덕분에 그나마 조금 더 친숙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다.

부정신학은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규정할 수 없음으로 규정되는 존재’라고 답하는 신학이다. 그러니까.. 좋게 보자면 어려운 질문을 피해가는 우회로를 찾은 거고 나쁘게 보자면 말장난을 하는 건데 이런 부정신학의 문법은 알다시피 낭만주의에서 자주 쓰인다. (할머니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사랑이 뭐예요? 그건 말이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지. 아마 사랑의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란다.) 저자는 급진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연대, 운동 등이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으로 정의된 경향이 있고 따라서 관광객의 철학은 적어도 현실 정치를 움직이는 방법론 관점에선 네그리와 하트가 정의한 기존의 다중 개념과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데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연대라는 것이 정말 구체적으로 현실을 바꾸는가? 남을 돕는 행위를 했다는 낭만적 기분만 선사하는 것은 아닌가 나도 고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 - 정확히는 인간 사회를 포함한 ‘복잡계 네트워크’ 일반 - 는 ‘큰 클러스터 계수’, ‘작은 평균 거리’, ‘무척도’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연구가 발표된 후 잠시 동안 그런 흥분이 세계를 휩쓸었다. 그 열광은 과학 저술가 마크 뷰캐넌이 2000년에 펴낸 『역사는 ‘멱승법’으로 움직인다』나 바라바시가 2002년에 펴낸 교양서 『링크』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복잡계 네트워크 언급 보고 기절할 뻔했다. 마크 뷰캐넌! 링크!! ㅠㅠㅠ 한때 커리어로 삼고 싶었던 분야인데. 학교 다니던 시절에 여기에 이상향 깃발을 꽂아놓은 친구가 꽤 많았다. 2010년 아랍의 봄 때문에 인터넷과 초연결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최고조였던 시기라 더 그랬다. 참고로 마크 뷰캐넌은 2014년에 ‘복잡계 과학이 다시 만드는 경제학의 미래’에 대해 책을 쓴 이후로 소식이 없고 『링크』를 썼던 바라바시는 2019년에 ‘과학으로 밝힌 사회적 성공의 비밀’에 대한 책을 쓴 이후로 역시 소식이 없다. 다들 왜 그렇게 된 건가요?

3.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환승 대기 시간 네 시간. 『관광객의 철학』을 마저 읽고 밥을 먹었다. 공항 안에 있는 식당이라 꽤 비쌌는데 오랜만에 보는 생야채 샐러드와 스프와 커피에 그만 눈이 돌아갔다.

4. 마지막 기내 독서

반면에 스미스는 자제의 숭고한 능력을 칭찬했다. 내가 나 자신을 점점 더 자유롭게 통제할수록, 그리고 점점 더 자기 규정적이고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갈수록 미덕에는 더 많은 공간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말과 함께 영국 주민의 80퍼센트에게는 미덕을 발전시킬 기본 조건을 박탈했다는 사실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자신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 가리킨다. 나 자신을 도덕적 완전체로 만들려면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 자체>를 포기한 사람은 불가피하게 버클리와 같은 입장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주관적이고, (어쩌면 신만 제외하고) 더 이상 객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야코비가 볼 때 이는 <부조리함의 나라>로 떠나는 소풍이지만, 사실 <독일 관념론>은 여기서부터 제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관념론자들 중 첫 번째 인물이 피히테였다!

자기 통제, 자기 수양, 소위 미라클 모닝 식의 ‘갓생’ 살기에 집중하고 그것이 바람직한 삶으로 개인에게 요구되는 세태 참으로 문제적이라 생각하는 요즘이라 유독 이런 문단에 밑줄을 긋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지지도 않고 틀에 맞춰지지도 않는 못난이들아 사랑한다 함께 살자. 하지만 이 생각의 가장 어려운 지점은 정작 나 자신은 또 자기 통제를 잘하고 싶어한다는 부분이다. 일찍 일어나서 독서를 하고 운동을 하고 알찬 하루를 보낸 나에게 뿌듯함을 느낄 때. 아니 향상심은 좋은 거잖아? 내 기준을 남에게 똑같이 적용시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거지. 하지만 일상을 살다 보면 그 구분선이 엄청 선명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자제할 줄 아는 나를 사랑하는 것과 자제할 줄 모르는 타인을 낮게 보는 게 과연 완전히 별개로 동작하는 일인지? 결국 헛소리를 뱉지 않기 위해선 항상 머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하는 거 같다. 나이 들수록 침묵은 금이라고 하니까.

마지막 인용은 그냥 신나서 가져왔다. 여행 내내 철학사 책을 열심히 달린 1차 목표가 독일 관념론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드디어 『마차살』을 독해하기 위한 독일 관념론의 문앞에 들어섰다! 총 세 권짜리 시리즈에서 2권을, 총 940페이지 중 700페이지 읽었으면 많이 읽었잖아! 어차피 마지막 백 페이지 정도는 전부 주석인데! 그리고 전혀 놀랍지 않게도 이 책 독서가 여기서 멈췄다. 오매불망하던 피히테 이름은 만났는데 정작 피히테가 뭘 했는지는 2026년이 되도록 아직도 모른다.

기내 독서가 정말 체질에 맞는 거 같다. 비행기 오래 타는 걸 잘 못 견디는 분도 많은데 나는 정말.. 열시간이고 열두시간이고 계속 앉아만 있으면 되고, 때 되면 밥 주지 마실 것도 주지 시설 깨끗하지 귀찮게 하는 사람 없고 도와주는 사람만 있고 나를 유혹하는 속세와도 거리가 멀고 바깥 풍경도 좋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 심지어 음악도 준비되어 있다. 유럽 가는 비행기 안에선 오디오 컨텐츠에 조성진 앨범이 있길래 그거 들으면서 철학사 책을 읽었고 오는 비행기 안에선 클래식 마땅한 게 없어서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랑 사카모토 류이치 앨범을 듣다가 착륙 두 시간 남았을 때부터 브리트니 스피어스 greatest hits 를 들었다. my loneliness! is killing~ me~ and~ i~ i must confess! i still believe~ (~still believe~)

비행기 안에서의 한시간 독서량이 평상시 하루 독서량을 아득히 상회한다. 저를 계속 비행기 타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