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11일차 - 리스본 둘째날
0. 아침
![]()
오전 내내 비가 온대서 다 때려치고 숙소에서 유튜브 숏츠나 봤다. 전날 날씨에 지치기도 했고, 심지어 저녁 먹고 숙소 돌아올 때 구글 맵이 버스 경로도 잘못 알려줘서 외딴 곳을 다녀오는 바람에 (전반적으로 정보가 조금씩 맞지 않았다) 리스본에 대한 인상은 거의 바닥을 찍은 상태였다. 어딜 나갈 의욕이 도저히 들지 않아서 이런 날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쉬었다.
![]()
그런데 오후엔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아니 이럴 수 있으면서 어제 저한텐 왜 그랬지요.
1. 비눗방울 부는 사나이
![]()
![]()
정말 나가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가야지.. 나가자.. 하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너무너무 멋진 풍경을 만났다. 피리 부는 사나이 대신 광장에 출몰한 비눗방울 부는 사나이. 어제 저녁 식당의 웨이터는 나한테 치즈 하나 주고 7유로를 받아먹었지만 코시우 광장의 비눗방울 부는 사나이는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나온 거 같았다. 어린이들이 신나서 거대한 비눗방울을 따라다니는 것도 귀여웠고, 그 에너지에 힘입어 함께 소리를 내지르는 어른들도 귀여웠다. 나도 약 30분쯤을 비눗방울 쫓아다니고 터뜨리며 놀다가 밥 먹으러 갔다.
2. 점심
![]()
Marisqueira Uma. 어제 하루동안의 여행과 페소아의 단골 식당 방문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바로 리스본이 관광지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여행을 다니면 이곳에선 좋은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유명한 맛집을 찾기보다 내가 배고플 때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랜덤 여행을 선호하지만, 리스본은 관광 의존도가 높은 곳이고 이미 도시 자체가 관광 수익 위주로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랜덤으로 들어가는 식당은 ‘숨겨진 로컬의 맛’이 아니라 ‘바가지’를 제공할 가능성이 더 높은 거 같았다. 그들은 돈을 벌어야 하고 나는 돈을 쓰러 왔으니 이건 누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세 시간 반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온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오전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네이버 검색창에 리스본 맛집을 검색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추천으로 이곳에 왔다.
문어 샐러드와 해물밥 그리고 진저 에일. 농담 아니고 너무 맛있어서 눈물 흘릴 뻔했다. 향신료 잔뜩 들어간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다니 이게 과연 포르투갈 요리인지 한식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맛있으니까 된 거 아닐까? 싹싹 긁어서 다 비웠고, 마지막 날까지 다른 식당 도전하지 말고 여기 해물밥을 한번 더 먹을까 생각했었고, 실제로 한번 더 가지 않은 거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다. 역시 아는 맛이 제일 맛있다.
![]()
이건 간식으로 사먹은 젤라또. 이때부터 음식에 돈을 아끼지 않기 시작했다. 마치 독일에서 쌓인 원한이라도 풀려는듯⋯.
3. 상 조르제 성
![]()
![]()
![]()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가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왔다. 오늘 같이 날씨 좋은 날에 성을 안 오르면 어딜 가겠나 싶어서 아무런 사전 조사 없이 방문했는데 입장료가 15유로였다. 15유로. 비싸다. 네 시간동안 걸어다녔던 뮌헨 레지던츠 통합권 가격과 맞먹는다. 애초에 성곽에 입장료를 받는 것부터가 묘하다. 여기가 사유지도 아니고, 성곽은 그냥 야외인데.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생각해둔 다른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훌훌 돌아다니다 왔다. 공작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게 조금 신기하고 귀여웠다.
![]()
사실 성곽 구경보다 이게 더 메인 이벤트였다. 성곽 다 둘러보고 경사진 돌길을 내려와 모퉁이 카페에서 그린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앉았는데, 와인을 시킨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킹하는 사람들이 주섬주섬 카페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날씨가 좋길래 테라스석에 앉은 것 뿐이었는데 졸지에 제일 가는 명당에서 버스킹 구경을 하게 됐다. Soalheiro Alvarinho 라고 쓰인 병의 그린 와인도 맛있었고 술 마시면서 보는 공연도 제법 즐거웠기 때문에 ‘이게! 이게 바로 유럽인가! 이게 유럽 낭만!’ 하며 엄청나게 타자화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자기 집 테라스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분도 발견했다. 사실 진짜 재미는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유튜브 채널명이 적힌 팻말을 꼼꼼하게 세워두고 카페 앞에서 유명한 노래를 커버하는 쪽이 물론 실력은 더 좋았지만, 2층 테라스의 아저씨는 ladies with glasses people with glasses 가 반복되는 알 수 없는 가사를 부르지만, 관객이 돈을 낼래야 낼 수 없는 곳에서 자기가 치고 싶은 만큼 치고 들어가고 싶을 때 퇴장하는 쿨한 매력이 있었다.
![]()
다시 지나는 대성당 앞. 정말이지 어제의 비는 뭐였던 걸까?
4. Museum Aljube Resistência e Liberdade
![]()
![]()
전날 리스본 대성당 다녀오는 길에 발견하고 오잉? 이건 뭐지? 내일 가야지! 하고 킵해뒀던 박물관. 한국어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직역하자면 알주베 저항 및 자유 박물관인데 살라자르 독재 시기에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던 곳을 민주화 및 혁명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여기는 이유를 알 수 없게 입장료가 저렴하다. 성곽 입장료가 15유료였는데 여기 입장료가 3유로인가 5유로인가.. 하지만 알차기로는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념관보다 한 수 위였다. 저항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위조 신분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 감옥 안에서 탄생한 언론지와 찌라시, 생존자의 증언까지 아주 싹싹 긁어서 전시해 두었다.
![]()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었던 고문의 종류, 그리고 사람이 어디를 고문 당하면 무슨 증상이 생기는지 신체 지도까지 그려놓은 데에서는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마치 과학 박물관에서 인체의 신비를 설명할 때나 쓸 법한 판넬이 큼지막하게 서 있는데 그게 각 신체 부위의 고문 후유증을 설명하는 내용일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이 잘 안 된다.
![]()
전시를 보는데 멀리서 화재 경보 같은 알람이 자꾸 울려서 이게 지금 전시의 일부인지 대피를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는데 전자였다.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의도로 엄청나게 큰 데시벨의 전화벨이 랜덤한 타이밍에 울린다.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전화기 바로 앞에서도 이 소리를 들어봤는데 전시의 일부로 벨이 울린다는 걸 이미 알고 들었는데도 아 깜짝이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근데 연출이 좋았던 거 같다. 평화롭게 전시를 보다가 들어도 몸에 절로 긴장이 들어가는데 실제 수용소에서 다음 고문 대상자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을 땐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영역을 상상해 보도록 만드는 전시물이었다.
오른쪽 사진에 있는 건 포르투갈의 저항 가요 모음. Zeca Afonso 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Jose Afonso 가 포르투갈의 유명한 포크 가수이자 저항 가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참고를 위해 걸어두는 유튜브 주제 링크.
![]()
포르투갈 식민지 지역들의 독립 투쟁을 포르투갈에서 같이 지지하려고 했던 시도와..
![]()
벽 중간중간에 문구가 써 있는, 영어로밖에 읽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울리는 저항시들..
Sophia de Mello Breyner Andresen. 포르투갈에서 가장 핫한 시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찾아보면 이력이 화려하다. 시인이자 작가로서 시집을 열네 권, 그리고 에세이와 연극을 썼고 자기 자녀들을 위한 아동 도서도 많이 썼다. 살라자르 독재 시기에는 정치범들과 반파시스트 야당에 연대했고 카네이션 혁명 이후에는 사회당 의원으로 활동하며 현행 포르투갈 헌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1999년엔 포르투갈 여성 최초로 카몽이스 상을 수상했다. 와. 이쯤 되면 서점에 이 시인의 연대기를 설명하는 책이 분명 있을 거야! 이 나라에도 위인전이 있을 거잖아! 하지만 베르트랑 서점을 재방문해서 소피아 안데르센에 대한 책을 문의하자 시집과 아동 도서밖에 없다고 직원 분이 안내해 주셨다. 이럴 수가. 한국어 책은 기대도 안했지만 아마존에 검색해도 영역본도 고작 두 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럴 수가. 제가 너무 제국주의자처럼 생각하고 있나요? 당연히 영어로는 책이 나와 있어야 한다고..?
![]()
아무튼 리스본에서 다녀온 곳 중에선 제일 알차고 재밌었다. 중간중간에 포르투갈어로만 쓰여 있는 설명도 있어서 번역 앱을 많이 돌려야 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5. 저녁
![]()
Bessa Restaurante. 영어 열심히 읽었더니 머리에 불 날 거 같아서 끝나고 바로 저녁 먹으러 왔다. 역시나 네이버에서 추천 받은 리스본 맛집. 지도상의 경로로 쫄래쫄래 찾아갔더니 웨이터가 ‘아 지금 만석인데 우리가 건너편에 분점이 있거든? 쓰는 재료 똑같고 메뉴 똑같고 완전 똑같애. 괜찮으면 거기 가서 먹을래?’ 해서 분점으로 왔다. 문어 요리와 샹그리아 한 잔을 시켜서 같이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샹그리아 또 먹고 싶다.
![]()
A Ginjinha. 밤에 진지냐를 처음 마셔봤다. 그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체리로 만드는 포르투갈 전통주라는데 포트 와인과 비슷한 결의 맛이 난다. 포트 와인보다 조금 덜 달고 조금 더 도수가 높아서 덜 질리는 느낌? 원래도 단맛이 가미된 술을 좋아해서 (포터 계열 흑맥주, 막걸리..) 진지냐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내 몫의 한 병을 샀다. ‘아 진지냐’가 제일 리뷰 수가 많긴 한데 사실 공항 면세점에서 산 진지냐도 충분히 맛있었기 때문에 꼭 어딜 가서 살 필요는 없는듯.
그리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아? 저거 두 병 살걸 그랬다. 벌써 얼마 안 남았다 얼마나 마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