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공항으로 이동

오늘은 뮌헨에서 리스본으로 이동하는 날. 비행 시간만 세 시간 반 정도 걸리기 때문에 출국/입국 수속 생각하면 이날은 거의 이동만 한다고 봐야 했다. 실제로도 가서 체크인하고 밥 먹는 거 외에 별다른 걸 하진 않았다.

0-1.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누가 chest pain 을 호소하며 몸을 잘 못 가누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냐, 혹시 도움이 필요하진 않냐 물어보던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끝까지 거절하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지하철 문 닫히는 걸 강제로 개방하는 사람, 역무원을 부르는 사람, 119에 전화해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내가 한국에서 같은 상황을 봤어도 이만큼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0-2.

뮌헨 국제 공항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있는 지역이 바로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의 그 프라이징이다. 뮌헨에 한 사흘 더 있었다면 프라이징도 가봤을 거 같다. 프라이징 대성당 외에 어디를 더 가보면 좋을지 정보는 전혀 없지만.

아무튼 굿바이 독일. Auf Wiedersehen. 마차살 드리븐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오늘부터는 고등학생 시절 최애 작가의 마지막 사리를 수확하기 위한, 그리고 맛있는 걸 먹기 위한 여행이 시작됩니다.

1. 기내 독서

1-1.

요 며칠 독서 기록 백업이 뜸했다. 우선 여행 다니느라 마차살 자체가 밀렸다. 최신 회차를 두 편 정도 못 본 상태였고 비행기 탈 때 다운받아서 갔는데, 이게 내가 머물렀던 나라와 최신화 내용이 맞물려 뭔가 전운이 감도는 걸 느끼고 망명 가는 사람의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원래대로라면 비행기 탑승 전에 그날의 최신화가 나왔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연재 지연이 되는 바람에 ‘아트로포스 쓰면 해결되지 않나?’ 파트에서 기내 독서가 끝났다. 그래서 더더욱 ‘아 이거 안될듯!’ 하고 도망가는 사람 같았다는 이야기.

1-2.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완전히 다른 논증 방식을 선호한다. 그는 수학자처럼 오성을 바라본다. 수학에서 시간적 발달 과정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2+2=4>라는 명제는 시간적 과정이 아닌 논리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서서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과 모든 시간 관념에 상관없이 타당하다.

같은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철학에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가 <이전>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시간적 과거의 의미에서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논리적 <이전>을 뜻한다.

독서 기록을 내가 해뒀는데도 이게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앞뒤 분량을 다시 읽어봤다.

우리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우리가 감각한 것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내 시야가 닿지 않았던 곳에 미처 몰랐던 장애물이 있을 수 있고 인간보다 시각/후각이 뛰어나 우리 이상으로 감각하는 동물 역시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세계에 대한 관념(ideas)이다. 그렇다면 이 관념은 객관적 현실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세계 그 자체를 보고 있는가? → 요게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점 중 하나다.

앞에서 만났던 쿠자누스는 세계에 대한 모든 앎은 오로지 우리 의식 속에 있는 앎이라고, 즉 일치 여부는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반면 로크는 자연 과학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느끼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간 오성론』을 통해 건강한 오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차는 좀 있을지언정 객관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크는 다분히 상업적인 언어를 썼다. ‘어쨌든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지 않느냐! 현실이 존재한다는 걸!’ 그는 경험론의 대표 주자였고 도덕 역시 경험적으로 취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대 철학자들조차 로크의 사상이 어딘가 어중간하다고 느꼈다.

라이프니츠는 로크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모든 경험 이전에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생득 관념을 옹호했다. 로크에게 오성이 텅 빈 상태에서 시작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덧입혀지고 채워지는 것이었다면 라이프니츠에게 오성은 처음과 끝이 없이 언제나 타당한 법칙이다. 마치 수학처럼. 수학을 보면 1이라는 숫자를 쓰는 방식은 언어권마다 다를 수 있어도 하나라는 관념, 둘이라는 관념, 하나와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된다는 명제 자체는 언어와 무관하게 항상 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수학적 논리에서 우리는 선험적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진리는 수학 안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도덕적 행동으로도 확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물음이었고 많은 사상가들이 이 문제에 천착했다. 그 얘기가 재밌어서 캡처해 둔 페이지였다.

2. 리스본 도착

세 시간 반의 비행 끝에 포르텔라 국제공항 도착. 처음 독일에 갔을 땐 7시간 시차였는데 이번주부터 서머타임이 끝나면서 8시간 시차였고 리스본에 온 오늘부터는 9시간 시차다. 글로벌 타임존 체험 흥미롭네.

2-1.

대중교통 지연이 장난 아니다. 동네 분위기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언젠간 버스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곳이구나.

2-2.

뭔가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어요.

핏짜가 너무 먹고 싶다는 내면의 강렬한 외침 때문에 무턱대고 시켰지만 양을 생각하면 역시 파스타를 먹어야 했다. 피자를 먹을 거라면 좀 덜 느끼한 걸로 시켜야 했다. 그래도 티라미수 안 시킨 게 어디예요? 남은 피자는 포장해서 다음날 아침으로 야무지게 먹었다. 사실 가보고 싶었던 식당은 따로 있었는데 입구 코앞까지 가서야 예약이 필수였다는 걸 알게 됐다. 여긴 P가 여행 다니기 좋은 곳이 아닌가봐.

내일부턴 정신 차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