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아침

유럽여행 8일차. 여행 다닌 기간 중에 가장 하늘이 맑았다. 다소 억울할 정도였다. 이렇게 날씨 좋을 수 있었는데 그동안 저한테는 왜 그랬던 거지요.

오늘 오전의 일정은 어제 보지 못한 님펜부르크 궁전 관람. 그런데 버스에서 창밖을 보며 날씨 좋다고 멍때리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 (늘 이런 식이다.) 한 정거장 지나서 내리자 구글 맵이 보태니컬 가든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경로를 알려줬다. 그러나 슬프게도 가든 출입구 앞까지 다가가자 exit only 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는 여기가 길이 맞는데 사정이 있어서 막힌 건지, 지도가 잘못된 건지, 경로가 대차게 꼬이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싶을 때즈음 바로 옆에 있던 BIOTOPIA Lab 과학박물관 건물에서 어떤 아저씨가 이리로 들어오라고 손짓해 줬다.

사실 지금도 그 아저씨가 나에게 길을 알려주고자 했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면 관광객에게 길을 알려주는 사람치고는 내게 건물 출입문만 열어주고는 쌩하고 자기 길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나를 화장실 급한 사람으로 오인한 건지 (만약 그랬다면 그 또한 대단한 친절이긴 한데) 아니면 과학박물관에 면접 보러 온 학생으로 착각한 건 아닌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내가 돌아다닌 층이 실제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곳이 아니라 직원 분들의 사무 공간과 창고로 보였어서 더더욱.. 아무튼 혼자 혼란스러운 상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계단을 통해서 보태니컬 가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덕분에 아무도 없는 시간대의 정원을 유유히 걸으며 즐겼다.

이게 진짜 맞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의 구글 지도 캡처..

카누를 타고 진행하는 호수 투어 프로그램이라도 있는 걸까? 왜 여기에 카누가 정박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수 투어가 있다면 추위에 오들오들 떨더라도 한번쯤 해보고 싶은데 말이다.

드디어 티켓 사러 가는 길. 내부 관람이 가능한 곳은 님펜부르크 궁전과 마차 박물관 두 곳인데 당연히 둘 다 볼 때와 님펜부르크 궁전만 볼 때의 가격이 다르다. 나는 궁전만큼이나 마차 박물관이 궁금했기 때문에 둘 다 볼 수 있는 티켓으로 끊었다. 티켓을 끊자마자 바로 입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엔트리 타임 내에 입장이 가능한 시스템이고, 내가 도착했을 땐 님펜부르크 궁전의 다음 엔트리 타임까지 40분 정도 남은 상태라 마차 박물관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1. Marstallmuseum (마차 박물관)

마차 박물관에 오고 싶었던 건 전적으로 이곳이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쓰던 마차를 모아둔 곳이고 『마차살』에서도 인물들이 마차를 타는 장면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배경이 19세기라고는 해도 장르가 판타지인지라 등장인물들은 보통 교통 수단 대신 마법을 써서 이동하는데, 딱 한 번 자기들끼리 놀 때 기분전환 삼아 마차를 탄다. 물론 소설에는 눈에 띌 걸 생각해서 일부러 왕가의 표식이 없는 걸로 골랐다고 나와 있다. 그럼 원래 마차는 어떻길래? 오로지 그 호기심으로 입장했는데⋯.

들어가는 순간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 금 테두리와 미친 사랑에 빠진 듯한 마차들의 향연에 입이 쩍 벌어지는 동시에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게 과연 왕가의 표식만 없다고 될 일이었을까요? 어디를 둘러봐도 보아라 이것이 왕국이다!!! 하는 기세가 엄청난데? 100m 밖에서 지나가도 알겠는데? 그냥 어떤 왕가의 교통 수단이었다고만 하면 와 정말 돈이 많고 금을 좋아하셨군요! 정도의 감상으로 끝났을 텐데, 픽션 속의 비텔스바흐 왕세자 캐릭터에게 내적 친밀감이 있는 상태에서 이 마차들을 보니 너무너무 놀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너네 집에서 이런 거 타? 정말 대단하다. 내가 그동안 금 테두리 안에서 자라난 왕자님을 미처 몰라뵈었구나.

도대체 이게 다 뭔가 하고 설명을 열심히 읽어봤다. 첫 번째 마차가 이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컬렉션으로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이후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던 카를 알브레히트의 마차다. 프랑스 로코코 양식이고 잘 찾아보면 비텔스바흐 가문의 상징으로 네 마리의 사자 장식이 달려 있다. (사실 사자는 원래 팔츠 선제후국의 상징이었고 명칭도 팔츠 사자인데 이후에 팔츠를 계승한 이곳저곳의 상징으로 쓰였다. 주로 바이에른과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쓰긴 하나 이곳 고유의 문장은 아니다.) 두 번째 마차는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왕국으로 바뀐 1806년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가 탔던 마차다. 나폴레옹의 마차를 모델로 삼아 그 시절의 기술이란 기술은 다 집약해서 만들었다고. 정말이지⋯.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자주 나오던 ‘감히 ㅇㅇ 가문의 마차를 불러세우다니!’ 하는 대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문에 번쩍번쩍 반짝이 칠도 하고 바이에른 상징인 하늘색 마름모 문양에 사자에 왕관까지 박아넣은 이런 걸 아무렴 진짜로 몰라보고 불러세울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이곳에 전시된 마차는 거의 대부분 루트비히 2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바이에른 통치자 중에선 가장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루트비히 2세는 실제 차살 시대쯤 살았던 인물인데 (따라서 소설 안에서 가끔 언급되는 비텔스바흐 구인류 직계 조상도 아마 이쯤이 아닐까 추정된다.) 정치엔 관심이 없는 대신 예술을 사랑했고, Fairytale King 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게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했고, 말년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음, 정말⋯ 현대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실존 인물 상대로 이렇게 완벽하게 타자화된 감상 죄송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사실 난 비텔스바흐 가문에 정신 병력이 있다는 사실도 독일에 와서야 알았다. 내가 소설에서 봤던 바이에른은 그러니까 꿈과 환상의 바이에른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화려한 비텔스바흐 마차는 원없이 볼 수 있었다. 근데 마차 높이가 꽤 높던데 발받침이 없는 게 많아서 이 가문 사람들이 전부 짱 큰 키라 이 정도 높이는 폴짝 한번이면 올라탈 수 있었던 건지는 조금 궁금했다. 일단 루트비히 2세는 키가 193cm 였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2. 님펜부르크 궁전 (2)

드디어 엔트리 타임이 되어서 입장했다. 그리고⋯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소 원 성 취

하지만 동시에 지울 수 없는 생각 한 가지 : 그럼 뭐하나 주인공은 이제 님펜부르크에 방 없는데

뭐 더 길게 쓸 게 없다. 둘러보는 내내 너무 아름답다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궁전 외곽을 따라 강아지 데리고 조깅하는 사람들이 그림 속 풍경처럼 덩달아 아름다워 보였던 곳. 두 시간 정도 알차게 돌고 마지막까지 잘 즐기다 갔다.

3. 뮌헨 레지덴츠

오늘 오후의 일정은 대망의 뮌헨 레지덴츠, 그러니까 왕세자 저하의 집에 왔다. 제대로 돌려면 넉넉하게 세 시간은 잡아야 한다는 후기를 봤던지라 점심도 거르고 잽싸게 입장했다.

찍어온 사진은 많은데 이걸 어디서부터 보여줘야 하지.

  1. 비텔스바흐 가문의 조상들이 다 모여 있는 ancestral gallery. 레지덴츠에 입장하면 처음 만나게 되는 공간이다.
  2. 루카스가 성 후베르투스 기사단 서훈을 받았던 안티쿠아리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건축물 중 하나다.
  3. 그 시절의 다이닝 룸.
  4. 왕의 홀.

벽 전면을 둘러싼 장식용 대리석의 색을 따와 yellow staircase 라고 불리는 이곳은 바이에른 왕의 개인 처소와 왕궁을 잇는 입구로 사용되었다고. 그렇다면 여기 어디에 힐데가르트 전하가!

  1. 법정 예배당
  2. 화려한 예배당 (진짜로 영어로 이렇게 써 있었다)
  3. Room of green (진짜 방 이름이 이거였다. Green Gallery 라고도 하는듯)
  4. Room of mirrors

여기가 방이 정말 많다. 정말정말정말 많다. 어느 방 하나에 들어가서 와 예쁘다, 감탄하고 다음 방에 들어가면 와 여기도 예쁘다, 감탄하고 다음 방에 들어가길 무한반복이다. 코스 중간중간에 의자가 놓인 이유, 애초에 투어 코스가 short course 와 long course 로 나눠져 있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방 저 방을 누비며 걸으면 걸을수록 내가 보고 싶어서 들어온 건데도 어째 열받는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자기 집 넓다고 자랑하는 거 같고. 비텔스바흐 가문은 도자기 컬렉션으로도 유명해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세계 각국에서 사모으는 걸 좋아했다고) 뮌헨 레지덴츠 안에도 무수히 많은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는데 일본과 중국에서 싹싹 긁어온 그릇들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좀 열받았다. ㅋㅋ 이자식이?

방이 하도 많아서 Room of eternity 도 있고 Room of justice 도 있고 Room of religion 도 있고 Room of the church 도 있다. 없는 방이 뭘까? Room of green 까지 만나고 나니 이쯤이면 이 집에 없는 방 이름 짓기로 술게임도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다분히 한국적인 발상이 떠올랐다.

왕비의 살롱, 왕비의 도서관, 그리고 언제든 그만 보고 나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표지판..

뮌헨 레지덴츠를 각 잡고 보려면 세 시간이 걸린다는 정보는 틀렸다. 적어도 이 안을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닐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세 시간동안 발에 땀나게 걸어다녔는데 어림도 없었고 마지막엔 시간이 부족해서 마치 이 정도 화려함은 일상 속에서 내내 봐왔던 사람처럼 쾌속으로 모든 방을 지나쳤다. 마음은 급한데 내부 경비가 삼엄해서 뛰지도 못한다. 이 순간 문득 생각나는 씬이 하나 있었으니,

재의 수요일 지나고 레오가 루카한테 피 마셔보라고 했다가 잡기놀이 우당탕 한번 한 다음 레오가 약간 어이없어하며 여긴 자기 집이라고 말하는 장면. 그러니까 이 에피소드의 배경도 뮌헨 레지던츠다.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뮌헨 레지덴츠를 직접 내 발로 돌아보고 나니 굉장히 의구심이 들었다. 암만 이게 자기 집이어도 그렇지 방이 이렇게 많은데 도주 루트를 다 꿰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네가 아무리 신인류에 왕세자에 휘황찬란한 설정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도 그건 인간인 이상 불가능하다는 반박을 하고 싶은데⋯.

심지어 여기도 겨울 시즌이라 마지막 엔트리가 오후 네시까지였다. 뮌헨 레지덴츠라고 묶어서 부르긴 하지만 엄밀히는 박물관과 보물관, 쿠빌리에 극장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세 곳 모두가 네 시 입장 마감이다. 나는 박물관을 보는 데에만 세 시간 넘게 걸렸고 나머지는 엔트리 타임 끝나기 직전에 뛰어 들어가서 우와아아아~ 하고 보고 나와야 했다. 쿠빌리에 극장은 별 거 없었는데 보물관을 진득하게 못 둘러본 게 아쉽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바로 성 후베르투스 기사단의 복음서와 훈장. 정식 명칭은 Royal Order of Saint Hubert 다. 기사단이라고 해서 영락없이 Knights 로만 찾고 있던 나를 반성한다. 화려한 세공이 알알이 박힌 훈장과 역시나 금 테두리에 둘러싸인 번쩍번쩍 복음서를 보며 주인공이 성 후베르투스 기사단 서훈을 받았던 장면을 근사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물론 실제 저 시기의 성 후베르투스 기사단 훈장은 군사 훈장으로 주로 쓰였다고 하지만.

마지막엔 거의 뛰다시피 해서 퇴장했다. 잘 있어라 뮌헨 레지덴츠! 나는 이만 간다.

3-1.

Bauer & Hieber Munich. 중간에 또 탐나는 서점을 하나 발견했다. 음악 전문 서점인지 음반, 악보, 음악가에 대한 책으로 1층부터 지하 1층까지 꽉 차 있었다. 서점이 예쁘고 주제가 확실한 것도 마음에 들어서 기념으로 시디를 한 장 살까 고민했지만 파손되기 쉬운 기념품은 그만 사는 게 좋겠다는 판단 하에 패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가 지는 뮌헨을 보기 위해 올라봅니다.

4. 성 피터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본 뮌헨의 전경

이 정도면 엘리가 사랑하는 뮌헨 풍경을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5. 호프브로이하우스 (2)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은 다시 찾은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마무리했다. 뢰벤브로이와 호프브로이를 한 잔씩 마시고 종탑을 오르는 게 진짜 코스지만 입장 시간상 무리기도 하고, 도저히 술 마신 상태로 15층 계단을 멀쩡하게 오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

오늘은 지난번과 달리 중앙에서 악단 연주가 있었다. 술 홀짝홀짝 들이키면서 연주에 맞춰 박수를 치자니 굉장히 흥겨웠다.

마지막 날을 기념해 호프브로이 오리지널 1L 도전. 아예 잔이 1L 짜리라 굉장히 크고 한 손으로 들기엔 무거웠다. 요리는 너무 뻔하지만 그래도 한번은 먹어야 할 거 같았던 학센으로 했다. 이제는 이 고기와 크뇌델(knödel)에도 완전히 적응해서 자우어크라우트 안 주면 섭섭할 지경.

독일 여행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