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아침

호텔 조식을 든든하게 먹었다. 사진은 안 찍었지만 한쪽 면이 구워진 식빵과 스프와 과일주스를 열심히 갖다 먹었던 게 기억난다. (밖에 나가면 다 돈 내고 사먹어야 하지만 뷔페에선 무한리필! 유럽 물가가 인종차별보다 무서워!) 이날 오전은 기징 스타델하임 교도소 - 기징 기차역 - 임의의 김나지움을 찍고 종탑에서 마무리하는 게 목표였다. 이게 무슨 코스냐면 『마차살』 434화부터 439화까지 주인공들의 이동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코스다. 교도소에서 종탑까지 거리는 총 5km. 소설처럼 뒤에서 폭주자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므로 나는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1. 기징 스타델하임 교도소

『마차살』 독자를 열 명쯤 앉혀놓고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말해보라고 하면 절대 빠지지 않을 후보군이 몇 개 있다. 첫 번째가 530화의 부활절. 한데 530화의 배경은 ‘바이에른 어느 교회의 첨탑 뒤 붉은 건물 지붕 위’라서 대체 이 넓디 넓은 바이에른의 어느 교회 어느 건물인지 전혀 특정할 수 없을 뿐더러 그곳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독자를 감동시킨 것이지 장소가 중요한 회차는 아니었다. 그래서 부활절 에피소드의 전체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밤베르크와 뉘른베르크를 대신 들른 거였다. 하지만 530화와 함께 이 작품에서 독자들 울리기론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439화의 종탑 장면은 장소적 배경이 굉장히 명확하고, 왜 그곳이어야 했는지 이유도 명확하다. 이건 도저히 전개 순서대로 직접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에피소드의 시작점인 기징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소설에서는 이곳에서 폭주 사건이 발생하며 주인공 일행이 인명 구조를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바로 스타델하임 교도소. 이곳은 지금도 교도소로 쓰이고 있는, 그러니까 실제 교도소다. 소설에서만 보던 스타델하임 교도소를 실제로 본 나의 첫인상은 어째 이 나라는 교도소 건물도 간지가 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길을 건너고 싶은데 횡단보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납득이 되는 설계기도 했다. 교도소를 누가 도보로 접근해 보통은 접근 자체를 안하지⋯. 세 번째 인상은 건물이 너무 크다는 거였다. 소설의 배경은 1897년인데 그때 벌써 천 명 가까이 수감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몇 명이나 있는 걸까 싶어 찾아보니 1300명 넘게 수감되어 있고 긴급 상황에는 2100명까지 수감 가능하다고 한다. 독일에서 가장 큰 교정시설이라고.

교도소 간판과 건물을 둘러싼 장벽. 주차된 차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면 이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이거 찍는다고 도로를 왔다갔다하는데 장벽 너머 건물의 창살 사이로 사람이 돌아다니는 게 보여서 잠시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여기는 실제 교도소다 미친 건 나다⋯.

2. 기징 역

다시 『마차살』 이야기. 스타델하임 교도소에 인명 구조를 하러 갔던 주인공 일행이 3층에 진입하는 순간 건물이 무너져내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3층 진입로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은 여기가 어딘지 모를 외딴 세계에 와 있다. 건물 외형은 조금 전까지 있던 교도소가 틀림없는데 두 사람을 제외하곤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둘은 대화 끝에 자신들이 ‘다른 좌표계’에 떨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좌표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차살』은 유독 공간에 대한 설정이 복잡해서 나는 이 기술에 대한 이해가 작품 감상에 아주 크리티컬한 요소는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내맘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집앞 카페에서 친구를 만난다고 가정하자. 그럼 나와 내 친구가 물리적으로 함께 자리한,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서의 카페가 우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 주민인 내가 이 카페의 이름을 듣고 연상시키는 나만의 심상 공간 카페가 있을 것이고, 이 카페에 처음 와보는 친구가 받아들이는 낯선 공간 카페가 있을 것이다. 그걸 전부 다른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가시적으로 분리된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러면 하나의 물리적 공간(=원본) 위에 여러 개의 심상 공간(=복사본)을 중첩시키는 게 가능하고 각 공간의 출입을 전부 다르게 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무렴 내가 친구와 커피 한 잔 마셨다고 친구의 심상공간 카페에 곧장 들어갔단 의미는 아닐 테니까. 작중에서 이 공간 기술에 가장 능한 건 황실에서 핍박받는 평민 마법사 집단인데, 그들이 황실의 눈을 피하는 수단으로 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퀴어 공간 같은 것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면 원본과 복사본이라는 지칭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엘리의 말도 일리 있게 느껴진다. 물리적 공간은 그저 심상 공간에 대한 공통된 이해에 불과하니까. 또 같은 물리적 공간이어도 그곳에서 추억을 쌓는 보폭은 저마다 다르니 심상 공간의 시간이 모두 다르게 흐른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완전 야매지만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작가님 자꾸 양자역학에 다세계 해석에 별 걸 다 들고 오시는데 저는 무리예요 저는 삼차원 공간에서도 길 잘 못 찾아요⋯.

아무튼, 이 공간에 살아있는 인간은 둘뿐인데 둘을 쫓아오는 폭주자는 사방팔방에 깔려 있다. 건물 무너질 때 이미 중상을 입은 탓에 상태도 좋지 않다. 어디로 숨어야 할까? 이때 종탑에 오르자는 말이 처음 나온다.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뮌헨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지만 후퇴로가 없는 곳을 택할 수는 없다는 주인공의 결정에 따라,

Chiemgau 도로에서 시작된 대화가 기징 기차역을 지나 석조 건물 김나지움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찍어온 Chiemgau 도로의 표지판과 기징 기차역으로 향하는 사거리. 스타델하임 교도소가 있던 골목을 빠져나와 이 사거리로 나오면 그때부터 기징 역까지는 직진이다. 뮌헨 시가지가 있는 방향으로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고, 소설 속 다른 좌표계 묘사에서는 이 부근이 전부 뻥 뚫린 평야로 나오지만 2025년 실제 독일의 기징은 주택가가 대부분이다. 사람도 없고 한적해서 느릿느릿 산책하기 좋았다.

기징 역. 기징 역은 특별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이동 경로에 잠깐 등장했을 뿐이지만 그래도 온 김에 둘러봤다. 맨날 중앙역(hauptbahnhof)만 다니다가 일반역(bahnhof)를 보니까 엄청 작아보이더라. 하지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뮌헨 대중교통의 중심지 중 하나라고. 통근열차가 자주 다닌다는데 사람들 통근할 시간대에 온 게 아니라서 이렇게 한산했는지도 모르겠다.

3. 김나지움

김나지움은 찾아가기 좀 어려웠다. 구글 지도로 검색했을 때 기징 역과 뮌헨 시가지 사이에 찍히는 김나지움이 대여섯 군데는 되는데 석조 건물이라는 단서만으로는 특정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목조 건물이 드물지 않을까) 무엇보다 김나지움은 학교란 뜻인데 오늘은 평일이므로 자칫 잘못하면 남의 나라 중학교 건물을 수업 중에 멋대로 기웃거리는 외국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충 가는 길에 김나지움 한두 군데 들러서 조용히 사진만 찍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한 김나지움 앞에서 ‘오 이거 제법 석조 건물이야! 왠지 이거 같은데!’ 하면서 표지판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스테인리스 표지판에 내 몰골이 너무 선명하게 비쳐 나와서 업로드는 패스 ㅋㅋ

4. 이동

이제 어디로 이동하느냐. 김나지움으로 대피해 잠깐 회복하고 시간을 번 두 사람이 다시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여기를 나갈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이미 한쪽 다리에 감각이 없고, 이제 엘리아스도 중상이고, 둘은 사실상 죽어가고 있다. 그럼 어디로 갈 것인가?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뮌헨 전경을 볼 수 있는 성 피터 교회의 종탑으로 가야지.

기징 역부터 종탑까지는 약 4km. 걸어서 45분이 걸린다. 한쪽 다리에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중상을 입은 성인 남성을 안고 뛰었을 때 몇 분이 걸리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열심히 걸었다. 중간에 예쁜 공동묘지가 있어서 잠깐 구경도 하고, 단풍길에서 완연한 가을 분위기도 즐겼다. 파울라너 양조장도 봤는데 유명한 맥주 양조장이 워낙 많은 동네라 별 감흥은 없이 지나쳤다.

가는 길에 혹시 저~ 멀리 성 피터 교회가 보이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주변 구경을 했지만 아쉽게도 찾지는 못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건 Mariahilfkirche, 도움의 성모 마리아 교회. 루트비히 1세의 통치 기간인 1831년에서 1839년 사이에 지어진 독일 최초의 네오고딕 양식의 교회라고 하고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건 Kath. Pfarramt St. Maximilian, 성 막시밀리안 가톨릭 교회다. 정말 다양하고 많은 교회가 있어서 이런 거 도장깨기하고 다녀도 재밌었을 거 같긴 하다.

뮌헨 시가지 진입. 얼마나 왔다고 벌써 이 로터리가 반갑다.

5. 서점

Wortwahl Buchkultur. 로터리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굉장히 귀여운 서점을 발견했다. 원래의 목적지인 성 피터 교회는 잠시 밀어두고 한 시간 가까이 서점 구경을 했다. 한 시간씩 필요할 만큼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는 아니고 그냥 내가 무슨 책 살지 고민하다가⋯. 엽서도 팔고 책도 판매하지만 요리책과 아동도서에 특히 중점을 둔 곳인지 요리책 큐레이션이 상당하다. 비건 레시피북이 아유르베다, 페르시안, 커리(!), 동유럽, 차이니즈, 재패니즈, 코리안으로 정리된 곳은 처음 봤다. 마음 같아선 저 서가를 그대로 업어오고 싶었는데 요리책은 책 중에서도 비싸고 무거운 편이라 눈으로만 즐기고 포기.

서점 정말 만족스러웠다. 여행 다니는 내내 서점을 하루에 한 군데씩은 꼭 들렀지만 만족스러운 큐레이션을 찾지 못하다가 여기서 처음으로 굿즈와 책 구매를 했다. 독일어를 아예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잘 몰라도 번역기 돌려가며 읽을 수 있을 동화책이나 시집을 사고 싶었고, 다행히 직원 분이 영어를 할 줄 아셔서 적극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도움이 실제로 내 구매 목록에 영향을 미쳤느냐? 하면 원래 직원 추천은 참고용으로 킵만 해두고 내 책은 내가 고르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튼 오늘부터 여기가 뮌헨 최고 서점이다.

서점에서 산 것은 시집 두 권과 핀 뱃지. 핀 뱃지에 적힌 Servus 는 독일 인삿말이다. 독일어로 안녕하세요는 Guten Tag 아니에요? 할 수 있는데 그건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북쪽에서 많이 쓰이고 남부인 바이에른은 Servus 를 월등히 많이 쓴다. (참고: German Greetings in Different Dialects) 비텔스바흐 블루 컬러와 ‘바이에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산 핀 뱃지는 지금도 가방에 잘 달려 있다. 시집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파울 첼란을 한 권씩 샀다. 이름을 아는 독일 시인은 이 정도가 다였기도 하고,

시구를 잘 외우고 적재적소에 써먹는 엘리아스를 동경하는 울리케가 귀여워서, 나도 한번 따라해 보고 싶었기도 하고⋯.

6. 성 피터 교회

열심히 걸어서 드디어 성 피터 교회 도착.

전망대는 성인 기준으로 5유로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현금밖에 받지 않고 10월까진 아직 서머 타임이 적용되어서 입장 마감 시간은 7시. 교회 내부도 제법 화려하지만 이쪽은 우선순위가 낮아서 가볍게 패스했다. 한 바퀴 둘러보긴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의 그 전망대는 다음 글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