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아침

슬슬 관광객 자아를 놓기 시작했다. 밖이 이렇게 추운데 굳이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녀야 할까? 음식도 맛없는데. 어제 사온 쿠키가 이 나라 들어와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는 거 같은데. 에잉 귀찮다. 잠이나 더 자자! 하고 도로 드러누웠다. 오전 11시가 되기 직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어제 생각보다 피로가 쌓였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지난 닷새간 방한용으로 알차게 입고 다닌 기모 후드는 페퍼톤스 20주년 공식 굿즈, 여행 내내 차고 다닌 손목시계는 웹소설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a.k.a 문송안함) 공식 굿즈, 만 5세가 된 아이폰을 끊임없이 되살려내는 보조배터리는 웹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a.k.a 데못죽) 공식 굿즈, 그러니까 온몸을 굿즈 상품으로 도배를 하고 다니면서 정작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작품은 아직 공식 굿즈랄 게 없어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새삼 웃기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올 수도 있을까? 예전보단 굿즈 욕심을 많이 버렸지만 파이 인형이 나온다면 그건 사고 싶을지도⋯.

오전 11시에 밖에 나왔더니 웬걸. 동네가 시끄러웠다. 누가 봐도 마라토너 같은 복장을 하고 우르르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갑자기 텐션이 올라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 쫓아가는 마냥 뭔데 뭔데? 나도 알려줘 뭔데 뭔데? 의 마음으로 광장까지 따라갔다. 몰랐는데 이날 뉘른베르크에서 마라톤 행사가 있었다. 우중충하고 흐린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파란색 하늘 아래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내가 나올 때쯤 뛰던 사람들은 아마 하프 마라톤인 거 같았다. 길목 곳곳이 달리기 코스로 쓰였는지 길가에는 종이에 알록달록 문구를 써서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서 있었다. 성 제발트 교회가 보이는 광장에서 마라톤 대회라니. 찾아보니 SportScheck 라는 독일 스포츠 브랜드에서 주관하는 SportScheck RUN 이란 행사로 올해만 총 여섯 개의 도시에서 진행되었고 이날 있었던 뉘른베르크의 대회가 그 중 마지막이었다. 달리는 분들은 추위 따위 느껴지지 않는지 모두가 경량패딩을 꺼내 입은 이 날씨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쌩쌩하게 뛰고 계셨다. 멋있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ㅋㅋ) 나도 러너들이 지나갈 때마다 계속 환호하고 박수를 쳐주었다. 응원 피켓을 들고 있는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는 분도 만나서 아 오케이, 하고 부탁도 들어주었다. 어쩐지 굉장히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0-1.

확실히 이곳은 대형견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지나는 길에 일어서면 나보다 키 클 거 같은 허스키를 만났다.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과 식사를 즐기고 있고 강아지는 길 위에 철푸덕 주저앉아 있었는데 저 친구가 두 발로 섰을 경우에 대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쟤는 모자 씌워주고 포크 쥐여주면 지가 알아서 스테이크도 썰 거 같은데⋯.

1. 뉘른베르크 성

이 성만큼은 조금이라도 날씨가 좋을 때 오고 싶어서 방문을 미루고 미뤘던 것이 의미가 있었다. 성문을 처음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선생님들 여기 보세요 발더스 게이트가 여기 있어요!!! 이게 원래대로라면 게임을 보고 ‘우와 정말 현실 같다 잘 만들었다’고 감탄해야 하는데, 게임을 먼저 접하는 바람에 그 베이스가 된 현실을 보고 ‘우와 정말 게임 같다 잘 만들었다’고 거꾸로 감탄하게 된다. 일단 저 성문부터도 그렇다. 성문을 보고 저걸 힘겹게 열었을 사람들, 과거의 사회와 기술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혹시 저 문에 손을 마우스 커서처럼 갖다대면 오브제 움직일 수 있게 메뉴가 뜨진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괜히 문에 대고 칼 휘두르면 화염 저항 냉기 저항 강도 ㅇㅇ에 의해 피해 받지 않습니다 안내창이 뜰 거 같고.

근데 어쩔 수가 없다. 발더게 전투에 이골이 난 플레이어한테 이런 풍경 보여주면 머릿속에서 이미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에너미 위치 파악 고지 점령 전투 배치 화약 어디다 갖다놓고 누가 먼저 때려야 최적일까. 지금도 사진을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성을 돌아다니는 내내 ‘우와저이거발더게에서봤어요 우와 발더게 맵 안에 들어온 거 같아요 혹시 NPC는 없나요? 루팅할 수 있는 나무상자는? 나한테 시비 거는 고블린은?’ 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발더게 하는 사람과 이 풍경을 같이 봤다면 이 얘기만 하루종일 했을 거라는 데에 저희 집 4레벨 타브를 걸 수 있습니다.

뉘른베르크 성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15분마다 울리는 교회탑 종소리가 풍경에 잘 어울렸다. 한국에선 들을 일이 잘 없어서 몰랐는데 낮고 길게 울리는 소리가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게 굉장히 좋은 느낌을 준다. 그건 독일 여행 내내 그랬다.

은행잎이 펑펑 쏟아져내리던 가을. 날씨 싸늘하고 스산한 늦가을 뉘른베르크에 정들고 있어서 약간 짱났음..

그리고 성에서 내려오고 나니 귀신같이 다시 날이 흐려졌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

2. Bratwurst Röslein (두번째)

뉘른베르크 첫날에 왔던 식당에 다시 왔다. 실은 첫날 왔을 때 chestnut soup 가 시즌 메뉴로 나와 있는 게 조금 궁금했는데 Schäufele 를 먹는다고 도전을 못했었기 때문이다. 밤 수프라니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고, 시즌 메뉴는 이날까지가 마지막이었고, 이 식당의 베스트 메뉴인 소시지도 아직 못 먹어봤으므로 겸사겸사 재방문.

다른 사람들은 뭘 먹나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다 보면 문득 이곳의 식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기는 식당에 들어오면 웨이터가 제일 먼저 drink? 를 묻는다. 우리나라는 보통 식사를 먼저 고르고 음료를 ‘조금 더 보고 결정할게요’ 할 때가 많은데 여긴 순서가 반대다. 또 우리나라는 식당/카페/바의 용도 구분이 확실하다면 여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대낮에 식당에 들어와 빵에 맥주나 커피 두 잔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꽤 흔하다. 우리나라는 그런 경우 ‘식사도 가능한 카페’ 내지는 ‘식사도 가능한 바’ 라고 하지, 식당이라고 하지 않는다. 식당에 들어와 딸랑 커피 한 잔 시키고 앉아 있는 손님은 손님이 아니라 진상이라고 불린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밤 스프 후기 : 제발 수프 맛집이라고 선전해 제발⋯ 너희는 지금 수프가 에피타이저라는 편견에 빠져서 너희의 진짜 재능을 모르고 있어 지금 소시지가 중요해????

3.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념관

점심을 먹고서는 마지막까지 올까 말까 망설였던 전범재판 기념관에 방문했다. 망설였던 이유는 그저 이곳이 시가지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어 이동이 번거롭고, 이미 기록 보관소를 다녀왔는데 비슷한 곳을 또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순수 귀찮음 때문이었는데 여기 또 올 일이 있을까 싶어 후딱 다녀왔다. 기록 보관소가 나치 역사 전반을 다룬다면 전범재판 기념관의 전시는 재판 그 자체, 뉘른베르크 재판이 어떻게 성사되었고 어떤 논의를 통해 뉘른베르크로 장소를 정하게 되었으며 각 전범들이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에 집중한다. 기존에는 이런 범국가적 범죄를 다룰 수 있는 법률이 미비했기 때문에 국제법이 탄생한 과정도 전시에서 일부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 전날 기록 보관소에서 Franconian Gauleiter 라는 설명으로 만났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전범 판결표에도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는 국제법 중에서도 1. Common Plan or Conspiracy, 4. Crimes against Humanity 항목으로 기소되었고 4번으로 인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깔끔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진. 당시 전범국 쪽 변호인단은 이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여러 차례 이의 제기를 했는데 그에 반박했던 내용들이 독일어로 써 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면 아래와 같이 번역된다. 전시에서 본 텍스트 중 가장 흥미로웠다.

“법원은 관할권도 없고 독립적이지도 않다”

재판 시작 당시, 변호인 측은 법원의 관할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동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들은 법원이 국제법에 근거가 부족하고, 승전국 출신 판사들만 재판부에 참여하며, “침략 전쟁 개시”는 형사 범죄가 아니며 (과거에도 그랬던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런던 규정 제3조를 근거로 법원이 재판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의 모든 쟁점은 재판 과정에서 해결될 예정이었습니다.

“불공정한 절차”

변호인 측의 핵심 주장은 검찰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검찰은 준비 시간과 증거 접근성 면에서 유리했습니다. 검찰은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법원과 변호인 측에 제출할 의무가 없었는데, 이는 영미법 체계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변호인 측은 증거 제출 전에 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검찰 측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독일 변호인단은 반대심문 기법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증거 자료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변호인들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재판은 전반적으로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변호인 측은 연합군이 저지른 만행을 거듭 지적하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 지도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독일 도시 폭격, 1939년 소련군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카틴에서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 장교들을 살해한 사건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법원은 연합군의 범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피고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처벌을 면제할 수 없다며, 이러한 주장을 기각했다.

“NO 범죄, 법 없이 처벌 없음”

일부 변호인들은 1939년 당시 침략 전쟁이 금지된 법률이 아니었으므로 처벌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독일이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하기로 약속했던 1928년 브리앙-켈로그 조약을 언급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재판 과정에서 거의 모든 피고인들은 히틀러가 범죄, 특히 유대인 학살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히틀러가 명령을 내렸고, 피고인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몰랐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문서를 제시하여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던 법정 600호. 지금도 실제 재판 장소로 쓰이는 곳이라 재판이 없는 날에만 관광객에게 개방된다. 방 왼쪽 문에 달린 조각에서 칼을 든 사람은 독일/게르만 법을 상징하고 파스케스를 든 사람은 로마법을 상징해서 양쪽 모두에 어긋나지 않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음성 가이드가 알려 주었다. (참고로 독일에서 음성 가이드를 세 번 정도 이용했는데 세 번 다 이어폰은 따로 주지 않다. 모두가 음성 가이드를 전화기처럼 귀에 대고 듣지만 가뜩이나 영어 리스닝도 힘든 마당에 잘 들리진 않아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다녔다.)

뭐랄까. 전날 다녀온 기록 보관소도 그렇고 전범재판 기념관도 보다 보면 어딘가 덜그럭거리는 부분이 있다. ‘이걸 관광으로 돈 받아먹는 게 우리도 좀 머쓱해 근데 우리도 정답을 모르겠어’가 가끔 느껴진다. 기분 탓일수도 있다. 근데 관광을 온 나도 이거 어디까지 즐거워해도 되는지, 혹시 즐거움을 찾고 싶어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됐고 굿즈의 유무를 궁금해하는 내가 미친놈인 건지 생각을 좀 해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이 공간을 한없이 진지하게 대해보려 해도, 실제로 진지한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전시를 보여주는 쪽도 보는 나도 사회적 정답지로서의 진지함을 일정 부분 연기하고 있고 그 연기에서 도통 벗어나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내가 궁금한 건 ‘근데 정말로 그런 일이 왜 생겼던 걸까요? 가까이서 봤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데 이 공간들은 거기에 대답해주진 않으니까.

3-1.

여담이지만 여기 나오는 ‘로텐바흐’ ‘랑바사’의 정확한 독일어 철자를 몰라서 헤맸는데 기록 보관소와 전범재판 기념관 덕분에 단서를 찾았다. 각각 Röthenbach/Langwasser 였고 랑바사의 경우 나치 운동 거점지이자 강제 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한 걸 알고 좀 숙연해졌다. 지금은 그냥 다운타운이다.

3-2.

철학사 책도 많이 읽었는데 캡처를 별로 해두지 않았다. 하지만 전범재판 기념관을 보고 왔는데 국제법 언급을 놓칠 순 없어서 이 페이지만 남겼다.

3-3.

기념관 다녀와서 잠시 체력 충전하러 들렀던 성 로렌츠 교회. 스테인드글라스가 정말 예뻤다. 저거 한 조각만 떼줬으면 진짜 하나님 믿었을 거라니까.

4. Meistersingerhalle (마이스터징거할레)

오후에는 전날 즉석에서 예매했던 뉘른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봤다. 공연 장소는 마이스터징거할레. 영어로 직역하면 Master Singer Hall 되시겠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대부분 이곳에서 진행된다고.

공연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구글 드라이브를 다시 들어가봤는데 사진도 없거니와 사진을 찍은 기억도 없긴 하다. 아마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 이미 지금도 굉장히 눈에 띄고 모두가 로컬인 가운데 나만 누가 봐도 관광객인데 여기서 카메라까지 들고 싶진 않다’는 무의식적 작용이 있었던 듯. 그래도 다행히 공연 끝나자마자 숙소 돌아가서 남겨뒀던 후기는 있다.

문화충격1. 공연 30분 전에 도착해서 건물 내부에 딱 들어갔는데 아울렛 매장에 잘못 온 줄 알았다. 코트가 왜 이렇게 많이 걸려 있지? 왜냐하면 유러피안들은 클래식 공연에 ‘정장’을 입고 오기 때문이다. 정장 위에 걸쳤던 겨울 코트를 맡길 곳이 그들에겐 필수였던 것이다. 굉장히 당황했다. 난 이날도 기모 후드에 청바지를 입고 갔고 드레스 코드는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혹시 예절에 안 맞다고 입장 막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클래식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문화충격2. 놀랍게도 공연장에서 술을 판다. 예? 우리나라도 공연장 앞에서 커피 정돈 판다. 하지만 술을 파는 건 처음 봤다. 물론 공연장 내부에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확실히 그들에게 있어 술은 교양과 사교의 영역인 것이다.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선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공연 시작 전에 정말 모두가 너나 할 거 없이 화이트 와인을 걸치고 있었다. 하긴 그래, 정장 입고 왔는데 그 정도 우아는 떨어줘야지. 사실 커피보단 와인과 맥주가 이곳의 전통음료겠지.

문화충격3. 가족 단위 관객이 있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4인 가족 일렬종대는 농담 아니고 처음 봤다. 그건 『노다메 칸타빌레』 유럽편에만 등장하는 풍경인줄 알았다. 심지어 이날은 어떤 어린이의 ‘클래식 공연 멋쟁이 관객’으로서 데뷔 무대 같았다.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쯤인데 자기한테 맞는 사이즈의 정장을 차려 입고 벽 앞에 서서 찰칵찰칵 기념사진까지 찍더라. 물론 공연 시작하고 나서는 나보다 세 열쯤 앞에서 여동생과 함께 쿨쿨 자는 모습 봤습니다만⋯. 마치 영화관이 지금만큼 황폐해지기 이전에는 우리도 주말에 가족끼리 영화를 보러 가곤 했던 것처럼 이곳에선 클래식 공연이 가족 나들이 컨텐츠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역시 클래식의 고장인가!

이날의 프로그램

  1.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의 서곡
  2.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
  3.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프로그램 후기

  1. 사실 클래식은 잘 모른다. 하물며 바그너 오페라라니 들을 기회조차 없었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는 틀림없이 한국에선 잘 연주되지도 않는 레퍼토리일 것이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를 배경으로 쓰인 오페라의 서곡을 뉘른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뉘른베르크에서 연주하는 걸 들을 수 있다니 그 자체로 신기했다. 물론 바그너와 뉘른베르크의 콜라보답게 공연 팜플렛에는 이 작품이 히틀러 선전에도 쓰인 적이 있다고 써 있었지만.
  2. 하이든은 듣자마자 오, 하이든, 싶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는 뭘 들어도 오, 궁정 음악, 이라는 느낌이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입니다.
  3. 브루크너 교향곡이 진짜 골때린다. 팜플렛에도 ‘규모가 거대하고 기술적으로 까다롭고 난해하고 공연된 적이 거의 없고’ 등등의 설명이 써 있어서 그렇구나 했는데, 실제로 67분짜리 교향곡을 다 들어보니까 정말 골때린다는 인상이 남았다. 이게 뭔데요⋯. 공연 끝나고 호텔 방에 돌아와서 위키와 음원 사이트를 동원해 다시 들어보면서도 생각했다. 이게 뭘까⋯.

그리고 저녁 먹은 사진도 없는 걸 보면 이날도 쿠키로 배 채웠다. 정말 웃기는 마지막 날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