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7월부터 준비했던 이직 프로세스가 드디어 끝이 났다. 최종 합격은 9월 초에 받았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레퍼리 체크, 처우 협의, 현 회사에 퇴사 통보하기, 면담 및 퇴직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작 면접 보는 동안은 아무 생각 없고 마음도 차분했는데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그게 내 일상을 뒤흔들기 전까지는.) “진짜 정말로” 이직을 할 건지 최종 결정해야 했던 9월 초부터 그에 따른 후폭풍을 고스란히 겪은 지난 한달은 정말이지 다사다난했다. 거기다 퇴사 기념으로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벌려놓은 일도 많아서, 여러 개의 스노우볼을 동시에 굴려야 했던 것도 내적 긴장의 원인이었던 거 같다.
하지만 이젠 그것들마저 모두 가닥이 잡혔으므로, 근래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리하는 글을 짧게 남긴다.
1. 올해 3월부터 다녔던 수영장을 그만두게 됐다. 그동안 월/수 11-12시 강습을 받았는데, 이렇게 애매한 시간대에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내 현 직장이 재택근무를 지원하고 정해진 출근시간도 따로 없고 공유만 잘하면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옮기게 된 곳은 재택근무 제도가 없고 출근 시간대도 7-11시 사이로 고정이다. 잠깐 은행 다녀오느라 자리 비우는 정도는 가능해도 일주일에 두 번이나 열두시 넘어 출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 배우는 선생님도 마음에 들고, 이제 막 접영 들어간 참인데 수영을 그만두는 게 나도 너무 아쉽지만 저녁 시간대 수업은 이미 대기가 많아서 자리 나는 게 쉽지 않을 거 같다고 하신다. 그렇겠죠… 자유수영을 다니는 걸로 얼마나 대체가 가능할진 모르겠다. 자유형 뺑뺑이만 돌아도 체력 유지야 하겠지만.
2. 조립컴퓨터를 맞췄다.
이게 내게 얼마나 큰 변화인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지난 십 년간 아이맥만 써 왔다. 업무 특성상 맥에서만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꼭 써야 해서 필연적이었다. 심지어 집에는 원래 컴퓨터를 두지 않다가, 코로나 이후로 재택근무가 기본이 되면서 집에도 아이맥을 두게 됐다. 집에 컴퓨터를 두 대나 둘 공간은 당연히 없었다. 덕분에 나는 점점 윈도우와 멀어졌고, 가끔 본가에 내려갔을 때 부모님이 “컴퓨터가 잘 안 되는데 이것 좀 봐줘라”하고 부르면 “제가 윈도우를 안 쓴지 너무 오래 돼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옮기게 될 회사는 재택근무 제도가 없고, 이제 나는 재택 환경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니, 이참에 윈도우로 복귀하면서 발더게3을 할 수 있는 사양으로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훌륭하다. 문제는 내가 아이맥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일체형이 아닌 컴퓨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상하다 아이맥은 애플 스토어 가서 이거 주세요 하면 그 자리에서 완제품을 살 수 있는데 게이밍 컴퓨터는 왜 안 되지.. 덕분에 각 부품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뭐가 가성비가 좋고 안 좋은지 등등 찾아보고 검토하느라 (thanks to 컴잘알 친구들 and chatgpt) 시간을 2주 이상 썼고, 혹시 파손될까봐 퀵으로 받기까지 했는데 조심조심 개봉한 컴퓨터가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아서 수리 요청하느라 시간을 며칠 더 썼다. 참고로 원인은 메인보드 불량이었다. thanks to 다나와 수리 기사님. 지금은 아주 잘 동작해서 새 컴퓨터로 블로그 글도 쓰고 있습니다.
3. 마차살 드리븐 유럽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현 회사의 마지막 출근일은 10월 10일. 남아 있던 휴가를 전부 털고 다음 회사로 출근하는 건 11월 17일. 약 한 달의 시간이 빈다. 처음에는 이 시기에 운전면허를 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퇴사 날짜가 잡히고 나자 이 황금 같은 시간을 고작 운전면허 취득 따위로 소모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허야 급하면 언제라도 딸 수 있다. 심지어 지금은 그렇게 급한 상황도 아니다. 이 시기에 해야 하는 건 지금 아니면 가기 어려운 멀고 긴 여행이 아닐까? 기왕이면 유럽이나 미국으로. 근데 미국은 별로 관심 없으니까 유럽으로.
여행 코스를 짜는데도 일주일 넘게 걸렸다. 마차살 성지순례 겸 독일 여행을 가도 재밌겠다는 생각이야, 유럽을 처음 떠올린 그 순간에 바로 했지만 “진짜” 그런 여행을 갈 것인지 최종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유럽 여행하면 보통은 런던, 로마, 파리, 하여간 누가 들어도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들에서 시작하지 않나? 독일 문화와 역사, 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독일 여행을 간다기엔 또 그 정도로 뭘 아는 것도 아니다. 난 아직 니체도 잘 모른다. 독일어는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다. guten Morgen! 이대로 괜찮나 이거? 혼자 여러 밤 갈팡질팡했지만.. 결국 독일만큼 가 보고 싶은 곳을 찾지 못했다. 웃기는 건 독일에만 일주일 넘게 체류하는 플랜인데 베를린은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로 짜기가 쉽지 않더라고. 대충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 뉘른베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가는 일정으로 잡았다.
지금 가장 기대되는 (마차살) 스팟들:
- 프라터 섬 : EC1 에서 에버렛 경이 바이에른 첫 데뷔했던 경기장
- 성 피터 교회와 전망대 : “마지막에 뭘 하려고 했어?” “노래를 불러야겠지.”
- 밤베르크 대성당과 구시청사 : 부활절 에피소드 시작점
p.s.
- 지명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마차살 정주행 다시 하는 중이다. 760화까지 언제 가지. 조만간 777화가 될 거라는 게 너무 무섭습니다.
- 이번 여행에서 독일만 가는 건 아니고 마지막에 리스본을 찍고 돌아온다. 뜬금없이 웬 리스본이냐? 그곳이 페소아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페소아 문학은 학창시절에 유독 좋아했던 거고 지금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좋아할 수 없는 면도 좀 있는 사람이지만) 꽤 예전부터 언젠가 페소아 투어를 위해 리스본에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서, 이렇게 여유롭게 유럽 갈 때 찍고 오는 게 좋을 거 같아 마무리 여행지로 잡았다. 독일 음식은 분명 고기와 맥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 마지막엔 지중해 음식 원없이 먹고 오고 싶었던 것도 있고.
- 여행 일지는 나중에 따로 포스트 또 쓰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