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와 헤어질 결심 (2)
트위터 아카이빙을 시작한지 어느새 3개월. 아카이빙은 이제 2023년 10월에 도달했다. 그 말은 내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하 『농놀』에 빠져 있었던 2023년의 기록이 날것 그대로 아카이빙 페이지에 남았다는 뜻이고, 현재 나는 그 기록을 모두 날려버릴지 고민 중이다.
왜 지우고 싶은가. 나도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논리가 필요하므로 생각해 봤다. 우선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 해동안 쓴 일기 트윗을 다 모아도 글자수가 2만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농놀 카테고리로 모은 트윗의 글자수는 벌써 10만을 넘었다. 2차 창작을 시작하기 전에 썼던 트윗은 아예 별도로 분리했는데도 그렇다. 10만자면 편집 조금 보태 A5 사이즈로 200페이지 책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해당 주제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숫자로 확인할 수 있게 기능을 만든 건 나인데도 10만이 넘는 숫자를 보니 내가 다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양이 많다고 기술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텍스트는 10만자 넘게 쌓여봤자 200KB에 불과하다. 용량을 걱정했다면 이미지 하나를 삭제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이게 가치 있는 텍스트라고 생각했다면 아카이빙 방법을 고민했지 지울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워버리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시절의 연속성. 마치 여자친구랑 스킨십 처음 해보는 중학생 남자애가 세포 하나하나에 반응해서 쓴 일기 같다. 텍스트 자체가 잘 다듬어진 건 아니므로 제3자가 보기엔 그냥 귀엽거나 좀 웃길 텐데, 이 텍스트에 담긴 시간을 아는 나는 이딴 게 과연 세상에 남아있어야 할지 한번쯤 고민하게 되는⋯. 부끄럽다는 말은 이미 여러 번 했고 이 이상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데, 부끄럽기 때문에 기록을 지우고 싶다면 나는 지금 회피를 하고 있는 걸까? 지금의 내 입맛에 맞는 기록만 취사선택해 이게 과거의 나라고 기억을 재편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이유는 또 뭐지? 이걸 왜 꼭 남겨야 하는데?
애초에 이 기록은 왜 필요한 것이었지? 다시 그 문제로 돌아왔다.
그건 아카이빙을 하다 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최초에 이 작업을 시작한 계기야 물론 있었다. 첫 글에서도 썼다시피 일론 머스크가 몇 년째 이렇게 난장을 치는데 나는 여전히 트위터를 그만두지 못했고, 트위터라는 매체가 나한테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 계정은 내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트위터를 그만둘 때를 대비해 소중한 내 기록의 주도권을 찾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몇 년치 트윗을 아카이빙하며 내내 그것만이 동기이진 않았다. 사실, 최종 목적지는 지금까지도 공란이다. 이걸 왜 하냐고? 그건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과정을 직접 걸어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목적도 있는 법이다. 결이 아주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언젠가 우치다 타츠루가 『하류지향』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한 국립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 대학의 신문을 만드는 학생이 인터뷰하러 와서 처음 한 질문이 “현대사상은 왜 배워야 하나요?”였다. 이 질문을 한 학생은, 내가 그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하면 그것을 배워도 좋겠지만 내 답에 설득력이 없으면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학술 분야가 배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거만함과 무지에 정말로 감동받았다.
세상에는 스무 살짜리 학생이 갖고 있는 가치 척도로는 계량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그 학생은 자신이 애용하는 30센티미터 자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측량하려는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 자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A를 해 본 나는 A를 해 보지 않은 나보다 반드시 뭔가를 더 알고 있다. 그것은 지식이나 결과 측면에서 우열이 나뉘는 문제이기보다는 서로 다른 지평에 서 있어 다른 시야를 갖게 되는 문제에 가깝다. 설령 A를 해 본 끝에 내가 알게 된 것이 고작 ‘이거 다 부질없네’여도, A를 해 보지 않은 나는 그 부질없음을 짐작만 할 뿐 확신해서 알지는 못한다. 확신할 수 없음은 그다음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A를 해 보지 않은 나는 결코 설명만 들어서는 A를 해 본 나의 지평을 알 수 없다. 경험을 겪고 시간을 통과한 신체의 감각은, 내가 나를 인지할 때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농놀 아카이빙은 부질없었다. 그걸 언제 깨달았냐면, 10만자가 넘는 기록을 하나하나 복사-붙여넣기로 옮기면서 알았다. 손목 빠지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니라 일할 때보다 더 무리했다. 특히 컨트롤 키를 누르는 손가락은 정해져 있다 보니 한달치 트윗을 아카이빙 페이지에 옮기고 나면 한동안 왼쪽 새끼손가락이 저렸다. 게다가 그 시절의 트윗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 교류했던 흔적이다. 다른 사람의 2차 창작물에 주접을 떨고 감상을 전했던 흔적, 내가 내 2차 창작을 쓰며 끙끙 앓았던 흔적. 그런데 그렇게 교류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은 트위터에 남아 있지 않다. 계정을 삭제했거나, 트윗을 삭제했거나, 계정은 아직 있는데 비공개로 전환했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나를 차단했다. 트위터는 참 친절하게도 나를 차단한 사람이 올린 게시글은 또 볼 수 있게 해 준다. 단지 좋아요를 누르거나 팔로우를 할 수 없을 뿐. 이것 또한 일론 머스크의 결정으로 인한 변화다. 자기를 차단한 사람들의 게시글을 볼 수 없는 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지.
2차 창작을 처음 시작한 5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간 작성한 10만자를 하나하나 넘긴 끝에 나는 어쩐지 진이 빠졌다. 인터넷 잔해의 한복판. 그런 감상이 스쳤다. 한때는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이 주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트위터를 켜면 타임라인에서 농놀 얘기를 피할 수 없을 만큼 들끓었는데 유행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이렇게 폐허다. 남은 건 허공을 보며 혼자 떠들고 있는 내 기록과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된 옛 트친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쓸쓸함뿐이다. 10만자나 긁어모았는데도, 모으면 모을수록 이 데이터는 불완전하고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카이빙의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이건 이미 오염됐다. 온전히 보존되기 위한 맥락을 잃었다. 게다가 상대방 계정이 아직 남아 있는 경우에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다. ‘내’ 아카이빙 페이지인데, 나와 교류했던 상대방의 정보와 답글은 어디까지 복사해 와도 되는 걸까?
어떻게 가져와도 기록은 온전치 않고, 근데 양은 너무 많고, 손가락은 저리고, 나는 내려도 내려도 끝이 안 보이는 스크롤바를 붙잡고 내리며 그 시절의 광기를 다시 한번 체감했다. 2023년은 지금도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진다. 하루에 농놀 트윗만 열댓개씩 써대는데 회사는 어떻게 다닌 걸까? 일은 잘 했던 걸까? 근데 트윗만 쓴 게 아니라 2차 창작 소설도 쉬지 않고 썼다. 5월부터 12월까지 쓴 글만 도합 30만자다. 퀄리티는 둘째치고 대체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았는지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어서 때로는 이게 다 전생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무수히 많은 기록, 나를 드러내고 싶었고 남에게 인정받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그 모든 순간의 난장판이, 결국은 돌고 돌아 아주 짧게 요약된다.
이 이상 더 설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페이지를 공란으로 남겨 ‘설명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게 가장 정확한 아카이빙이 아닐까? 어차피 정말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모두 직접 만든 책으로 남았고, 그 시절이 정말로 무엇이었는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친구들이 기억해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