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언제나 뿌리만 있고 열매가 없다. 집에서 혼자 오래 일했으니 간만에 밖에 나가자는 목표를 세웠다가, 심심함과 외로움은 다른 거라던데 지금 나는 어디쯤 있는 걸까 고민하고, 똑같이 답보 상태에 있는 친구를 만나 서로를 위로한들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을 하다, 애초에 내가 자처한 외로움이지 않나 자조하고, 행복은 당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약속된 미래로 가고 있다는 환상에서 온다는 사라 아메드의 말을 문득 떠올리고, 그냥 읽던 책이나 마저 읽을까 하다가, 나는 왜 이번 도서전에서도 이렇게 밀도 높은 책밖에 사 오지 않았나 다시 한숨을 쉬는 것이다.

일이나 독서에 몰입해 있는 순간, 글을 쓰는 순간,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을 인터넷 공간에 남겼을 때 누가 보내주는 리액션, 정확히 이 세 순간에만 외로움의 스위치가 꺼진다. 바람이 세게 불 때 잽싸게 옆으로 눕는 촛불처럼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내 살아난다. 흔들릴 일은 있어도 영원히 꺼질 일은 없다는 듯 외로움의 불씨가. 불 위로는 많은 문장이 지나간다. 먼저 6월에 읽은 존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 그 책을 통해 테리 이글턴에게 관심이 생겨 이글턴의 『비극』을 읽었는데 테리 이글턴은 에른스트 블로흐를 자주 인용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이유로 샀던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도 블로흐를 여러 번 인용한다. 블로흐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인데 공교롭게도 요즘 19세기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웹소설을 진득하게 읽고 있다. 집에는 여전히 『강철왕국 프로이센』이 꽂혀 있다. 같은 웹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내 프로이센 책에 관심을 가져 주고, 그 외의 사람들은 너 덕분에 세상에 그런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폭풍 다음에 불』은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추천 받았던 책이다. 그 채널에서 다른 구독자가 언급했던 책 『시작의 앎』도 얼마 전에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사상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근대사를 읽고자 한다. 그런데 파농의 사상은 레비나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두 사람은 동시대의 프랑스를 살았고 각자의 방면에서 타자를 이해하고자 했다. 레비나스의 출발점인 신학, 그리고 파농의 출발점인 정신분석학의 기반 논리가 겹치기 때문에 둘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최근에 트위터 친구가 된 분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보는 촛불 안에는 이런 풍경이 있다. 읽어야 할 책들이 공중에 둥실둥실 떠다닌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배우고 싶은 주제, 배우고 싶은 언어. 무한히 펼쳐진 바벨의 도서관. 나는 하루종일 이 안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고개를 들면 촛불은 사라진다.

첫 단추가 잘못됐다. 외로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화, 불화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책을 읽으며 내가 붙드는 질문과 회사에서 내게 요구되는 역할,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심, 길을 잘못 고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매일 생생하게 부딪친다. 나는 자꾸만 이 세상을 분절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탄핵 시위로 광장에 나갔다 판교에 돌아왔을 때 무슨 일이 있냐는 듯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거리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고, 트위터 안과 밖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책의 낱장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내가 또 꿈을 꾸고 있지 않은지 생각한다. 이런 분절의 기원은 서브컬처까지 올라간다. 지금은 오타쿠라는 단어가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오타쿠는 그냥 사회성 없는 찐따라는 뜻이었다.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얘기해도 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요즘 유행 컨텐츠와 오타쿠들끼리만 얘기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컨텐츠가 나뉘어져 있었고 그 둘을 잘 구분하는 건 학교 사회에서 수치스러울 일 없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소양 중 하나였다. 사실 이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사람들이 『진격의 거인』을 굉장히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컨텐츠처럼 언급하는 요즘이 어떨 때는 더 혼란스럽다⋯.

이야기가 샜다. 어쨌든 나는 분절된 세상을 왔다갔다한다.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선택받은 아이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디지몬 세계를 드나들듯 나도 화면 안팎으로 점프를 뛰고, 종국엔 어디를 내 거주지로 삼아야 할지 매번 고민한다. 분절은 나보다 앞서있다. 나는 늘 이미 정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인식한다. 자본주의와 탈자본주의의 길. 직장인과 창작자의 길. 문과와 이과의 길⋯. 타고난 불안과 성향 때문인지, 나는 내가 그 경계선 자체를 교란할 수 있거나 이미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한다.

(To Be Continued⋯.)